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창비시선 309
이문숙 지음 / 창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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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이 꾸준히 발행되고 팔리는 거의 유일한 나라, 아직도 출판사마다 시인들이 활발하게 시집을 찍어내고 고정 독자층이 확보되어 있는 특이한 양상을 보이는 나라 대한민국. 그것은 아마도 민족문학에서 시가 차지하는 비중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근대문학 이전에 고전문학은 한시를 중심으로 시조와 가사가 주종을 이루었다. 시는 항상 지배층의 지적 우월성을 표현할 수 있고 학문적 깊이를 드러내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17,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이 창작되었지만 저급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소설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내용과 어렵지 않은 전달 방식을 가지고 있다. 시가 가지고 있는 고급스런 이미지는 다양한 층위에서 벌어진 문예사조의 부침에 따라 달라지긴 했지만 그 위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문숙이라는 시인은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으로 처음 만났다. 시집을 읽는 동안 시가 가지고 본질적인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시의 기능과 효용에 대한 쓸데없는 상념들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이문숙의 시는 요란하지 않고 조용하게 주변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기교도 없고 특이한 발상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개성 없는 말장난이라는 뜻은 아니다.

악어 쇼

아무도 없는데 돌아보니
악어 한 마리 입을 벌리고 있어

빨간 타이츠를 입은 소냐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활짝 폈다가
주먹을 만들어
벌린 입속으로 집어넣어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불을 한입 달게 먹고는
또다시 울퉁불퉁한 이빨 사이로 넣어

무릎을 꿇고 천천히 윗몸을 들어올려
잘 휘어진 등 아래로
긴 머리카락을 몇 번 흔들다가
머리를 악어의 커다란 주둥이 사이로

나도 그 속으로 펜을 쥔 주먹을 넣었다 뺀다
(주먹은 잘라지지 않고)
나도 매일 부글거리는 머리를 넣었다 뺀다
(머리는 동강나지 않고)

악어가 입을 다물어 이빨들이 맞물리지 않는 한
악어 쇼는 계속되리라

포만한 악어는 절대 사냥감을 찾지 않는다
벌어진 입을 억지로 닫아주기 전에는


  풍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면 좋은 시가 아니다. 적절한 비유와 다양한 의미를 증폭시키는 상징은 시 읽는 즐거움이다. 이 시집의 서시 ‘악어 쇼’는 현실의 변주곡으로 읽힌다. 어쩔 수 없는 ‘쇼’는 계속된다. 두려움과 공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쇼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그것을 즐기고 박수를 칠 것이다.

  견고한 현실의 벽을 두드리는 듯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관찰하는 시인의 눈. 이 시집을 통해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를 듣게 된다. 낯선 언어의 진경이 아니라 익숙한 말들의 투박한 이야기.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움직일 때마다 지팡이 땅을 그러쥔다
그 옛날 논골이었다는 이곳
논으로 흘러들지 못한 물소리 저만치 하수구로 흘러간다

그 남자 한 발짝을 들어올리는 동안

여기엔 그 옛날 작은 다랑이논들
물소리에 귀를 열어뒀으리라
왼손이 뒤틀리고 주먹 쥔 듯 오그라진 손을 치켜들고
그 남자

이제 다랑이논들은 노인정에 모인 그들의
이마에나 굵은 굴곡으로 남았다

겨우 그 남자 몸을 일으켜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지팡이는 땅으로 뿌리를 뻗고 새순 한 가지
쳐올릴 수도 있었으리라

갑자기 정자 기둥에 붙은 괘종시계가 울린다
무거운 시계추가 왔다갔다한다

치주염을 앓는 누런 이빨의 구름들
가는 귀먹은 노인들의 귓속으로
보공(補空)하듯 쑤셔넣는다


  쉽고 가볍게 읽히는 것은 아니지만 알 수 없는 부호들의 나열도 아니다. 그녀의 시는, 우리의 삶은 어쩌면 ‘한 발짝을 옮기는 동안’ 끝나버릴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찰나의 삶과 죽음.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는 동안 시계추는 끝없는 왕복운동을 하고 모든 존재는 소멸한다. 그렇게 숨가쁜 세월이 지나가는 어떤 순간, 우리는 겨우 한 걸음을 옮겨 놓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아, 니체의 말이 떠오르는 시 그리고 밤이다. “몇 번이라도 좋다.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

그 많은 구두들은

어디로 갔을까
부서지는 바닷물에 쓸려갔을까
쏟아지는 흙탕물에 떠내려갔을까
진열장에 놓여 있던 가닥가닥 끈으로
발을 감싸는
양 창자를 꼬아 만든

삶이 막막할 때마다
숫양이 머리를 파묻고 울거나 애무도 받았을

(공원에서 여자의 배를 베고 남자가 누워 있다)
(여자의 보드라운 배를 베고 남자가)
(오목한 배 위에 머리를 대고)
(구불거리는 창자에)

그 발에 딱 맞는 구두들은 어디로 갔을까
동그란 뒤꿈치 뾰족한 발가락 감싸던 그 화려하고 보석 장식이 많은
구두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카메라가 붙잡은 물 위를 둥둥 떠내려가는
구두 한짝

예쁘고도 사나운
벗어 철썩 사내의 뺨을 갈기던
구두들은
그 폭약의 여름은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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