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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트 - 인간의 행동 속에 숨겨진 법칙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김명남 옮김 / 동아시아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아직도, 어린왕자가 지구에 살고 있다면 사람들은 그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 할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트위터로 소식을 전하거나 실시간으로 어린왕자의 위치를 파악하고 싶어 할 것이다.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사생활은 어디까지 보호받을 수 있을까? 네트워크 세상에서 우리는 씨줄과 날줄 사이의 어디쯤에 끼워진 퍼즐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조각 하나가 빠져 나가도 금세 빈 자리는 또 다른 노드가 메울 것이다. 노드의 연결 고리가 되는 허브가 있지만 수많은 허브도 결국 네트워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고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니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 뿐 만 아니라 사회적 연결망의 위치를 거시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면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알 수 있지 않을까?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은 관계망 속의 접속 지점을 나타내는 지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의 망을 아름답고 재미있게 풀어 낸 『링크』의 저자 바라바시가 이번엔 『버스트』로 우리 곁을 찾았다. 책을 읽는 즐거움, 지적 유희의 행복함을 전해주는 이 책은 새로운 형식의 텍스트를 제공한다. 역사 소설과 과학적 지식의 탐구라는 두 축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색다른 책읽기를 요구한다. 독자들은 이 복잡한 텍스트를 통해 마치 기차 레일을 연상할 수 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 한 채 평행하게 뻗어가는 이야기들이 결국에는 하나의 소실점에 모이게 되는 책이다. 하지만 소실점은 눈의 착각일 뿐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이 텍스트도 ‘인간’이라는 알 수 없는 텍스트에 대한 메타 텍스트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읽으려고 할수록 읽히지 않는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는 언제나 즐겁다. 바라바시는 물리학의 법칙과 복잡계 네트워크 과학을 통해 이번에는 인간의 행동을 읽어내려고 시도한다. 열흘 후에 날씨를 예측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인간의 행동 패턴을 예측하는 일은 가능할까. 바라바시는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방식과 조금 다르게 과학적 지식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전달한다. 중세 십자군 원정에 관한 역사적 고증과 상상력을 통해 인간 행동의 예측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현대 물리학의 사례를 통해 검증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두 개의 이야기를 교차해 놓고 있어 한 개의 이야기가 끝나면 또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느낌이면서 서로 연결된 두 개의 텍스트를 나란히 읽고 있는 느낌을 갖는다.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에 숨어 있는 ‘폭발성의 패턴’이다. 그 폭발성의 이면에는 ‘우선순위 결정’의 비밀이 숨어 있다. 어떤 일이 매일매일 벌어지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다 보면 일정한 패턴을 읽어내기 어렵지만 그 행위들은 결국 멱함수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저자는 알기 쉽고 상식적인 사례들과 그 이론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함께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이 갖는 장점은 단순한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거나 최근의 연구 성과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바라바시는 이 책에서 과학자이면서 심리학자이고 소설가이다. 다양한 관점은 하나의 사물과 사건을 입체적으로 보는 눈을 제공한다. 저자가 여러 번 인용한 ‘칼 포퍼’는 절대로 인간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말을 부정하기 위해 이 책을 썼는지도 모른다. 아직 불완전하지만 인간 행동의 패턴을 읽어내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어쩌면 날씨를 확률로 표시하듯이 확률적 예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들을 설명한다. 앞으로 남겨진 과제는 인간행동의 ‘bursts’가 아니라 그 원인과 예측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학자의 입장에서 이론을 확립하고 실험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당연한 관심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통해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이미 벌어진 행동의 결과를 미래의 인간 행동 예측 시스템과 대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책이 읽을 만한 것은 바로 이처럼 독특한 방식의 글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라바시의 통찰력과 흥미로운 과학적 사례들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즐거움이다.
과학자들은 인간 행동이 사실상 무작위적이라는 가정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되었고, 이 가정은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 분야에서 근본적인 패러다임으로 기능해왔다. 그러니까 인간의 행동은 사실상 예측 불가능하고, 일회적이고, 결정불가능하고, 예견 불가능하고, 불규칙하다는 것이다 이 가정에는 문제가 딱 하나 있다. 틀렸다는 점이다. - 바라바시, <버스트> 131쪽
용감을 넘어 대담하게 느껴지는 마지막 문장, ‘틀렸다’는 표현을 함부러 쓸 수 없지만 과학자인 바라바시는 인간 행동의 예측 불가능성을 부정한다. 몇 마디로 압축하고 요약할 수 있는 책이 될 수도 있는 이 두툼한 책을 꼼꼼하게 천천히 읽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의 가설과 그것을 증명해가는 과학 이론 서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그것에 이르는 과정과 과거의 시간들이 보여주는 사실들은 독자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또한 무의식적인 행동 방식과 패턴을 돌아보게 한다.
또한 ‘모른다’ 혹은 ‘불가능하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사실이 과학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는 것,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대한 관심과 관찰과 분석이 새로운 관점과 이론을 탄생시킨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복잡계 네트워크 과학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 방식과 관습적인 사고의 틀을 깨뜨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과학은 지금까지 그래왔고, 과학자들은 늘 ‘불가능’에 도전해 왔다. 다만 그것이 모두 과학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요구되는 과학적 사유 방식은 아닐까 싶다. ‘버스트’는 인간 행동 속에 숨겨진 법칙의 핵심이 아니라, 인간 사고의 핵심이 될 수도 있다. 그 잠재적 폭발성을 기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읽고 생각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이 책은 과학과 역사가 결합되어, 인간에 대한 가장 진보적인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100817-0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