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 - 고종석의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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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온전한 사랑이라면, 환경과 거리상의 장애가 충분한 애정을 공급하는 걸 방해하여 애정의 굵은 선이 가는 선으로 바뀔지는 모르지만, 말라비틀어진 상태에서도 감정의 동맥은 사랑을 끊임없이 담아 심장으로 옮기는 법이다.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의 운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 적어도 감정의 본질만은 손상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랑. - 『사랑에 관한 연구』(P. 38),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여자 그리고 사랑

  사랑은 본질적인 자아와의 만남이다.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를 벗고 내 존재의 심연과 마주하는 일이 사랑이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근본적으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개별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취향이 아니라 흔들리며 피는 꽃처럼 위태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소설가 정이현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통해 본능적으로 현실에 적응적인 여성들을 보여주었다. 그녀들의 이기적 욕망과 계산적 사랑에 대한 냉소는 작가가 만든 허구가 아니라 우리들이 만들어낸 일그러진 자화상일 지도 모른다. 김연수도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통해 사랑과 현실 사이의 비루함을 경쾌하게 보여준 바 있지만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를 통해 사랑과 이상의 보편성에 접근하고 있다. 이처럼 소설에서는 수많은 방식으로 사랑을 이야기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랑은 이야기의 가장 풍요로운 주제가 되었으며 인간 삶의 가장 큰 바탕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물론 그러하다.

  고종석은 소설을 쓰고 시를 읽어주고 현실을 분석하다가 때때로 언어의 정밀함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다. 『고종석의 여자들』은 두 가지를 유의하며 읽어야 한다. 하나는 고종석이며 또 하나는 물론 여자들이다. 그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자이노파일(gynophile)은 여성애호 혹은 여성취향 정도의 뜻으로 해석된다. 고종석의 글들을 읽어온 독자라면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책을 읽으면 되겠지만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오해없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또 한 하나는 여자들이다. 한 두 명도 아니고 34명의 여자가 고종석의 여자들이다. 현실과 허구를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가 들려주는 여자 이야기는 누구나 흥미 있게 들을 만하다. 취향의 문제가 해결되진 않겠지만. 여자와 사랑, 참 어렵다.


섹스(sex) 혹은 젠더(gender)

  생물학적 성인 섹스(sex)와 사회적 성인 젠더(gender)는 이 책을 이해하는 관점이 된다. 여성은 남성보다 현실적이지만 이성적 사랑에 더 큰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그것은 우열과 선악의 가치 판단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차이일 뿐이다. 통상적으로 유전적 본능과 심리적 진화의 결과라고 본다. 하지만 사회적 성역할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교육과 사회화의 과정에서 여성으로 길러지고 내면화되는 여성성은 올가미가 되어 순종과 억압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섹스와 젠더의 차이는 고종석이 말하는 자이노파일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 고종석은 생물학적인 섹스가 아니라 젠더로서의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때때로 이분법적 구별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성으로 태어나 여자로 길러지는 과정에서 부딪쳐야 하는 현실은 만만치가 않다. 더구나 시대 현실, 사회적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이었던 과거에는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이 책의 처음을 장식하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바로 그런 여성의 대표라고 볼 수 있다. 혁명 전사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과 한없이 여성이 되고 싶었을 그녀의 삶에 대한 고종석의 연민어린 시선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도 작가의 관심은 여성성과 사회적 존재 사이의 어느 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여자들이 다수 등장한다.


고종석의 여자‘들’

  한 여자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라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 함의를 가지고 있을까. 이 책에 아니 고종석에게 선택받은 서른 네 명의 여자들은 흥미롭게도 윤심덕과 최진실을 제외하면 대중예술을 통해 환상과 꿈을 심어준 여성이 눈에 띄지 않는다. 노래와 춤 혹은 연기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와 실제 여자 사이에는 그만한 간극이 있는 것일까. 특이한 두 명의 이야기는 ‘자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기는 하다.

  고종석의 여자들은 역사 혹은 사회적 맥락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여자들이다.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이나 호기심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 책에 소개된 여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익숙치 않은 여성들도 있지만 측전무후, 임수경, 오프라 윈프리에 이르기까지 생존 여부를 떠나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여자들도 많다. 그러나 대부분 시대와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삶에 대한 열정과 뚜렷한 신념을 가졌던 여성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의 삶은 오히려 간결하고 단순하다. 범접하지 못할 아우라를 뿜어내는 경우도 있지만 개인적인 능력의 유무를 떠나 삶의 자취에 향기가 묻어나고 열정의 깊이에 감탄할 만한 여자들이 소개된 책이다.

  또한 이 책은 그녀들을 바라보는 고종석의 눈을 빌려보는 데 의미가 있다. 고종석의 선구안과 문체는 고종석을 이해하고 그녀가 선택한 삶을 긍정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책이 작가의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객관적 시선과 보편적 정서를 끌어 낼 수 있다면 읽을 만한 책이 아닐까 싶다. 수필 형식의 짤막한 글들이 완성도 높은 전체 구성을 염두해 둘 수는 없다. 신문에 연재된 칼럼을 모은 책이 가진 한계가 서른 네 명의 매력적인 여자들을 만나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책의 말미에 고종석의 친구 황인숙과 강금실의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어 반갑기도 했고 저자의 인간적인 모습에 공감하며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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