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윤대녕 형에게.

  창밖에 어둠이 당도해 버린 일요일 저녁, 직장인에게는 아쉽고 때로는 황망스럽기도 합니다. 죽전에 사시는 어머니 집에서 자고 아파트 뒤편 산에 올랐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산에 올라본지가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릅니다. 다음 주에 미국에 계시는 외삼촌과 외할머니에게 이모들과 다녀오시기로 하고 그 준비과정이나 일정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일요일 오전에 늘 책을 보는 버릇을 들여놓은 터라 귀찮아 가지 않겠다고 했다가 문득 어제 읽던 형의 산문집에서 ‘나는 요즘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느낀다’는 말이 생각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어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단국대 기숙사 뒤편까지 걷고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내려오면서 생각했습니다. 내게 몸을 주신 어머니는 또 내게 더 무엇을 주지 못해 늘 안타까워하실까. 걷는 걸 싫어하시는 아버지와 달리 산을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후에 형의 책을 마저 읽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아파트 소공원의 나무들은 벌써 가을빛으로 변해버렸고 저녁 어스름의 푸른 시간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공중으로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책을 읽고 산책을 나가면 작가에게 혼자 말을 걸게 됩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리고 지금의 내 모습을 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삶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 많던 문청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책을 읽기 시작하고 고등학교 문예반에 들어가 시를 쓰기 시작하고 선후배와 몰려다니던 시절은 꿈같이 흘러, 이제는 중년을 바라보는 국어교사로 살아가는 제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순전히 형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처음으로 작가에게 편지를 써 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2007년 2월에 형의 소설 『제비를 기르다』가 나왔을 때 이화여대 후문 쪽 북카페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예스24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주선한 자리였지요. 글 속에서 만난, 사진으로 보던 형의 모습과 실제 모습은 오래 전부터 알던 동네 형처럼 익숙했습니다. 쑥스럽고 겸연쩍어 보였다고 생각한 건 저만의 생각이었을까요.
제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도 저와 가장 비슷한(?) 사람이 형이었기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소설이 아닌 산문집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영화로만 만나던 배우와 며칠 동안 함께 여행을 한 것 같은 착각. 형의 내면의 풍경들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유년의 기억들을 공유하며 일상의 갈피들을 펼쳐보는 일은 제게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저는 산문집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만의 영역과 생의 감각을 느낀다고 생각하거든요.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 천성 탓도 있겠지만 문학은 문학으로만 만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보자마자, 왼손으로 턱을 고이고 부끄러운 듯 미소를 띤 형의 사진을 보자마자 책장을 펼쳐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틀 동안 꼬박 형의 소설들에 대해, 습성과 생각들에 대해 감염되어 버렸습니다. 유년기의 트라우마, 타자와의 관계, 여행과 글쓰기 그리고 곁에서 형을 지키는 형수의 따뜻한 말 한마디. 그 모든 것들이 뜨겁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이 사는 건 무언가 그리웁다는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저녁 형에게 전화를 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을 걸고 싶어졌습니다. 화주 운주사의 와불처럼 바닷가에 누워 별들이 한 곳으로 흘러가는 이유를 묻고 싶어졌습니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저녁 함께 속초로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소설 속의 그 많은 여인들과 그 많은 빛과 어둠에 대해 끝없이 묻고 싶어졌습니다.

  이제 사십대 후반이 되었다는 형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내 나이도 이제 마흔을 넘겨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디선가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세월을 보내고 형의 소설을 기다리는 일이 행복합니다. 저는 요즘 문학교과서를 만드는 일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형의 소설을 꼭 넣어 아이들에게 형의 소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날이 차가워집니다. 이 가을 그리고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는 또 어디에서 아름다운 소설을 만들고 계신가요. 부디 그 잔잔한 미소와 사람에 대한 예민한 감성으로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과 세상의 견고함을 위한 부끄러움을 보여주세요. 더 나이가 들면 다시 형의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을 돌아보고 어쩔 수 없는 시간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겠습니다. 여전히 문학이 사라질 수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형에게 감사드립니다.


