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퍼 존스가 문제다
크레이그 실비 지음, 문세원 옮김 / 양철북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슈퍼맨과 배트맨 중에서 누가 더 용감할까?

엉뚱한 상상이지만 현실은 영화나 소설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고 다양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하루하루 시간을 견뎌내는 것 같은 삶이 있는 반면 즐겁고 유쾌하게 창조적으로 이끌어가는 삶이 있다.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새로움을 찾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때로는 우울하고 만사가 귀찮기도 하며 때로는 하늘을 날 듯 기쁘고 행복하기도 하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천당과 지옥을 오고가는 예측 불가능한 삶의 비밀을 알고 싶지는 않다. 그저 이렇게 고민하고 직접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소설은 인간 삶의 다양성을 바탕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서사의 힘은 실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개연성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한국 소설이 가진 정서와 세계관은 공감을 극대화할 수 있으나 새로움과 낯선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시간과 공간적 배경이 확장된다고 해도 독자들은 조금 더 새로운 이야기에 포섭되고 싶어 한다. 그런 측면에서 세계 문학은 세계를 확장하고 인간의 이해를 넓히며 우리 삶의 범위와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크레이그 실비는 우리가 접하기 힘든 오스트레일리아 작가다. 지구의 저쪽 반대편에 자리잡은 나라의 작가라는 사실이 먼저 흥미를 끈다.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아랍과 아프리카, 남미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유럽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화교류가 적은 지역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재스퍼 존스가 문제다』는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앞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자. 슈퍼맨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 별다른 용기가 필요 없다.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슈퍼맨에게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트맨은 연약하고 평범한 보통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의 공포를 이겨낼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배트맨이 슈퍼맨보다 용감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엉뚱한 질문과 나름대로 일리 있는 논쟁을 통해 이 소설의 서술자인 찰리 벅틴은 베트남에서 이민 온 이방인 제프리 루와 코리건의 토착민 사이를 잇는다. 소설의 전면에 나타나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재스퍼 존스는 원주민과의 혼혈이다. 두 이방인은 전통적인 백인 거주 지역의 이방인으로 분명한 색깔을 가지고 멸시와 천대를 이겨낸다.

1960년대 베트남전이 벌어지던 무렵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이 소설은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거나 인종차별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개성이 뚜렷한 세 소년을 중심으로 코리건 마을에서 벌어진 실종사건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추리 소설의 형태로 소년과 소녀들의 성장과정을 재치있고 유쾌한 문장으로 풀어낸 작가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로라 위셔트의 실종으로 온 마을은 공포에 휩싸인다. 이 마을의 또 한명의 이방인 잭 라이어넬은 재스퍼 존스와 함께 세상의 편견과 루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주는 인물이다. 등장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서술자인 찰리를 제외하고는 세상의 부조리를 보여주는 힘없고 나약한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차이와 차별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극명하게 드러낸다. 비극은 나와 너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피부색과 종교, 지식과 재산의 유무에 따라 사람은 다르게 취급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한 편견과 배태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머리와 가슴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은 최악의 상황에서 쉽게 드러난다.

백인의 마을에서 벌어진 백인소녀 실종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500여페이지에 달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단숨에 읽히는 것은 복잡하고 정교한 소설적 장치 때문이 아니라 1인칭 서술자인 찰리의 솔직하고 실감나는 심리적 갈등과 모든 사람이 용의자가 될 수 있는 상황 설정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장정일도 지적했듯이 기존의 영미 문학과의 차별성이다. 무수히 많은 영미 소설 속 주인공을 차용하고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에 바치는 오마주라는 띠지를 둘렀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특징과 개성을 읽어내지는 못했다. 우둔한 독자인 내가 부족한 탓이겠지만 인간의 위선과 증오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한 점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어쨌든 10대 소년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왜 재스퍼 존스가 문제인지 확인해 볼 일이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 상황을 얼마나 넓게 둘러볼 줄 아느냐가 어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거야 - <재스퍼 존스가 문제다>, 237쪽


