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의 없음
배수아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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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은 작은 이야기다. 새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한다.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 경험해 보지 못한 이야기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호기심과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 낯선 대상에 대한 호기심, 익숙한 것에 대한 엉뚱한 상상력을 갖추지 못하면 소설가가 되기 어렵다.

그러나 전통적인 서사구조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 작가는 무엇을 써야할까. 아니 이야기꾼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면 어떻게 써야할까. 배수아의 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은 소설의 틀과 형식과 규범에 대한 상식을 거부한다. 일반 독자에게 낯선 이야기의 구조는 색다름이 아니라 어색함과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한 모양이다. 천상 소설가로 살아야하는 것이 작가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면 충분히 그 고통을 즐길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단순한 창작의 고통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이야기의 구조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작가가 느끼는 개인적 고민일 수도 있고 문학의 갈래가 갖는 근본적인 형식적 고민일 수도 있겠다.

8편의 소설을 모아 놓은 평범한 소설집 『올빼미의 없음』은 가독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서사의 기본 틀은 와해되어 있다. 최근 2010년이 하나의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또다른 10년을 준비하는 대한민국 소설의 가능성과 방향에 대한 모색인지 지루한 형식과 방법에 대한 도전인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비단 배수아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또다른 작가들도 고민하는 부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소설이 당대의 시대 현실을 담아내야 하거나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지극히 당위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더라도 최소한 ‘재미’를 포기할 독자는 많지 않다. 고급한 독자의 취향 - 이를테면 박상륭류의 매니아가 아니라면 쉽게 읽히지 않을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속된 갈래라고 말할 수 있는 소설이 이렇게 꿈과 환상에 관한 기억을 더듬고 주인공의 내면 풍경 묘사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소설의 다양성 측면에서 반가운 일이다. 단순한 서사구조를 벗어나 과거의 기억과 추억의 갈피를 쫓고 의식의 흐름을 쫓아다니는 일은 작가와 독자들이 만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다. 독자들은 소설을 다양하게 그리고 온몸으로 읽는다.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 가는 것은 물론이고 문장과 여백, 행간의 의미와 주인공의 섬세한 심리를 따라간다. 소설가가 안내하는 생의 이면과 또 다른 현실 속에서 울고 웃으며 희망과 절망의 롤러코스트를 타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소설의 내용과 구조를 따라 가는 일이 전통적인 소설읽기의 방법이라면 낯설고 생경한 방식으로 독자들의 내면 풍경을 유추하게 하는 일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배수아는 ‘양의 첫눈’을 비롯해서 ‘올빼미’, ‘북역’을 통해 기승전결 구조에 길들여진 소설의 독법을 불편하게 만든다. 잔잔하고 일상적인 독백 같기도 하고 사유의 흐름을 따라 걷는 산책같기도 한 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오히려 주인공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소설을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든 소설에 대한 판단 기준에 독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나를 구성하는 이 외부의 물과 그림이 낯설다고. 이 독특한 비현실성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것이 곧 내가 되었다고. - ‘무종’ 중에서, 187쪽

소설 속의 주인공이 ‘비현실성’ 속에서 살아간다면 소설의 외부로 나아갔다는 뜻인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고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소설을 소설이 아닌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의 사유 방식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고 삶에 대한 성찰을 위한 도구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독자의 선택과 취향에 맞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작가의 손을 떠난 문제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으나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필요는 없다. 다만 그 이야기들이, 꿈과 환상이 어떻게 부딪쳐 소리를 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모든 직업은 우울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가는’ 그 직업은 우울하며, 필연적인 우울을 유발한다. 은퇴와 죽음 말고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우울. - ‘빠리거리의 점잖은 입맞춤’ 중에서, 195쪽

책을 읽으면서 그날의 기분과 느낌, 날씨와 건강상태에 따라 다른 문장을 뽑아낼 때가 있다. 소설의 내용과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먹고 사는 일이 신산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직업적 만족과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우울’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죽음과 은퇴’ 이외에는 희망이 없다는 선언에 대해 반박의 여지가 없을 때의 낭패감!

내가 이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 중에서 그 어떤 것도 내가 당신을 떠나는 이유를 직접 설명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 ‘밤이 염세적이다’ 중에서, 289쪽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렇게라도 위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그 모든 변명을 책 속에서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뱉어내는 말과 언어의 한계에 대한 반성적 고찰!

