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생활 40년 자전에세이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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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은 ‘상상체 공동체’가 아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을 전면 부정하는 조정래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다.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추상적으로 조작된 것이 ‘민족’이라는 주장과 신산스런 근현대사를 버텨낸 어른들의 ‘민족’ 개념은 접점을 찾기 힘들다. 그런 측면에서 민족주의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훗날 조정래 소설의 중요한 분석틀이 될 것이다.

조정래의 작가 생활 40년을 결산하는 자전에세이 『황홀한 글감옥』에서 내가 읽어낸 키워드는 ‘민족’이다. 민족에 대한 개념과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조정래의 소설에서 ‘민족’을 지워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삶과 고통스런 역사를 소설에 담아내고자 노력했던 대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이 주는 감동을 넘어 시대와 현실을 바라보는 눈, 역사인식의 태도, 치열한 삶의 자세, 문학에 대한 경건한 태도가 진하게 배어나는 진지한 목소리 때문이다. 단순히 열렬한 애국심과 한민족에 대한 애정으로만 볼 수 없는 작품들이 그를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민족’을 바라보는 태도와 방향에 따라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독일의 아우슈비츠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레드 콤플렉스이다. 미국의 메카시즘은 시대를 반영한 해프닝 쯤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대한민국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21세기도 여전히 한국 정치와 사회 곳곳을 좌우하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판단기제로 작용한다. 10여 년간 국가보안법 논란에 휩싸였던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2005년이 되어서야 무혐의 처리되었다. 이 사건은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과 대립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넘어 우리 민족의 진정한 화합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황홀한 글감옥』은 대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쓰였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등을 통해 한민족의 근현대사를 소설로 담아낸 작가에게 젊은 대학생들은 궁금한 것이 많다. 작품의 내용은 물론 글을 쓰는 방법과 개인적인 호기심까지 다양한 질문을 쏟아낸다. 작가는 애정 어린 답변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와 우리 ‘민족’에 대한 해석을 제시한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진실’만 말하고자 하는 작가는 필연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으며, 기득권을 향유하는 보수 세력과는 갈등하고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비판정신이며 휴머니즘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 P. 36

문학, 아니 소설은 사실(fact)이 아닌 진실(truth)을 말한다고 칠판에 자주 적는다. 사실과 진실의 차이는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만큼 다양하다. 또한 하나의 객관적 사실에 드러나는 진실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바로 이런 사실과 진실의 거리를 잘 말해준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로 환원한다면 조정래가 소설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진실’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결국, 소설적 진실은 ‘비판정신이며 휴머니즘’이라는 작가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면 일단 그의 작품을 꼼꼼하게 읽어보자.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본문 195쪽)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소설가는 무엇을 쓸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쓸 것인가를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태백산맥』열권과 『아리랑』 열 두권을 각각 1주일 만에 읽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나를 잊고 소설 속을 헤맸다. 그리고 10년쯤 시간이 흐른 후에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22권을 통해 다시 대한민국의 역사 더듬었다. 역사는 사람살이의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왕조중심의 거시사든 생활사나 미시사든 선택과 집중의 문제이며 해석과 관점의 문제일 뿐이다. ‘소설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답하는 조정래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글감옥에서 자유를 찾다.

‘열정은 능력이다’ - P. 96

삶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은 꿈이 없는 사람이다.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삶의 도구는 바로 ‘열정’이다. 소설가 조정래의 가장 큰 미덕은 열정이다. 대하소설 세 편을 완성하는 20년 동안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고 매일 써야하는 원고의 분량을 정해놓고 스스로 정해놓은 ‘글감옥’에 갇힌 작가는 과연 불행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가장 큰 자유였고 행복이었다. 열정을 쏟아부을 대상이 있고 그것을 즐길 줄 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조정래의 분명 가장 큰 축복이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다. ‘현대인들에게 책을 읽힌다는 것은 리모컨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라고 저는 인식했습니다.’(본문 252쪽)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모컨과 싸워 이기는 글쓰기! 얼마나 치열하고 지독한 싸움이어야 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 싶다.