100908-0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 - 학벌없는 사회
학벌없는사회 외 지음 / 메이데이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지난 9월 2일(목)에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시행하는 수능 모의평가를 치렀다. 11월 18일에는 한국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인 수능이 기다리고 있다. 이십년의 삶과 남은 생에 대한 낙인이 되어버릴 단 한 번의 시험. 이 시험 성적이 대학과 전공을 결정하고 비이성적인 대한민국 학벌사회의 시작을 알린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수능이 정점이다. 수능이 중요한 이유는 대학의 서열화 때문이며 대학의 서열화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포기하고 학벌위주의 사회구조가 탄탄하게 기득권을 유지해 온 탓이다. OECD국가 중 유일하게 전국민의 85%가 대학에 진학하는 나라,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사회적 인식, 취업, 임금, 결혼 등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전 생애를 걸쳐 개인의 노력과 능력여하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학벌에 의해 인생의 상당부분이 결정되는 현상에 대해 이제 사람들은 무감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오로지 공부 또 공부를 외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한도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비교적 성적이 우수하여 작년에 모 여대 신방과에 입학해서 즐겁게 대학생활을 시작한 한 여학생이 수능원서를 쓰고 잠시 들렀다. 1학기를 마치고 휴학했으며 이번에 수능을 다시 보는 이유가 학교를 바꾸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멍하니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똑똑하고 밝은 성격이었던 그 아이는 반수를 하는 특별한 이유도 목적도 없다. 전공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할 일도 많고 벌써 방송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즐겁게 한 학기를 마쳤다고 했다. 읽고 있던 ‘학벌없는사회’의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는 책을 가져와 보여주자. 손사레를 친다. ‘선생님 또 시작이세요’라며 웃는다. 그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뒤로 한 채 교무실을 떠나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현실을 인정해라, 그래봐야 나만 손해다, 당신 자식 문제면 달라진다, 서울대 콤플렉스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학벌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과연 그런가. 국민들은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학을 못나와서 무식하고 능력이 부족했다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플라톤의 말대로 이상국가를 실현할 수 있었던 서울대 철학과 출신의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에게 IMF를 선물했다. 논리의 비약일 수 있겠지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멍들게 하고 있는지 온몸으로 확인하면서 21세기를 맞았지만 현실은, 사람들의 의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근대 사회에서 출생이라는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인간의 신분이 정해지듯이, 현대 한국 사회는 수능이라는 단 한 번의 기제로 신분이 나뉜다. 신분의 형성이 일회적이지 다차多次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학벌문제는 상당히 전근대적인 양상을 띤다. - P. 186

김상봉 교수를 처음 만난 책 『도덕교육의 파시즘』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대한민국의 학교 그리고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에게 교육자체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책이었다. 그가 주체가 되어 만든 ‘학벌없는사회’가 외치는 구호는 대충 사는 사회, 하향 평준화된 사회, 노력과 경쟁이 없는 무기력한 사회가 아니다. 과정과 절차, 능력과 기회에 따라 언제든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상식과 합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68 혁명이후 대학에 번호를 붙여 대학의 서열화를 무너뜨린 장본인은 고등학생들이었다. 혁명적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대한민국의 카스트제도가 무너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이 책은 제도권 학교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이고 황폐한 입시경쟁교육은 교육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학교를 그만두고 떠나는 아이들이 매년 7만명이 넘는 나라 대한민국.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오늘도 하루에 평균 1.8명의 청소년이 자살하는 나라 대한민국. 오늘은 또 누가 아파트 옥상이나 베란다에서 뛰어 내리는가.

지금 이대로의 ‘학교’를 버리고 점수와 가격 입시경쟁과 시장경쟁, 졸업장과 상표를 혼동하는 나라에서 교육의 시장화 정책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경쟁의 논리 위에 교육을 편입시키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이 정상인가. 오로지 ‘내 자식’만 경쟁에서 이기면 된다는 생각으로는 절대 아무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교육의 천국, 공교육의 붕괴, 이 모두 문제의 정점에는 학벌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학벌은 현대판 신분제이고, 학벌타파는 실제상 권력투쟁과도 통한다. 달리 말하면, 학벌은 특정 학벌의 인맥이 만들어낸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점수가 곧 인간의 능력’이라는 무지막지한 폭력적 허위의식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점수, 그것도 수능 점수, 단순한 점수가 아니라 소수점까지도 환산되는, 그리고 그 점수의 공개 여부가 문제가 되는, 나아가 그것 때문에 법정공방이 벌어지는, 이런 해괴한 일들은 모두 학벌 이데올로기에 침윤해 있는 우리의 자화상인 것이다. - P. 195