사랑은 모순의 일인극이다. 민감하고 선명하게 각인되는 사랑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사랑은 외국 낭송극이다. 사랑은 새로운 말과 언어를 만들고 그것들을 드러내려고 몸부림친다. - ‘밤이 염세적이다’ 중에서, 310쪽


10062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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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란 무엇인가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 지음, 김태희 옮김 / 민음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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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은 저마다 현실 밖에서 꿈을 꿀 때가 있다. 그 꿈이 어떤 것이든 우리 모두는 꿈꿀 권리가 있다. 그 꿈은 자신만의 즐거움일 수 있고 또 하나의 세계일 수도 있다.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의 간극이 벌어질수록 더 몰입하고 열광한다. 상징계와 상상계가 현실계를 반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비틀리고 왜곡된 환타지어도 좋고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어도 좋다. 다만, 우리들의 삶을 즐겁게 해 줄 수만 있다면.

4년에 한 번씩 지구인들은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른다.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스포츠 축구. 세련된 형태로 발전했고 자본과 매스미디어를 등에 업은 채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했지만 축구경기 자체가 주는 즐거움과 흥분을 반감시키지는 않았다. 축구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지구인의 스포츠가 틀림없다.

초등학교시절에 잠시 축구선수 생활을 하다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강압에 못 이겨 포기했기 때문에 언제나 운동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다. 20대 중반까지 축구 경기장 계단을 올라 녹색의 잔디를 보면 미친 듯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떤 여자를 만났을 때 그렇게 내 심장이 90분간 두근거렸을까.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동경이며 환타지에 가까운 열망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축구는 때때로 관심과 증오와 환희와 열광의 대상이다.

1986년 박창선의 월드컵 첫 골 장면이나 최순호의 중거리 슛이 1982년 한일전 김재박의 스퀴즈 번트만큼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었고 열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런너스하이를 경험해 본 사람은 운동 중독에 빠지게 된다. 쉬지 않고 그라운드를 달리고 드리블하고 상황을 파악하고 순간적으로 판단하며 숨이 넘어갈 듯 달리다보면 동물적 즐거움의 극치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축구 경기를 즐기는 사람뿐만 아니라 경기를 보며 몰입하는 사람의 흥분상태를 포함한다. 독일의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의 『축구란 무엇인가』는 바로 이렇게 축구에 미친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아니 왜 축구여야 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알프레드 바알의 『축구의 역사』와 이은호의 『축구의 문화사』가 축구에 관한 에피타이저라면 프랭클린 포어의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와 닉 혼비의 『피버 피치』는 축구에 대한 본격적인 몰입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축구의 역할과 기능을 다각도로 살펴보는 책이다. 『축구란 무엇인가』는 ‘축구’라는 경기에 대하여, 축구의 역사, 축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축구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 실로 축구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한 분량과 내용을 갖춘 책이다. 축구의 기원과 역사에서부터 사람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까지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축구가 관중에게 주는 매력은 본질적으로 발의 허약함에 있다. 고집 센 공을 다루는 발의 허약함으로 인하여 자주 실수가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절대 예견할 수 없고 거기에서 매력이 나온다. -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 <축구란 무엇인가>, 70쪽

이 책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는 백과사전류가 아니다. 저자는 독일 축구의 주요 장면을 실감나는 문장으로 되살려내고 있으며 역대 월드컵을 기억한다. 축구에 대한 깊은 애정과 깊이 있는 분석을 토대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다. 저자는 축구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샅샅히 훑어내고 있다. 참 많은 이야기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책이다.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이다. 온 국민이 열광하고 있지만 단기간의 축제여도 좋고 분위기에 휩쓸려 흥겨움을 즐겨도 좋다. 집단적 애국주의와 전체주의의 광기라고 욕하지 말고 국가주의를 공고히 하는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지 말고 ‘축구’ 자체가 주는 즐거움과 의외성 그리고 몰입의 즐거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를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여긴다. 나는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축구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빌 생클리, 리버풀 감독) -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 <축구란 무엇인가>, 507쪽

미쳐야 미친다. 무엇에든 미치지 않고서야 그 지극한 즐거움의 언저리를 맛보지 못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즐거움이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 간다. 축구는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어떤 역사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재미있게 즐겨보자.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스타디움이 아닌 TV를 통해 봐야하는 아쉬움은 사치에 불과하다.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 ‘공은 둥글다’는 말을 믿어보자. 승부와 상관없이 이미 축제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우리들의 생이 늘 축제일 수는 없겠지만.



