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기엔 좀 애매한 사계절 만화가 열전 1
최규석 글.그림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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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타인이 느끼는 고통은 오로지 ‘유추’에 의해서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내 손톱 밑에 가시 하나가 다른 사람의 암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다.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김명민의 고통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 온전히 내가 그 고통을 느껴 볼 수 있거나 공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의 극단적 표현이다. 물론 나의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지극히 자연스런 감정의 표현이지만.

살다보면 눈물 나는 일들이 많다. 기뻐도 슬퍼도 흘리는 눈물은 가장 인간적이고 애틋한 정서 표현이다. 사람에 따라 눈물이 많은 사람이 있고 눈물이 없는 사람이 있다. 눈물의 양이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방법에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상황이 있고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울기에는 좀 애매한 상황도 있다.

최규석의 『울기엔 좀 애매한』은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이다. 만화가 지망생을 중심으로 입시미술을 준비하는 학원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드라마틱한 설정이나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일상 속의 아픔을 담고 있다. 세상을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누는 것이 정확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이 만화에는 찌질한 인생들이 여럿 등장한다. 특히 주인공 ‘원빈’은 꽃미남 배우 원빈과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인물이다. ‘불가촉 루저’라는 풍자적이고 코믹한 수식어가 어울리는 원빈은 가난해서 만화를 그리고 싶은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고등학생이다. 합격하고도 등록금이 없는 상황으로 끝나버리는 이야기가 오히려 현실적이다. 이야기 안에서 꿈을 이루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내 어른이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로 시작하는 작가의 말은 만화가 최규석을 짐작케 한다. ‘내가 가진 삽 한 자루로 할 수 있는 만큼을’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자세만으로도 이 만화책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교훈적이고 뻔한 결말을 이야기하는 만화는 아니다. 이 책은 우선 재미있다. 만화의 가장 큰 미덕은 여전히 재미가 아닐까 싶다. 그 재미가 어떤 종류의 것인가는 다른 이야기지만 이 만화는 10대들의 언어와 일상이 현실감 있게 표현되어 너무 자연스럽게 책장이 넘어간다. 이 책은 키득거리며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고 수채화로 채색된 그림을 감상할 수 있으며 이제 점점 더 심각해지는 88만원 예비 세대를 잘 묘사하고 있다.

국가 인권위원회에서 펴낸 『십시일반』, 『사이시옷』이나 『내가 살던 용산』을 통해 만화가 더 이상 흥미 위주의 오락물로 치부할 수 없는 영역까지 그 폭을 넓혀 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울기엔 좀 애매한』 색다른 모습으로 우리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최규석을 처음 만난 것은 『100°C』를 통해서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다룬 만화를 통해 보여줬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도 사람도 100°C가 넘으면 끓어 넘치게 된다. 이 만화의 주인공 원빈은 아직 99°C 쯤 끓고 있는 것 같다. 재수생 류은수는 원빈의 미래이다. 사회적 상황과 개인의 경제적 환경 때문에 꿈을 접어야 하고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시대를 묘사하는 만화를 보아야 하는 현실은 우울하다. 작가는 이 만화를 통해 가볍게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그 현실은 결코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없다.

마치 1920년대 단편을 통해 시대의 가난을 보여주었던 단편 작가들처럼 최규석은 21세기 청소년판 빈곤 세대를 다루고 있는 듯하다. 불가촉 루저 원빈은 문진영의 소설 『담배 한 개비의 시간』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편의점 알바로 20대를 버텨낼 지도 모른다. 10대든 20대든 전망 없는 미래보다 무서운 것은 ‘자본’의 힘이다. 대학에 입학해도 살인적인 등록금과 생계비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용기를 내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않 가거나 못 가거나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주인공 원빈은 가난해서 입학조차 하지 못할 상황이다. 만화는 거기가 끝나버리지만 잔혹한 현실은 계속된다.

제목처럼 좀 애매한 이야기라는 것은 혼자만의 극단적 고통이나 슬픔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보편적인 아픔이라는 뜻일 게다. 목 놓아 울어버린다고 해서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툭 털어버릴 수도 없는 복잡한 심정을 작가는 울기에는 좀 애매하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표현이나 사실적인 배경 묘사는 만화를 보는 재미를 배가 시킨다. 내용과 형식의 적절한 조화가 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 줄 것 같다. 개그본능에 충실한 가난한 청춘들의 이야기만 꿈조차 가난하지 않다는 것을, 그래도 세상을 변화시키고 ‘희망’ 잃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전해주는 최규석의 만화를 계속 만나고 싶다. 그의 주인공들도 웃거나 우는 것이 아니라 이제, 화를 낼 줄도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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