교육은 한 가정에서 벌어지는 혹은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매일 반복되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이며 삶의 본질이고 목표이다. 학벌을 정점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간단히 풀릴 문제가 아니다. 대학의 서열화, 수능 점수 위주의 신입생 선발, 학벌위주의 채용관행 등 어그러진 자화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가장 시급한 우리사회의 질병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꿈 꿀 권리조차 빼앗긴 것 같다. 아이들의 이기적인 욕망과 치열한 경쟁의식, 나눔과 배려가 결여된 성공에 대한 열망은 어른들의 자의식이 반영된 거울이다. 행복은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지만 행복해지는 법도 가르쳐주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도 마련해주는 것이 우리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 이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대한민국 1%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루저가 되어야 하는 무한 경쟁시대, ‘학벌없는사회’는 행복한 대한민국의 시작이다. 이것은 수월성 교육의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출발이고 지속적인 노력과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는 공정한 사회를 전제로 한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이 책은 즐겁고 행복한 공부, 공정하고 합리적인 경쟁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을 우리 모두에게 요구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명한 사람들은 저 먼 곳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행복을 즐기고 누리라고 가르친다. 행복은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현재를 포기하고 있다. 권력을 잡아야, 돈을 많이 모아야 우리는 자신과 가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정말 그럴까? OECD국가들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지만 가장 불안하고 위험해서 교통사고율이나 암 발생률이 높고 자살율도 높은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 P. 207


100905-0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험한 정신의 지도 - 당신이 지극히 정상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발칙한 정신분석학
만프레드 뤼츠 지음, 배명자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외과의사가 수술 방법을 배우려면 2년이 걸린다. 그리고 수술을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아는 데에는 20년이 걸린다. - P. 9

인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특히 인간의 정신에 관한 한 아무도 정확히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은 누구나 육체와 영혼이 조화를 이루는 건강한 삶을 기대한다. 하지만 기계도 고장이 나듯이 나약한 인간의 몸과 마음은 때때로 이상이 생긴다. 워낙 정교하고 복잡하게 진화해 온 탓이기도 하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점점 더 인간의 육체는 약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정신을 관장하는 뇌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예민하고 신비롭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뇌가 조정하는 과정에서 가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정신과의사이자 심리치료사인 만프레드 뤼츠의 『위험한 정신의 지도』의 원제는 ‘Irre!(미쳤다!)’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함께 내포한다. 정신이 나갔다는 의미로도 사용되기도 하지만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양극단을 모두 의미한다.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기 언어 유희적 성격을 띤 제목이다. 심리학 서적에 어울릴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이 한 마디 말로 ‘평범’한 사람들이 ‘미친’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위험한지 미쳤다는 것의 범위와 한계는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시대에 따라 그리고 과학과 의학의 발달에 따라 정신병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정상인이 더 문제가 아닐까? 이런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되는 만프레드 뤼츠의 정신병 이야기는 외람된 말이지만 재미있다. 정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결코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정상에서 벗어난 특별함을 원하기도 한다. 우리가 정신병으로 분류하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무조건 위험하거나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신병에 대한 지나친 혐오가 공포를 가지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몸이 아픈 것과 다른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와 보이지 않는 세계 때문에 절망한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한 권의 책에 담아내려는 대담한 시도를 한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되어온 분야가 바로 인간의 영혼이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세계는 실험과 관찰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발전 속도가 더디다. 저자는 이런 세계를 ‘웃음’으로 극복한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우리 주변에는 골빈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주장이다. 극히 정상적인 정신박약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편견과 아집, 극단적인 이기심을 가진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정말 문제는 정상인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치도록 정상적인 사람들(‘스탠더드패스’ - 작가가 사이코패스를 빗대어 만들어낸 신조어), 골빈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고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늘 비범한 인물을 기대하지만 언제나 평범한 인물을 얻을 뿐이다. - P. 61

이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프다. 특별한 영웅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미치도록 평범한 사람들 때문에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치료법 즉, ‘만프레드식 치료법’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정신병을 소개하거나 치료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정신질환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상식에 대한 도전을 시도한다. 유쾌한 문장과 발랄한 상상력 재치있는 표현으로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가볍고 즐겁게 만는 책이다. 후반에서 보여주는 자신만의 치료법은 특수한 비법을 내놓았다기 보다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사람들이 가진 정신병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정상인가? 그렇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느 부분이 얼만큼 잘못 됐는지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자신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저자의 말대로 정신과의사들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점검하고 타인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위험한 정신’의 신호를 감지할 지도 모른다. 정상이다, 미쳤다라고 하는 말 속에 숨은 뜻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신분석학의 갖고 있는 모순과 위험을 포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신과의사들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독일 철학자 오도 마르크바르트의 말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인간이 무의미하다고 버린 것은 늘 의미가 있다.” 만약 전국의 조언자들과 삽화가들이 인간의 정신과 심리에 대해 멈추지 않고 중얼거린다면 언젠가는 이 영역에서도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전체 의학에 경고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질지도 모른다. “의학이 너무 발전해서 건강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 P. 269