100616-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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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링크 - 첫 2초의 힘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무열 옮김, 황상민 감수 / 21세기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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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영화로 기억되는 <롤라 런>과 미국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는 비슷한 시기에 보았기 때문에 함께 떠오른다. 제목 그대로 달리는 롤라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객들은 ‘찰나’에 주목한다. 계단에 움츠린 개를 뛰어 넘고 달릴 것인지 무서워 잠시 멈칫거리는지에 따라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지하철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그 지하철에 아슬아슬하게 뛰어올라 타는 사람과 그 지하철을 타지 못하는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면? 인생은 되감기가 불가능한 한 편의 영화와 같다. 매순간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역사와 인생에 가정법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현재가 중요하다. 그 순간들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이 되고 인류의 역사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 벌어지는 모든 선택의 순간들이 모여 전혀 다른 인생과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것이 세상이고 인생이다.

blink 동사

1. 눈을[눈이] 깜박이다 wink
He blinked in the bright sunlight.
밝은 햇빛에 그가 눈을 깜박였다.
I'll be back before you can blink.
눈 깜박할 새에 돌아올게.
When I told him the news he didn't even blink.
내가 그 소식을 전했을 때 그는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2. [자동사][V] (불빛이[을]) 깜박거리다[깜박이다]
Suddenly a warning light blinked.
갑자기 경고등이 깜박거렸다.

  『아웃라이어』를 보고 말콤 글래드웰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보기로 했다. 『블링크』는 세간의 주목을 충분히 받을만큼 받았던 책이지만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던 책이다. 2005년에 출간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받아온 책이다. 2초의 힘! 우리말로 가장 적절한 번역이 떠오르지 않았을 법하다. 사물이나 사건을 인지하는 순간 전체적인 맥락과 상황을 파악하고 대상에 대한 핵심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능력은 개인차가 심하고 분야와 대상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

  블링크는 이렇게 긴급 상황이나 처음 만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한 순간적인 판단능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세상을 움직이는, 핵심을 꿰뚫는 첫 2초가 우리들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 굳이 영화의 예를 들지 않아도 주변에서 늘상 벌어지는 일이고 분야만 다를 뿐 ‘척보면 안다’는 말이 통용되는 까닭이다. 순간적인 느낌이나 주관적인 취향과 달리 블링크는 오랜 시간 축적된 노하의 결과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전문적인 식견을 순간적으로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위급한 상황이나 첫인상을 결정할 때 많이 좌우되는 이 능력은 무의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적응 무의식’이라고 한다.

적응 무의식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데 필요한 많은 데이터를 신속하고 조용하게 처리하는 일종의 거대한 컴퓨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 말콤 글래드웰, <블링크>, 35쪽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능력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논리와 이성적 판단능력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데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흔히 ‘첫인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관적 판이거나 눈에 보이는 시각적 이미지에 의한 판단 오류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링크의 중요성이나 활용방법에 앞서 문제점과 오류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단 한 번의 오류는 열 번의 성공보다 깊은 상처를 남기거나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블링크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 빠르게, 그러나 여백을 두라고 충고한다. 완벽한 편견의 눈을 감으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로 성공적인 블링크를 충동한다. 반드시 필요하고 여전히 가지고 있는 능력이지만 저자는 이것을 정확한 데이터와 적절한 사례를 통해 훌륭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단순한 자기계발서와 달리 꾸준히 읽히는 이유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웃라이어’와 ‘블링크’는 기존에 있는 사례와 능력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로 인식을 전환했다.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에 따라, 정리하고 가공하는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내용이 깊이 있고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알기 쉽고 재미있는 사례를 중심으로 엮었기 때문에 책의 목적과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책장이 넘어가고 흥미 있게 저자의 말에 동의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참 잘 썼다고 판단된다. 책에 대한 많은 정보가 책의 구매여부, 독서여부를 잘못판단하게 하는 오류를 줄일 수만 있다면 저자의 말은 충분한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받을수록 판단에 대한 확신이 판단의 실제 정확성과 점점 더 멀어졌습니다.”(오스캠프) 숨겨진 '필적'이 많기 때문에, 단 1초나 2초라도 세세한 면에 조심스럽게 주의를 기울이면 엄청나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능력에 의지한다. - 말콤 글래드웰, <블링크>, 187쪽