그가 그려낸 우리의 근현대사는 결국 아름답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그 세월 속에 민중들의 지난한 삶이 존재했고 여전히 굴곡진 생활들이 계속된다. 그러나 이 모든 삶이 우리의 역사이고 선조들의 삶이다. 소설을 통해 그가 보여주려 했던 것은 오욕의 시간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우리의 생활이며 그 삶의 토대를 만든 역사적 진실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순간 어떤 작가가 될 것인가도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조정래는 글쓰기를 통해 자유를 찾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식인의 참된 삶은 자유로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참된 지식인의 삶은 고달프나 그 의미와 보람은 하늘의 넓이입니다. - P. 379 
 

10011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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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만 말하고자 하는 작가는 필연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으며, 기득권을 향유하는 보수 세력과는 갈등하고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비판정신이며 휴머니즘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 P. 36

‘열정은 능력이다’ - P. 96

‘충고란 그동안 있어왔던 우정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을. 결국 당신 인생의 주인은 당신이고, 당신 운명의 주인도 당신입니다. - P. 125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 - P. 195

숨이 막힌다고요? 예, 이 세상의 모든 노동은 치열한 것을 요구할 뿐 감상적 기분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노동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로 행 ․ 불행이 갈립니다. 저는 그 숨 막히는 노동의 세월을 ‘글감옥’이라고 표현했고, 그 노동을 하고 있을 때 가장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작가’라는 직업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 P. 249

현대인들에게 책을 읽힌다는 것은 리모컨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라고 저는 인식했습니다. - P. 252

참된 지식인의 삶은 고달프나 그 의미와 보람은 하늘의 넓이입니다. - P.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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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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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다시보기

  천재는 시공을 초월한다는 자명한 사실. 모차르트(1756~1791)는 그 사실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떠난 지 200년이 지났으나 그는 여전히 살아있는 전설이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명멸했으나 모차르트가 남긴 영향은 누구보다 강렬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불운의 천재라는 세간의 평가는 헛말이 아니다. 음악 신동으로 다섯 살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경외와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으나 그의 음악인생이 결코 행복으로 가득했다고 볼 수는 없다.

  독일의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조금 특별한 시선으로 『모차르트』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 대한 미시적 분석과 사회변동에 대한 거시적 분석이 통합될 때 모차르트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이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오래된 연구 주제이다. 다만 그것을 어떤 합리적 근거와 논리적 기준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문명을 바라보는 나름의 기준과 정확한 관찰과 분석이 이루어져야 사람들은 그 사회학자의 판단을 귀 기울여 듣게 된다. 그런 면에서 엘리아스의 첫 책 『모차르트』을 통해 나는 그의 관점을 신뢰하게 되었다.

  이 책은 사회학적 관점으로 바라본 ‘모차르트의 일생’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당시 궁정 귀족과 예술가의 관계, 모차르트의 기질 등이 어떻게 내면적 갈등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지 살펴 볼 수 있는 책이다. 수많은 모차르트에 관한 책과 영화 자료들이 넘치고 있지만 사회학자의 담담한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 것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차르트와 그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눈에 있다.  


사회적 맥락과 천재성

수공업 예술의 시대에 주문자의 취미 규범은 창조자 개인의 예술적 환상보다 더 중요한 예술 창작의 기본틀이었다. 예술가의 개인적 상상력은 체제 내의 주문자 계층의 취미 규범에 맞춰 엄격하게 조종되었다. - P. 65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모차르트는 태어나면서부터 음악 속에서 길러졌다. 어떤 재능과 천재성이 있는지 경험하지 못하고 그러한 환경에 노출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천재적인 예술가라 할지라도 수공업 예술 시대에 궁정 음악가는 왕과 귀족들의 시종에 불과했다. 유럽 연주여행을 통해 찬사를 받지만 그것은 왕과 귀족들이 원하는만큼 지급하는 급료를 받는 일시적인 경외에 지나지 않는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했던 아버지와 달리 모차르트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음악을 원한다. 개인적 상상력보다 주문자 계층의 취미를 우선했던 공급자의 옷이 천재에게 맞을 리 없었던 것이다.