인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극히 일부분이라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의 고민과 연구 방법, 치료 방식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상황에 따라 급변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얼마나 지치고 힘든 영혼을 달래가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미쳤다’는 말은 병으로 진단할 때 사용하는 의미를 이미 오래 전에 벗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정상인이 문제라는 이 책의 명제에 당신도 동의한다면 바로 당신 때문에 인류는 희망이 있다. - P. 264

100902-0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디든지 같지만 어디서에도 같지 않은 것은?”

비에 젖은 일요일 오후를 산책하다가 하루에 4시간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절대 몰입의 독서를 위한 2시간, 운동을 위한 1시간, 아무것도 안하고 하늘만 쳐다보는 1시간. 노동의 순환 사이클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요일 오후에 느끼는 아쉬움과 월요일에 대한 부담은 비슷하리라. 하지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시간이 늘 부족한 사람이 있고 시간이 늘 남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시간에 여러 가지 일을 하고도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 있고 한 가지 일도 못하고 늘 허덕이는 사람도 있다. 단순히 개인의 능력 차원을 넘어 시간에 대한 주관적 개념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수수께끼 하나를 풀어보자.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에서 던진 질문이다. 어디든지 동일하지만 어디에서도 다른 것은 질문 자체가 모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 중 하나인 클레아르쿠스는 『수수께끼의 이론』이라는 책에서 질문 놀이인 그리포스(griphos: 수수께끼 게임)를 특히 많이 다루었다고 한다. 이런 질문을 통해 다양한 논리들을 거쳐 소크라테스의 대화로 발전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궤변법의 기술이 고의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며 경멸했다. 어쨌든 이 질문의 정답은 바로 “시간”이다.

겨우 몇 백 년 전만 해도 인간의 삶이 이렇게 바쁘고 번잡스럽지는 않았다. 전근대 사회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동안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변했는지 살펴보면 가히 혁명에 가깝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문명은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인간의 삶도 그만큼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시간의 개념이 달라진 것만은 사실이다. 분초 단위의 시간으로 잘게 쪼개진 일상에서 우리의 삶도 그만큼 바빠졌고 여유가 없어졌다. 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한 휴식을 취하는 삶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1938년 6월 레이던 대학에서 하위징아가 쓴 이 책은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서 ‘놀이’의 개념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인간의 특징을 나타내는 많은 말들 중에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말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위징아는 ‘놀이는 문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문명을 이루기 이전 상태 즉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것이 바로 ‘놀이’라는 말이다. 일과 놀이를 구분할 때 그 놀이가 아니라 놀이의 개념은 우리들 삶의 곳곳에 숨어있다는 뜻이다. 하위징아는 놀이의 일반적 특징을 옮긴이 이종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 놀이는 특정 시간과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자발적 행동 혹은 몰입 행위이다.
2.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규칙을 따르되 그 규칙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다.
3. 그 자체에 목적 있고 일상생활과는 다른 긴장, 즐거움, 의식(意識)을 수반한다.
4. 질서를 창조하고 그 다음에는 스스로 하나의 질서가 된다.
5. 경쟁적 요소, 즉 남보다 뛰어나려는 충동이 강하다.
6. 신성한 의례에서 출발하여 축제를 거치는 동안 자연스럽게 집단의 안녕과 복지에 봉사한다.

즉 놀이는 자유로운 행위이며 자유 그 자체이다. 이러한 특징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경쟁적 요소이다. 어린이들의 단순한 놀이에 해당하는 파이디아(paidia)와 경기에 해당하는 아곤(agon)이 결합된 의미가 바로 ‘호모 루덴스’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즐거운 경기에 몰입하는 자유로운 행위를 즐겼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하위징아는 12장에 걸쳐 놀이의 본질과 개념과 특징은 물론이고 법률, 전쟁, 시, 철학, 예술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신화 창조나 서양 문명과의 관계를 살핀 후 현대 문명에서 발견되는 놀이의 요소로 책을 마무리한다.