100609-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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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것 - 고병권 선생님의 철학 이야기 너머학교 열린교실 1
고병권 지음, 정문주.정지혜 그림 / 너머학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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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나에 불과한 내 삶을 돌아보면 느리고 답답하게 보인다. ‘철이 든다’는 말은 세상에 대한 판단력, 사람들에 대한 이해, 삶에 대한 목표 등이 생겼다는 말이다. 아울러 생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되고 사회역사적 안목이 생겼으며 삶에 대한 태도와 방법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살펴볼 때 나는 여전히 사춘기 소년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영원히 철들고 싶지 않다는 꿈을 꾸고 때묻고 물들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내비치며 청년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런 생각들은 겨우 서른이 넘어서야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직접 경험은 물론 간접적인 경험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고 세상사를 관찰하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정리된 생각들이 지금의 나를 규정한다. 상식과 합리의 기준이 다르고 이성과 논리의 힘을 개인의 이익과 자기 합리화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렵지 않게 우리가 나아갈 방향과 목적이 보일 것도 같은데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씩 다르다. 이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홍세화는 『생각의 좌표』를 통해 그 이유를 묻고 우리들이 생각하는 방향에 대해 반성을 촉구한다. 그러나 어른들의 경우 이 생각을 바꾸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것만큼 어렵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디에서 배워야 하는 것일까.

  너머학교에서 나온 고병권의 『생각한다는 것』은 십대를 위한 철학이야기 책이다. ‘철학’이라는 말만 들으면 딱딱하고 어렵다고 생각한는 친구들이 많지만 사실 철학은 생활이며 실천이다. 책 속의 어려운 개념이나 철학자들의 고리타분한 대화가 아니라 실제 삶을 위한 도구이며 행복한 삶을 위한 준비물이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삶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공부’와 ‘돈’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어른들은, 학교에서는 왜 행복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가르치지 않는걸까?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 공부 잘하는 방법, 돈버는 방법에 대한 관심과 이야기는 넘쳐난다. 대형서점도 학습법과 재테크, 자기계발서들이 점령한지 오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만큼 여유있고 행복해지고 있는 걸까.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활동하는 고병권은 다양한 철학적 탐구와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왔다. 이 책은 십대를 위한 철학 입문서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짧은 글들을 통해 철학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린교실’ 시리즈의 출발에 서 있는 이 책은 이후에 출간될 책들에 대해서도 관심과 기대를 갖게 한다. 새로운 기획과 신선한 책들은 청소년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선물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을 책을 통해서라도 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가 같은 꿈과 미래를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들지 않도록 다양성을 인정하고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생각의 변화가 우선이지만 아이들의 생각도 조금씩 달라질 필요가 있다. 결국 아이들의 생각은 어른들의 생각이 세뇌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삶의 주인으로 우뚝 서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가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경우를 보면, 악마란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따져보지 않았던 거예요. 그냥 주어진 일을 기계처럼 무조건 했던 것이죠. 생각이 없으면 우리도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는 겁니다. - 고병권, <생각한다는 것>, 50쪽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생각’의 중요성과 ‘철학의 의미’를 아주 쉽게 간단하게 설명하는 대목이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왜 ‘악마’가 될 수 있는지 역사 속 인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청소년들을 우리들의 미래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키우고 무엇을 가르치는지 생각해보자. 삶을 이해하고 세상을 따듯하게 해 줄 수 있는 생각과 판단력과 능력을 함께 길러주고 있는지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 수능 성적표로 인간의 등급을 매기는 일에 몰입하고 있는지 말이다.

  아이들의 다양한 꿈을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고 생각을 이끌어 주고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땀흘려 일하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어른인가 반성해본다. 다르게 산다는 것은 대충 산다는 말이 아니다. 굳이 남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반항도 아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고 이 길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고민이며 이렇게 사는 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고 내 삶이 행복해지는 길인가에 대한 반성이다. 그래서 생각한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을 낳는 것’, 즉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다르게 살아가는 것’ 입니다. 철학은 ‘생각하는 기술’이지만, 그때 생각의 기술이란 ‘삶을 가꾸는 기술’이었잖아요. - 고병권, <생각한다는 것>, 76쪽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는 십대에게, 모든 가능성에 도전할 수 있는 청춘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그들을 행복하게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때대로 불면의 밤을, 고통스런 고민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렇게 ‘철학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고 공부하고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말과 다름없다. 조금 더 먼 미래를 보고 보다 나은 나를 위해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위해 철학 즉 생각한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책을 통해 생각을 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떤가.