2010년 10월 10일 형을 읽는, 독자 류대성 올림.


101010-0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 버리기 연습 생각 버리기 연습 1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사람은 하루 종일 생각을 하며 지낸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사고하는 것은 인간의 훌륭한 특질이고, ‘인간은 동물과 달리 생각하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생각이 정말로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일까? - P. 14

홍길동처럼 나와 똑같은 복제 인간을 만들어 끊임없이 일하고 공부하고 진짜 나는 하루 종일 뒹굴면서 놀았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은 많고 해야 할 일은 줄어들지 않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생각하고 읽고 쓰는 날들이 반복된다. 여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임을 알지만 중독처럼 책에서 헤어나기 어렵거나 시간을 아까워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김갑수처럼 『지구위의 작업실』을 가지고 있거나 머릿속에 커다란 상상의 공간을 마련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 버리기 연습』이라는 책을 만났다. 첫 페이지를 열고 어깨위에 죽비가 떨어지는 것처럼 문장들이 들어와 박힌다. 매력적이다. ‘생각이 정말로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일까?’ 이 도발적인 질문에 잠시 가슴이 먹먹하다. 어느 순간부터 ‘멍’한 시간을 경멸하게 숨가쁘게 일상을 돌아본다. 치열하게, 열정적인 삶을 즐기던 모든 사람들에게 코이케 류노스케의 질문은 잠시 동작을 멈추게 한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저자는 뇌 속에 틀어박히면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말로 이 책을 시작한다. 분노와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마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본능적으로 탐욕스럽고 분노할 줄 알며 때때로 어리석은 인간에게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수많은 방법을 제시하는 책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오히려 절망스럽다.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역설적 발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생각’이 병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공감과 깨달음을 주지만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지를 요구한다. 몸과 마음을 조정하는 법을 통해 짜증과 불안을 없애라고 말한다. 말하기, 듣기, 보기, 쓰기와 읽기, 먹기, 버리기, 접촉하기, 기르기를 통해 저자는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파한다. 아주 쉽고 간결한 문장과 짧은 분량으로 장삼이사들에게 전하는 메시는 명료하다. 하지만 공감과 이해가 실천으로 옮겨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실천에 문제 앞에 또 한 번 좌절하지 않을까 싶다. 몰라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는데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책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끼는 원인은, 과거로부터 엄청나게 축적되어온 생각이라는 잡음이 현실의 오감을 통해 느끼는 정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 P. 23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간다. 그것이 굳어지는 과정이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생각은 복잡하고 많아지지만 그것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생각과 삶이 다를 수도 있고 과정과 목표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이렇게 ‘생각’이 흐르는 방향을 바꿔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물론 실천은 독자들의 몫이지만 말이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으며 얼마나 많은 근심과 걱정과 불안을 느꼈는지. 얼마나 많은 분노와 욕망을 표출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이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따라가는 무수한 생각의 편린들을 정리하는 일이 우리에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변화의 순간은 온다.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그 순간의 희열을 느껴 본 사람이라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너무나 원론적이고 어쩌면 따분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산을 옮기는 것보다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만 그것이 불가능한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변화된 모습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흘려듣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받아들이고 삶의 태도를 바꾸고 생각의 방향과 흐름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라면 새롭게 시작하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책이 무수한 명상과 자기계발서의 범속한 세계를 동어반복하는 것으로 치부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열린 마음으로 듣지 않는다면 도움이 될 리 없다. 가볍게 읽고 무거운 실천을 통해 작은 변화를 이루어보자. 그 다음은 점점 더 쉬워진다. 모든 일이 그러하다. 반복적인 연습과 조금씩 달라지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을 얼마나 버릴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생각하는 버릇을 고쳐볼까?