이제 고전이 되어버린 다소 딱딱한 문장의 책을 천천히 읽은 것은 김종휘의 『대한민국 10대, 노는 것을 허하노라』는 책을 보다가 한경애의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가 생각났고 하위징아의 원전을 꼼꼼히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2차 저작물들이나 이 책에서 비롯된 다양한 이론과 시각들이 풍성하고 이어졌다. 지금도 인간의 본능에 가장 역행하는 교육과정을 밟고 있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 관한 책을 보다가 이 책이 떠 오른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제대로 놀아 본 적이 없는 아니 제대로 놀 줄 모르는 많은 어른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위징아는 이 책에서 노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본질적 특성을 이해하고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인류문명의 역사와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독자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듯하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왜 사는가.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위 속에 내재한 놀이 본능을 어떻게 충족시키며 즐기고 있는가. 아무리 바쁘고 일 속에 파묻혀 사는 듯해도 모든 인간은 늘 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놀이를 만들 줄 알고 경쟁하며 그 안에서 질서를 창조하고 행위 자체에 몰입하기도 하며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놀이가 아닌가. 그렇게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로 놀이로 바꿀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과 능동적인 행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자, 이제 월요일이다. 또 일주일을 어떻게 놀아볼지 즐거운 고민을 해봐야겠다.

진정한 놀이는 프로파간다를 모른다. 놀이 자체가 그 목적이며 놀이 정신은 행복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100829-0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시인선 375
류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감각적이고 인상적인 ‘시인의 말’로 시작하는 『상처적 체질』은 가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제격이겠다. 연시(戀詩)가 보여주는 마음의 결을 따라 산책을 나가고 싶은 저녁에 어울린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걸까. 시인은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생의 고통과 신산스런 삶의 틈새를 보여준다.

날선 감수성을 지닌 시인의 언어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심장을 겨냥한다. 생각의 편린들을 형상화하고 있지만 때로는 상처를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운 손길. 결국 가장 큰 행복과 충만한 사랑이 지독한 슬픔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獨酌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홀로 술을 마셔 본 사람은 안다.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아득함 그리고 절대 고독 속에서 대면하는 나. 시인 류근은 오랜 침묵을 깨고 첫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마치 ‘독작’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사랑의 상처와 그리움으로 가득한 시들이 보여주고 싶었던 세계는 찌질한 감상주의도 아니고 우울한 슬픔도 아니다. 그의 시들은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며 ‘그리움’을 부르고 비껴가고 싶은 생의 감각들을 일깨운다.

사랑과 이별이라는 진부한 이야기는 수없이 반복되어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살아 숨 쉬듯, 번개처럼 찾아온 사랑도 언젠가 끝이 나고 또 다시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 사랑은 단순히 이성에 대한 사랑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얼마나 쉽고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시인은 누구보다도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있다.

그리운 우체국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한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또 다시 취한 시간들이 다가온다. 어둠이 내린 저녁, 희미한 옛사랑이 그리울 테고 그리움 한 조각 부치고 싶은 것이다.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때문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거나 상처를 받는 체질이거나.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시집을 읽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상처받는 체질이라면 따뜻한 위로와 공감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지상에 발을 떼지 않는 직립 보행하는 인간의 꿈은 새가 아닐까. 자유로움 때문에 그리고 생의 무게를 벗어나고 싶은 열망은 저녁 새 떼들에게 고스란히 옮겨진다. 나의 일생이 자유로웠노라고, 아니 자유롭고 싶었노라고.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시인은 말한다. 가거라,



지혜로운 새는 세상에 와서
제 몸보다 무거운 집을 짓지 않는다
바람보다 먼 울음을 울지 않는다

지상의 무게를 향해 내려앉는
저녁 새 떼들 따라 숲이 저물 때
아주 저물지 못하는 마음 한 자리 병이 깊어서

겁도 없이 몸도 없이
잠깐 스친 발자국 위에 바람 지난다
가거라,


절망의 문턱에서 일어나 살아보자고 몸부림치는 모든, 지친 그대에게.
다, 지나간다. 소소한 바람소리처럼 그렇게 잠깐 살다 가는 우리 모두에게 행복과 희망이 깃들기를. 시인이 작사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김광석의 노래로 듣는 것은 모르겠지만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반성

하늘이 함부로 죽지 않는 것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별들이
제 품 안에 꽃피고 있기 때문이다.
보아라, 하늘조차 제가 낳은 것들을 위해
늙은 목숨 끊지 못하고 고달픈 생애를 이어간다
하늘에게 배우자
하늘이라고 왜 아프고 서러운 일 없겠느냐
어찌 절망의 문턱이 없겠느냐
그래도 끝까지 살아보자고
살아보자고 몸을 일으키는
저 굳센 하늘 아래 별이 살고 사람이 산다


100823-0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