‘철학을 한다’는 말은 참으로 여러 말과 통하는 것 같네요. 행복하게 산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 자유롭다는 것, 친구를 만든다는 것, 이 모든 말들이 ‘철학을 한다’는 말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 고병권, <생각한다는 것>, 123쪽


100606-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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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고병권이 쓴 '민주주의'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5-25 15:43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묻는 책들이 태풍처럼 출판계를 흔들어놓고 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채 가라앉기 전에, 뒤를 이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여기에 다시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람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고병권이 몰고 올 바람은 일시적으로 불고 지나갈 바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되돌아올 바람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사상 지형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열을 내는 이...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택광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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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바우디의 말투를 빌리자면, 이론은 문제를 해설하고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론은 낡은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유의 모험이다. - P. 7

  이택광을 세 번째 만나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에 이어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통해 저자의 문화이론에 대한 이해와 깊이를 확인했다. 책을 통해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사유의 폭을 넓히는 것뿐만 아니라 저자의 내밀한 사적 공간을 기웃거리는 즐거움까지 덤으로 얻는다. 그것은 물론 의도적인 저자의 책략일 수도 있고, 개별 독자가 확인하는 공감의 영역일 수도 있다. 저자가 읽은 책을 읽었던 기억과 낯선 글처럼 다시 만나는 자괴감, 생경한 개념을 내것처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오롯이 저자와의 깊은 대화를 나눈 느낌이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저녁에서 밤으로 저무는 시간을 함께 보내듯 그렇게 천천히 음미하며 읽은 책이다.

  저자는 문화이론에 관한한 국내에서 누구보다도 탄탄한 내공을 갖추고 있다. 그간의 저작들과 발표된 글들을 찬찬이 읽어보면 어설프게 낯선 이론을 도입하거나 소화되지 않은 개념을 소개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리처드 파인만은 어떤 개념을 쉽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수많은 이론가들을 호출한다. 마르크스에서 지젝에 이르기까지 근대의 철학자와 문화이론에 관련된 유럽의 사상가들은 물론 그들이 주창했던 핵심 이론과 용어에 대한 개념들을 철저하게 실천과 적용의 관점으로 풀어낸다. 관념적이고 지적인 태도로 말장난에 불과한 소개글이 아니라 실제 이 개념들의 차이와 반복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근대 이후, 아니 정확히 19세기 이후 정치와 사상적 지도의 정점에는 항상 마르크스가 자리를 잡고 있다. 지나치게 확고부동하여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부담스런 이념적 존재가 되어버렸고 현실 정치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실험과 몰락으로 20세기가 흘러가버렸지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에서 자유와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 것은 왜일까?

  좌파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고 미래의 희망이라는 어줍잖은 변명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이론의 중심에 서 있는 마르크스에서 출발해서 프로이트, 아감벤, 벤야민, 헤겔, 라캉, 사르트르, 지젝, 데리다, 네그리, 랑시에르, 알랭 바우디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번쯤 섭렵했을 법한 이론들을 총망라하여 정리하고 있다. 이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대안도 아니고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도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정치한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이며 특히 인문학이 무엇이며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다. 실천과 적용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론은 낡아빠진 구식 동력기에 불과하다. 갈고 조이고 다듬어서 보다 상식적인 혹은 개념찬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아야겠다.

새로운 이론은 없다. 다만 '다른' 이론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같은 풍경이라도 다른 위치에 섰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던 사물을 볼수 있다. 이론은 이런 위치 변경을 가능하게 해준다. - 이택광,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14쪽

  11장에 걸쳐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이론과 개념들을 소개하고 현실 적용의 문제를 고민하는 모습이 즐겁고 재밌을 수는 없다.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노력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지금까지 읽었던 책이나 어렴풋하게 정리되지 않았던 개념들이 명확해지고 비교와 분석을 통해 분명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수많은 이론들을 정리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가이드’라는 제목처럼 출발선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으로 오히려 추천할 만하다. 의욕과 노력만 앞세울 일이 아니라 친절한 안내에 따라 차근차근 접근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노력이 단순히 이론을 모아 소개하고 해설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부가 무엇이고 인문학적 사유가 왜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면 이 책은 의미를 넘어 선 것이다. 언제든 지적 호기심과 이론적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열린 이야기들이 가득한 책이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간주곡’이다. 장과 장 사이에 놓여 있는 글들이 감칠맛 난다. 공부와 학문과 글쓰기와 과거의 책읽기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써내려간 이야기들이 오히려 이 책의 생기를 불어 넣고 현실감을 극대화한다. 뜬 구름 잡는 개념놀이가 아니라 현실과 정치 지형도의 위치를 가늠하며 인문학의 의미와 개념을 다시 한 번 고민한다. 우리에게 지식이 왜 필요하고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우리들의 현실과 맞물려 뼈아픈 충고로 들린다.

지식은 기본적으로 범용성이 있어야 한다. 범용성이 없는 지식은 아집에 가깝다. 그래서 학문은 집단적 노력의 산물이다. 공부는 재미있지만, 학문은 지루하다. 지금 한국은 학문을 내팽개치고 각자 공부하는 분위기이지만, 이런 분위기도 오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 이택광,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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