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한 개비의 시간 -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문진영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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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여전히 흔들렸고, 버스 손잡이가 아닌 그의 팔을 잡았을 뿐인데 나는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내 옆에서 함께 흔들려주었기 때문인지도.

  그렇게 흔들리는 인생에서 단 하나 흔들리지 않는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한다, 우리는. 아니, 흔들려도 좋으니 옆에서 함께 흔들려주는 누군가를 원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불안하고 곁에 있는 사람조차 나와 다른 리듬으로 흔들릴 때 고독을 절감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다. 혼자라서 느끼는 외로움과 다른 내 실존의 깊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근원적 자아와 마주한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자아정체성이 형성될 무렵에 낯설과 자신과 대면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조차 불안하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죽도록 달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불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드디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진 후에도 고독하기는 마찬가지다.

  신인작가 문진영의 『담배 한 개비의 시간』은 2010년 청년들의 그로테스크한 초상화이다.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았으니 한 젊은이는 구원을 받았으나 그가 현실에서 만났던 혹은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청춘들은 결코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이 소설은 그만큼 우울하게 읽혔다. 소설은 어차피 읽는 독자들의 수만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고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나는 이 소설에서 미래의 희망이나 그래도 다시 한 번 따위의 안일한 현실 인식을 읽어내지는 못했다. 이 소설은 그만큼 참담한 현실을 건조한 목소리로 담아내고 있다.

  문진영은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스물넷 대학생이다. 여자 대학생이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모래바람이 서걱이는 메마른 목소리로 담아내고 있어 독자들에겐 출구 없는 미로처럼 답답하게 읽힌다. 단순하게 소설을 쓰기 위해 오랜 시간 습작 과정을 거친 문학 소녀의 글이 아니라 감수성 예민한 대학생의 고백처럼 읽히는 것은 문진영의 문장이 가진 매력이거나 현실의 아득한 거리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니체가 말했다.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할 수 있으랴. - P. 36


  소설은 네 명의 주인공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다. 보잘 것 없는 비정규직 혹은 예비 직장인의 생활에 대단한 사건은 없다. 물이 흐르듯 시간 속에 스며드는 청춘들의 하릴없음이 아프게 느껴진다. 미친 듯한 열정과 미래의 꿈에 대한 도전이 피 끓는 젊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부박한 현실에서 길어올릴 수 있는 작은 희망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소설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다.

  대한민국 자본주의 본산 강남의 한 편의점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희망도 미래도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좌절과 슬픔 속에서 우울하게 살아가는 청춘도 아니다. 그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M이나 편의점에서 교대로 일하는 J 또한 마찬가지다. 건너편 카페에서 일하는 물고기도 나와 비슷하다. 네 명의 등장인물은 성별과 상황만 다를 뿐 표정 없이 떠도는 미라처럼 감정이 배제된 것 같다. 익명성의 천박한 자본주의 중심에 서있는 주인공은 일회용으로 가득한 편의점처럼 조용하고 시원하게 그렇지만 환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 흑백필름 같은 현실을 문진영은 결코 우울하게 그려내지 않는다. 한낮의 빛이 어둠의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듯 네 명의 청춘들은 그들만의 깊이와 넓이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밝고 경쾌할 정도는 아니지만 잔잔한 미소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의 유머와 감각적인 문장들은 이 소설의 장점이다. 높고 큰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어딘지 꾹꾹 힘주어 눌러 쓴 초등학생의 공책처럼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할 것 같은 진지함이 묻어난다.

게다가, 딱 한 판만 더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거든. 한 판만 더, 한 판만 더…… 그러다가 막상 성공하고 나면, 그때는 최단기록을 내고 싶어지는 거야, 젠장. 사는 게 그런 거지. - P. 121

  사랑조차 돈에 저당잡힌 88만원 세대의 세태소설로 읽는다면 이 시대의 청춘이 너무 비참하다. 이 소설은 그렇게 통속적으로 읽을 수도 있겠으나 ‘꽃들에게 희망을’ 외치는 양치기 소년처럼 아이들에게 젊은이들에게 끝없이 경쟁을 강요하고 1등만 독려하는 사회의 어른들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가르친 어들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눈높이를 낮추면 취직할 수 있는지 취직하고 나면 결혼해서 집사고 행복하게 애를 키우며 살 수 있는 세상인지.

  세상은 조금씩 자란다고 믿는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이 만들어가는 바람직한 세상을 생각해 보자.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날개짓을 할 수 있는 한정된 공간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날 수 없는 날개를 달아 준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 아주 많은 위험과 시련 속에 서 있다. 교육, 환경, 정치, 사회, 문화 등 어느 것 하나 희망만으로 가득했던 시절은 없었지만 지금은 혹독한 겨울이다. 아무리 난해한 문장들로 가득 찬 책이라도 읽을 수 없는 책이 없는 것처럼 이겨내지 못할 겨울도 없는 법이다. 어쩌면, 당신이 그런 책일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당신은 늘 내게 책장을 펼쳐 보이고 있는 한 권의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언어로는 도무지 해독해낼 수 없는, 난해한 문장들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었다. - P.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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