  궁정 사회에 대한 모차르트의 이런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태도는 그의 삶과 작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생계를 책임지고 그의 음악을 인정해 주는 궁정사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고 시민계급으로서 완전한 자유와 예술적 창조성을 발휘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공격적인 인간이었다. 괴팍하고 다혈질의 성격을 갖고 태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지배층에 대한 공격성이 나타났고 훗날의 경력은 이를 증명해 준다.

  자유 예술가로서 충분한 음악적 감수성을 펼쳐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모차르트의 생애와 사회적 상황이 잘 설명해 준다. 결국 모차르트의 천재성도 사회적 맥락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제도적 틀과 한계 때문에 음악적 완성도가 떨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삶을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해하고 그의 고민과 방황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모차르트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음악적 코드이다. 그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가 표현하려고 했던 예술적 환상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시대를 이해하고 사회적 맥락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일 것이다.     

저항과 요절

  잘츠부르크에서 다시 빈으로 돌아간 모차르트의 반란은 아버지에 대한 반란이면서 견고한 사회적 구속에 대한 저항이었다. 모차르트의 평생 ‘인정’과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것이 개인적이고 이성적인 사랑이든 사회적이고 예술적 감수성이든. 하지만 궁정 사회와 아버지의 요구를 벗어나는 것이 모차르트에겐 절체절명의 숙명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이런 모차르트의 상황을 ‘결혼’이 해결했다고 본다. 해방의 완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 말은 반어처럼 들린다. 사랑을 지키고 예술가로서 인정받고 싶었지만 상황은 만만치가 않았다. 경제적 곤란과 심리적 고독감은 천재를 지치게 했다. 철저하게 아버지에 의해 관리되었던 미성숙한 어른 모차르트는 이 상황들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35세, 이른 나이에 요절한 모차르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얼마나 많은 혹은 얼마나 뛰어난 곡들을 더 만들 수 있었을까.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사람들이 아쉬움을 토로하는 천재 중의 하나가 모차르트이다.

  천재는 한 분야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개인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기존 체계의 문제점과 한계를 벗어나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아닐까. 서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교향곡 41번 C장조 KV 551 “주피터”(브루노 발터 Bruno Walter (지휘),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Columbia Symphony Orchestra)를 듣고 있다. 이 곡이 음악적으로 얼마나 완벽한지 당시에 얼마나 충격적 변화를 이끌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시대를 거슬러 사회적 구조와 틀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비운의 천재를 생각하며 들었다.


10011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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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릿 베어 양철북 청소년문학 14
벤 마이켈슨 지음, 정미영 옮김 / 양철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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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은, 진실을 거부하지 않으며, 억압했던 고통을 자기 안에서 느끼고, 몸이 감정적으로 알고 있는 과거를 정신적으로도 받아들여 더 이상 억압하지 말고 통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앨리스 밀러, 『폭력의 기억』중에서
 

기억과 망각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산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 잊혀지고, 과거의 기억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방향으로 다시 조정된다. 기억의 오류는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정신적 상처를 스스로 이겨내기 위한 자정 능력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몸으로 기억한 것은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몸은 고통 받고 치유하는 과정의 화학적 반응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의 경험은 성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은 그래서 상처받기도 쉽다.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부모이다. 대부분의 경우 어머니는 안정과 사랑의 대상이지만 아들에게 아버지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대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무의식적 충동과 자아 방어’를 말하는데,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도구로 유용하다. 하지현은 『관계의 재구성』에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동성 부모에게서 느끼는 질투와 저항의 관계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로부터 폭행 당한 아들의 영혼은 어떤 상태일까?

  벤 마이켈슨의 장편소설 『스피릿 베어touching spirt bear』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심리소설이다. 피터 드리스칼에게 끔찍한 폭행을 가한 주인공 콜 매슈는 평소에도 폭력 성향이 강한 15세 소년이다. 그는 감옥에 가지 않을 목적으로 인디언의 치유 방식인 ‘원형평결심사’를 통과하고 알래스카 남동부의 섬으로 떠난다.

