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시인선 375
류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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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감각적이고 인상적인 ‘시인의 말’로 시작하는 『상처적 체질』은 가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제격이겠다. 연시(戀詩)가 보여주는 마음의 결을 따라 산책을 나가고 싶은 저녁에 어울린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걸까. 시인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생의 고통과 신산스런 삶의 틈새를 보여준다.

날선 감수성을 지닌 시인의 언어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심장을 겨냥한다. 생각의 편린들을 형상화하고 있지만 때로는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운 손길. 결국 가장 큰 행복과 충만한 사랑이 지독한 슬픔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獨酌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홀로 술을 마셔 본 사람은 안다.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아득함 그리고 절대 고독 속에서 대면하는 나. 시인 류근은 오랜 침묵을 깨고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마치 ‘독작’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사랑의 상처와 그리움으로 가득한 시들이 보여주고 싶었던 세계는 찌질한 감상주의도 아니고 우울한 슬픔도 아니다. 그의 시들은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며 ‘그리움’을 부르고 비껴가고 싶은 생의 감각들을 일깨운다.

사랑과 이별이라는 진부한 이야기는 수없이 반복되어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살아 숨 쉬듯, 번개처럼 찾아온 사랑도 언젠가 끝이 나고 또 다시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 사랑은 단순히 이성에 대한 사랑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얼마나 쉽고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시인은 누구보다도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있다.

그리운 우체국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한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또 다시 취한 시간들이 다가온다. 어둠이 내린 저녁, 희미한 옛사랑이 그리울 테고 그리움 한 조각 부치고 싶은 것이다.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때문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거나 상처를 받는 체질이거나.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시집을 읽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상처받는 체질이라면 따뜻한 위로와 공감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지상에 발을 떼지 않는 직립 보행하는 인간의 꿈은 새가 아닐까. 자유로움 때문에 그리고 생의 무게를 벗어나고 싶은 열망은 저녁 새 떼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진다. 나의 일생이 자유로웠노라고, 아니 자유롭고 싶었노라고.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시인은 말한다. 가거라,



지혜로운 새는 세상에 와서
제 몸보다 무거운 집을 짓지 않는다
바람보다 먼 울음을 울지 않는다

지상의 무게를 향해 내려앉는
저녁 새 떼들 따라 숲이 저물 때
아주 저물지 못하는 마음 한 자리 병이 깊어서

겁도 없이 몸도 없이
잠깐 스친 발자국 위에 바람 지난다
가거라,


절망의 문턱에서 일어나 살아보자고 몸부림치는 모든, 지친 그대에게.
다, 지나간다. 소소한 바람소리처럼 그렇게 잠깐 살다 가는 우리 모두에게 행복과 희망이 깃들기를. 시인이 작사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김광석의 노래로 듣는 것은 모르겠지만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반성

하늘이 함부로 죽지 않는 것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별들이
제 품 안에 꽃피고 있기 때문이다.
보아라, 하늘조차 제가 낳은 것들을 위해
늙은 목숨 끊지 못하고 고달픈 생애를 이어간다
하늘에게 배우자
하늘이라고 왜 아프고 서러운 일 없겠느냐
어찌 절망의 문턱이 없겠느냐
그래도 끝까지 살아보자고
살아보자고 몸을 일으키는
저 굳센 하늘 아래 별이 살고 사람이 산다


100823-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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