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디든지 같지만 어디서에도 같지 않은 것은?”

비에 젖은 일요일 오후를 산책하다가 하루에 4시간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절대 몰입의 독서를 위한 2시간, 운동을 위한 1시간, 아무것도 안하고 하늘만 쳐다보는 1시간. 노동의 순환 사이클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요일 오후에 느끼는 아쉬움과 월요일에 대한 부담은 비슷하리라. 하지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시간이 늘 부족한 사람이 있고 시간이 늘 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시간에 여러 가지 일을 하고도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한 가지 일도 못하고 늘 허덕이는 사람도 있다. 단순히 개인의 능력 차원을 넘어 시간에 대한 주관적 개념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수수께끼 하나를 풀어보자.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에서 던진 질문이다. 어디든지 동일하지만 어디에서도 다른 것은 질문 자체가 모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 중 하나인 클레아르쿠스는 『수수께끼의 이론』이라는 책에서 질문 놀이인 그리포스(griphos: 수수께끼 게임)를 특히 많이 다루었다고 한다. 이런 질문을 통해 다양한 논리들을 거쳐 소크라테스의 대화로 발전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궤변법의 기술이 고의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며 경멸했다. 어쨌든 이 질문의 정답은 바로 “시간”이다.

겨우 몇 백 년 전만 해도 인간의 삶이 이렇게 바쁘고 번잡스럽지는 않았다. 전근대 사회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동안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변했는지 살펴보면 가히 혁명에 가깝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문명은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인간의 삶도 그만큼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시간의 개념이 달라진 것만은 사실이다. 분초 단위의 시간으로 잘게 쪼개진 일상에서 우리의 삶도 그만큼 바빠졌고 여유가 없어졌다. 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한 휴식을 취하는 삶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1938년 6월 레이던 대학에서 하위징아가 쓴 이 책은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서 ‘놀이’의 개념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인간의 특징을 나타내는 많은 말들 중에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말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위징아는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문명을 이루기 이전 상태 즉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것이 바로 ‘놀이’라는 말이다. 일과 놀이를 구분할 때 그 놀이가 아니라 놀이의 개념은 우리들 삶의 곳곳에 숨어있다는 뜻이다. 하위징아는 놀이의 일반적 특징을 옮긴이 이종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놀이는 특정 시간과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자발적 행동 혹은 몰입 행위이다.
2.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규칙을 따르되 그 규칙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다.
3. 그 자체에 목적 있고 일상생활과는 다른 긴장, 즐거움, 의식(意識)을 수반한다.
4. 질서를 창조하고 그 다음에는 스스로 하나의 질서가 된다.
5. 경쟁적 요소, 즉 남보다 뛰어나려는 충동이 강하다.
6. 신성한 의례에서 출발하여 축제를 거치는 동안 자연스럽게 집단의 안녕과 복지에 봉사한다.

즉 놀이는 자유로운 행위이며 자유 그 자체이다. 이러한 특징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경쟁적 요소이다. 어린이들의 단순한 놀이에 해당하는 파이디아(paidia)와 경기에 해당하는 아곤(agon)이 결합된 의미가 바로 ‘호모 루덴스’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즐거운 경기에 몰입하는 자유로운 행위를 즐겼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하위징아는 12장에 걸쳐 놀이의 본질과 개념과 특징은 물론이고 법률, 전쟁, 시, 철학, 예술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신화 창조나 서양 문명과의 관계를 살핀 후 현대 문명에서 발견되는 놀이의 요소로 책을 마무리한다.

이제 고전이 되어버린 다소 딱딱한 문장의 책을 천천히 읽은 것은 김종휘의 『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는 책을 보다가 한경애의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가 생각났고 하위징아의 원전을 꼼꼼히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2차 저작물들이나 이 책에서 비롯된 다양한 이론과 시각들이 풍성하고 이어졌다. 지금도 인간의 본능에 가장 역행하는 교육과정을 밟고 있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 관한 책을 보다가 이 책이 떠 오른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제대로 놀아 본 적이 없는 아니 제대로 놀 줄 모르는 많은 어른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위징아는 이 책에서 노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본질적 특성을 이해하고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인류문명의 역사와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독자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듯하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왜 사는가.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위 속에 내재한 놀이 본능을 어떻게 충족시키며 즐기고 있는가. 아무리 바쁘고 일 속에 파묻혀 사는 듯해도 모든 인간은 늘 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놀이를 만들 줄 알고 경쟁하며 그 안에서 질서를 창조하고 행위 자체에 몰입하기도 하며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놀이가 아닌가. 그렇게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로 놀이로 바꿀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과 능동적인 행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자, 이제 월요일이다. 또 일주일을 어떻게 놀아볼지 즐거운 고민을 해봐야겠다.

진정한 놀이는 프로파간다를 모른다. 놀이 자체가 그 목적이며 놀이 정신은 행복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100829-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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