  소설은 아버지가 콜을 폭행하는 장면, 알콜 중독으로 남편을 말리지 않는 어머니를 통해 15세 소년의 ‘무의식적 충동과 자아방어’ 기제를 설명하고 있다. 피터를 폭행한 것은 콜의 현재 모습이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대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콜을 통해 ‘아버지의 폭력 → 몸과 영혼의 상처 → 분노 → 타인과 세상에 대한 폭력’에 이르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콜은 아무도 없는 섬에서 어떻게 이 지독한 슬픔과 분노 그리고 타인의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을까?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위대한 자연의 힘

  외딴섬에 혼자 살게 된 콜은 틀링깃 인디언 에드윈 노인이 지어놓은 오두막을 불태우고 희고 거대한 ‘스피릿 베어’를 만난다. 콜은 스피릿 베어를 죽이기 위해 칼을 휘두르다가 온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극적으로 살아난 후, 보호관찰관 가비의 도움으로 다시 원형평결심사를 요청한다. 스피릿 베어를 통해 끔찍한 폭력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콜은 진정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섬에 돌아온 콜은 스스로 불태운 오두막을 다시 짓고 찬 물에 몸을 담그고 돌을 들고 산에 올라가 언덕 아래로 ‘분노’를 굴려 보낸다. 마치 ‘시시포스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돌 굴리기는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콜은 외롭고 힘겨운 섬 생활을 통해 자신의 분노와 상처의 원인을 찾고 스스로 치유하게 된다. 작가는 주변 모든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던 콜을 자연과 대립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그러나 위대한 자연 앞에서 모든 인간은 겸손해지는 법이다. 콜도 자연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작가는 상처의 원인을 ‘아버지의 폭행’으로 단순화시키지 않고 콜이 가진 내면의 슬픔과 분노로 보았다. 더 나아가 자연을 통해 겸손과 정직 그리고 용서를 배우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타인의 고통을 통한 상처의 극복, 그리고 성장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중에서

  2차 피해자인 피터는 결국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다. 우여곡절 끝에 가해자인 콜이 사는 섬에 도착한 피터. 두 사람의 동거는 이 소설의 백미라고 볼 수 있다. 도덕적이고 뻔한 결론을 위한 수순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치유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 콜과 점차 마음을 열게 된 피터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극복하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에서 ‘분노는 거부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라는 에드윈 영감의 말은 콜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준다. 분노가 사라지고 자신과 ‘타인의 고통’까지 이해하고 용서하는 두 소년의 모습은 다른 성장 소설과 구별되는 『스피릿 베어』만의 특징이다. 결국, 콜과 피터의 고통은 견줄 수 없는 것이며, 가해자를 처벌한다고 해서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가 전해진다. 작가는 타인의 고통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두 소년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부유한 부모를 가졌지만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콜은 청소년 문제의 핵심을 보여준다. 또한, 자연을 통해 콜이 상처를 치유하듯 인디언의 전통적 가치는 문명화된 미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연안에 살고 있다는 ‘스피릿 베어’를 통해 우리는 미니애폴리스에 살고 있는 콜의 삶을 반성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소 작위적인 설정이나 인과관계의 필연성 등 소설적 완성도의 부족은 콜의 진솔한 고백으로 상쇄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제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어요. 사람들은 두려워서 나쁜 짓을 하는 거예요. 가끔은 문제를 바로잡으려고 애쓰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죠.” - P. 225 

10011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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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수난사 - 여자보다 강한 어머니들 이야기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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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보고싶어요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고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 언제나 혼자서 끓여먹었던 라면 그러다 라면이 너무 지겨워서 맛있는것 좀 먹자고 대들었었어 그러자 어머님이 마지못해 꺼내신 숨겨두신 비상금으로 시켜주신 자장면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었어 하지만 어머님은 왠지 드시질 않았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야이야~아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후회하~고 눈물도 흘리고~……’

21세기 아이들이 랩으로 소화한 god의 <어머님께>라는 노래의 일부다. <불효자는 웁니다>로 시작된 ‘어머니’에 관한 노래는 80년대에 산울림의 <어머니와 고등어>가 짧은 가사와 경쾌한 리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땅의 어머니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신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혼자 흥얼거리시던 ‘얼굴’이라는 가곡이 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그래서 내게 ‘어머니’의 노래는 ‘얼굴’이다. 지금도 가끔 궁금하지만 한 번도 여쭙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떠올린 ‘빛나던 눈동자’는 누구의 것인지.

