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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사이프러스에서 ㅣ 사계절 1318 문고 56
박채란 지음 / 사계절 / 2009년 5월
평점 :
잊지마. 사랑이 제일 중요한거야. 작은 민들레 홀씨 하나에게도, 수백년을 살아낸 메타세콰이아 나무에게도, 그리고 너희들에게도, 똑같이 사랑이 가장 중요해.
사랑이란, 너희가 선택한 바로 그 삶 안에서 살아 있으려는 마음이니까. - P. 263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웁다는 말 한 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말을 백 번쯤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그리움은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이다. 그립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눈을 감은 채 그리움의 부피를 가늠하는 일이고 그 무게에 눌려 숨조차 쉬기 버거운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누구에게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말이다. 첫사랑은 말하자면 우리가 비로소 성인이 되기 위한 관문과 같은 것이다. 대부분 과거의 일일 터이니 ‘첫사랑’을 떠 올려 보자. 아득한 열기와 혼돈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끝없는 자책과 후회가 밀려온다면 지독한 첫사랑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이다. 서툴고 모라자서 아름다웠던 순간을 추억하며 늙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비겁한 것만은 아니다. 청소년기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그 혼란을 ‘사랑’과 함께 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박채란의 『목요일, 사이프러스에서』는 네 가지 사랑이 등장한다. 이성에 대한 사랑(새롬)은 물론이고 가족에 대한 사랑(태정과 선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새롬과 선주)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하빈과 선주)이 그것이다. 사랑의 종류를 나눌 수 있을지 의문스럽지만 그 대상을 나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열 여덟, 고등학교 2학년인 여학생들 사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엉킨 실타래처럼 사건의 실마리가 쉽게 풀리지 않는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을만큼 치밀하게 계산된 전개 과정은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사춘기 소녀들의 관심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거창한 꿈을 꾸기도 하지만 대부분 소박하고 사소한 일들이다. 이성에 눈을 뜨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새롬), 부모님의 이혼으로 헤어진 아버지를 그리워하기도 하고(태정), 자살한 언니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엄마 때문에 괴로워 하기도(선주) 한다. 백혈병에 걸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하빈) 아이의 입장에서 새롬과 태정 그리고 선주의 고통은 어떻게 보였을지 짐작이 간다.
사랑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하빈의 전언이 이 소설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삶은 숙명처럼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이었다. 부모와 환경을 탓하기도 하지만, 실제 그것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작가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아이들에게 다양한 사랑의 의미를 보여준다.
먼저 새롬이를 살펴보자. 사랑하는 오빠에게 버림받은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 못생긴 손이 콤플렉스지만 오빠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별의 아픔보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더 견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정이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를 잃는다. 영원히 떠나버리려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분노가 뒤섞인 마음이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선주는 남부럽지 않은 사회경제적 조건을 갖춘 환경이지만 억압적인 부모 때문에 자살한 언니를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통받는다. 세 명의 아이들은 하빈이라고 하는 아주 특별한 아이를 만난다. 또래 아이들보다 두 살이나 많은 하빈이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 그 이유가 그럴듯하게 설명되지만 오히려 독자들은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작가는 하빈이의 입을 빌어 사랑의 의미와 중요성을 말한다. 식물에 대한 사전적 지식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준다. 식물이 가지고 있는, 아니 자연의 신비가 품고 있는 진리를 인간은 얼마나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되묻고 있는 듯하다. 스스로 세상에 파견된 안전요원이라고 말하는 하빈이는 쉬운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코끼리가 아카시아를 돕는 방식을 통해 세 명의 아이들의 고민을 해결해 준다. 어쩌면 세 명의 아이들은 하빈이를 통해 스스로의 문제를 발견하고 자신을 치유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하빈이는 ‘거울’의 역할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가끔 살아있으려는 마음을 의심한다.
이 책의 제목이 된 ‘사이프러스’는 네 명의 아이들에게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을 배우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식물로 둘러쌓인 옥상 정원에서 아이들은 가슴에 응어리진 모든 의문을 풀어내고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착한 사람이 모두 바보가 아니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깨우치기도 하고 가족의 소중함을 확인하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10대 소녀들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심리 상태를 읽어내고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소설이 감동적인 이유는 현실을 문제를 읽어내는 섬세함과 대안을 제시하는 상상력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적 상상력을 포기하지 않은 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심각한 문제들을 밀도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특히 이 모든 소동과 혼란의 중심에 ‘자살’이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끌어들여 그 심각성과 중요성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원인을 제시하고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다소 억지스런 면이 없지 않지만 사회과학 분야의 책이 아니기 때문에 문학적 형상화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다만 하빈이의 생활기록부를 담임의 책상에서 확인하거나 전학 온 학교의 담임을 불러내는 일 등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몇 가지 요소가 아쉬웠다.
청소년들의 자살은 대입제도 등 사회구조적 문제, 부모들의 양육태도, 주변 환경 등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앞으로 많은 작가들이 좀 더 깊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주제이다. 무겁고 심각한 소재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작가뿐만 아니라 기성세대 모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청소년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현재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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