숄로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8
미하일 숄로호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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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현실 사이 - 사회주의 리얼리즘

  삶의 진실에 가장 근접한 갈래는 소설이다. 인간 삶의 정수를 담아내는 데 가장 적합한 방식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문학은 철학과 역사와 더불어 인류의 지혜를 전수한다. 다양한 인간 삶의 모습은 물론 시대정신을 읽어낼 수 있는 문학은 어떤 학문적 성과나 객관적 사실보다 세계의 진실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수단이다. 그래서 세월을 이겨낸 문학의 고전들은 인류의 과거를 아프게 드러내며 객관적 진실을 보여준다. 모든 작가는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몸담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통찰력은 위대한 작가들이 가진 공통된 특징이다.

  객관적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사실주의(寫實主義realism)는 이상주의적 계몽주의와 환상적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로 19세기에 탄생한 문예사조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사회주의를 표방한 국가가 탄생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정점에 이른다. 소설은 ‘사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현실을 말해준다. 문학은 현실이며 현실은 그대로 문학이 된다.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다. 위대한 고전은 이런 이야기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문학적 진실을 전해준 작품들이다. 러시아 혁명과정과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으면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이념이란 무엇일까.

  숄로호프의 소설은 우리에게 멀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단순히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표피적 사실이 소설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단편들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던 우리의 이야기와 너무 닮았기 때문에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힌다. 이념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혹은 형이 동생에게 총을 겨누는 현실을 우리도 겪었기 때문이다. 그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고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남아 사회적 통합을 방해하고 있다. 상식과 이성으로 풀어나갈 문제들이 색깔론으로 덧칠되고 좌우 이념 대립과 무관한 문제까지도 감정적인 적대감을 드러낸다. 숄로호프의 소설은 과거의 지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아픔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문학은 여전히 현실의 가장 고통스런 부분을 드러내고 작가는 그 고통의 원인과 상처를 극적으로 기록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숄로호프는 작가의 역할에 최선을 다한 작가로 평가받아야 한다. 문학을 통한 미적 경험은 단순히 정서적 아름다움과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와 사회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느껴져야 한다. 그래서 한 권의 소설로 한 시대를 읽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책을 고전이라 부를 수 있다. 


러시아, 아물지 않은 20세기의 혁명과 상처

  1917년 11월 7일 혁명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된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은 1992년 1월 1일 독립국가연합으로 해체된다. 자본주의가 자연스럽게 붕괴한 것이 아니라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보여주었고,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의 승리를 증명해주었다. 20세기를 붉은 혁명의 성공으로 출발하며 인류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으나 100년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반성과 고찰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니다.

  숄로호프는 고향 돈 강 유역 카자크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담아냈다. 참혹한 현실, 민중들의 삶이 숄로호프의 관심사였다. 고향의 이야기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소설의 중심을 이룬다. 6. 25를 통해 양산된 수많은 전후 소설들을 떠 올려 보자. 이념의 대립과 갈등 자체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비극을 설명할 수 있을까? 숄로호프도 가족과 고향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간의 운명’, ‘배냇점’, ‘타인의 피’ 등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비극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이념과 전쟁으로 인한 모순과 비극 때문이다. 러시아 민중과 인류 전체의 비극이기도 한 20세기 역사의 한 페이지로 읽어야 한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들의 아픔은 역사적 친연성 뿐만 아니라 인류의 보편성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 아프고 불편한 감정을 떨칠 수 없는 것은 ‘슬픔’에 대한 보편성 때문이 아니라 길고 지난했던 역사의 인과관계 때문이었다. 그 고리는 여전히 우리들 현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다.

  혁명은 성공했으나 좌절했고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상처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숄로호프의 단편선』을 통해 전쟁과 상처, 야만과 폭력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하고도 뻔 한 대안을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 넓고 깊은 휴머니즘이 불가능하다면 숄로호프의 소설은 다큐멘터리 기록 필름에 불과할 것이다. 여전히 폭력과 광기에 사로잡힌 시대에서 자유롭지 못한 21세기의 현실을 돌아보자. 숄로호프의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래서 여전히 유효한 지도 모르겠다. 고전은 현실을 비추는 등불이다.


1002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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