  아버지와 전혀 다른 정서와 이미지로, 항상 눈물과 함께 등장하는 대한민국 모든 ‘어머니’는 오늘도 안녕하신지 모르겠다. 여자와 아주머니 구별되는 ‘어머니’의 이데올로기는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궁금했다. 강준만의 『어머니 수난사』는 조선시대부터 2008년까지 역사적 관점에서 어머니의 역할과 사회적 의미를 고찰하고 있는 책이다.

  아들을 낳아야만 대접받는 사회에서 시작된 어머니의 수난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거쳐 전쟁 미망인의 고통을 넘어 입시전쟁을 통해 인정 투쟁으로 계속되도 있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어머니’는 신성함의 탈을 쓰고 여성들의 굴레로 남아있다. 성역할의 올가미는 문화적인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근대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급변했지만 가정에서 ‘어머니’의 상징성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이 책은 강준만 특유의 화법과 글쓰기 방식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후주(後註)가 34페이지 달할 만큼 본문 내용은 방대한 참고자료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철저한 고증과 각종 자료에서 인용한 글쓰기 방식은 시대별로 ‘어머니’의 위상과 의미를 밝히는 데 더없이 객관화된 방식이다. 공시적, 통시적 관점의 적절한 조화로 군더더기 없이 시대별로 깔끔하게 정리된 내용은 대한민국 여성들의 ‘수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여성의 역사라는 측면에서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이전의 책에서도 저자가 사용한 이 방법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신문과 방송은 사실(fact)의 전달이 기본이지만 책은 이것과 조금 다르다고 본다. 저자의 해석과 분석보다 인용이 많은 책은 독자에게 저자 특유의 개성과 일관된 관점을 직접 체험하기 어렵게 한다. 발터 벤야민이 인용문만으로 책을 쓰고 싶다던 욕망을 실현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것은 책이 아니라 거대한 신문으로 읽힌다. 책과 신문의 ‘어머니’ 관련 기사들을 정교하게 편집해 놓은 느낌이다. 저자의 의도가 바로 이것이었다면 매우 성공적이지만 한 권의 책이 들려주는 커다란 울림은 부족하다. 맺는말에서 ‘아줌마 혐오와 어머니 신성화’를 넘어서 현실의 문제를 성찰하고 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문학이 아닌 다음에야 현실적 대안과 문제들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고 사적 전개 과정이 도대체 어떤 영향과 결과로 이어졌는지 조금 떠 꼼꼼하게 짚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지나친 정보의 나열로 난삽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객관적 사실의 나열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하는데 의미를 둘 수 있겠지만 인용된 책과 자료들이 당시 여성과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인 경우가 많이 2차적 해석이 아닌 단순한 정보의 나열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그래도 여전히 강준만의 저작은 읽을 만하다. 누가 이만한 노력과 정성을 쏟아 하나의 주제를 통해 꼼꼼하게 사적 전개 과정을 읽어낼 수 있겠는가. 그가 보여준 학문과 사회 현상에 대한 접근 방법과 언론에 대한 대응 방식은 그의 글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이다. 색다른 글쓰기 방식에 대한 아쉬움보다 그의 노력과 성과가 훨씬 크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물과사상사의 ‘인사갈마들총서’ 시리즈가 보여준 재미와 믿음은 흰 화면에 한복을 입은 여인의 뒷모습을 내세운 어색하고 촌스런 표지가 오히려 순수한 진실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어머니 얼굴의 주름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는가. 이 책을 통해 쌓여온 세월의 무게와 대한민국의 ‘어머니’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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