무지라는 번뇌는 마음을 실제적인 현실에서 뇌 속의 생각으로 도피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한번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면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순간에도 생각에만 빠져들고 만다. 늘 자신만의 생각에 틀어박힌 꽉 막힌 성격이 되는 것이다. - P. 24


101007-0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0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본주의는 첫째, 자본과 자본가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점, 둘째, 그 시작부터 ‘자본 혹은 자본가가 지배하는 사회 체제’를 상당히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어감으로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는 점, 셋째, 수많은 사상가들이 이 말을 근대 사회를 이해하는 대단히 중요한 핵심어로 여기고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편적인 정의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에 있으며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그 혼란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 28쪽

책을 선택하는 다양한 기준 중의 하나는 저자다.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로 깊은 인상을 받았던 홍기빈을 <학벌없는 사회> 강연 포스터로만 다시 만났다. 한 권의 책을 읽고나면 그의 논리와 설득에 몰입하게 된다. 깔끔한 문장과 정확한 분석이 마음에 든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자본주의』를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주제에 대한 관심과 저자에 대한 믿음.

살림출판사의 ‘지식총서’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와 ‘고전의 세계’는 짧은 분량으로 특정 분야에 대한 기초 지식과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지식의 에피타이저로 적당하다. 책세상의 ‘비타악티바’ 시리즈는 인권과 아나키즘을 필두로 우리가 알아야 할 세상의 다양한 ‘개념’들을 설명한다. 자주 사용하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개념이나 그 뜻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개념들에 대한 기초적이고 정확한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다. 홍기빈의 『자본주의』는 1장에서 자본과 자본가와 자본주의라는 말썽꾸러기 용어에 대한 혼란를 정리한다. 여기서 정리한다는 뜻은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정리해서 명료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왜 정리되지 않고 그 뜻이 모호할 수밖에 없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모호한 상태의 개념을 저자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한 것을 연역적으로 먼저 내세워 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개념을 저자는 나름대로 그 특징을 짚어 낸 것이다. 한두 마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개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책은 ‘화폐, 생산, 권력’이라고 하는 보다 구체적인 개념을 이용한다. 화폐경제의 발생과 ‘자본’의 발생 그리고 권력과 자본주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주변을 이용해서 실체를 밝히는 방식인 것이다. 그런다음 고전적인 자본주의 이론가들을 내세운다. 리카도와 마르크스, 좀바르트와 베버, 브로델과 베블런이 그들이다. 마르크스와 베버 그리고 베블런의 책을 읽었지만 저자의 요약 설명과 다른 경제학자와의 비교 설명은 명쾌하게 와 닿지 않는다.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서로 다른 관점들을 통한 개념 설명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지막은 자연스럽게 21세기와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을 일괄한다.

자본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경제 체제 및 이를 토대로 성립하는 사회구성체’이다. 현대사회에 적용할 수 없는 모호한 개념이고 변화하는 경제 시스템 속에서 설명이 불가능하지만 언제나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개념과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용어의 모호함 때문에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처한 사회를 설명하는 빈도가 가장 높은 개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개념에 대한 역사적 변천 과정과 나름의 기준을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사회 현상과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이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개념이 없다는 말은 무식하다는 말이 아니라 생각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명확한 개념 규정과 이해로부터 인식의 힘은 출발한다. 보다 넓고 깊게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우선 쉽고 간단하게 개념을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지식을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한 리처드 파인만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본주의 개념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 책을 포함한 ‘비타악티바’ 시리즈에 찬사를 보낸다.

이 책은 근대 이후 우리가 걸어온 역사와 가야 할 길의 방향을 묻고 있다. 하나의 개념은 정확하고 명료한 설명에 있지 않고 미래 사회의 전망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고찰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반성이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자본주의의 개념을 설명하는 대신 자본주의 길을 되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행간의 의미를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01004-0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시대를 풍미하는 책은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다. 최근 『정의란 무엇인가』로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은 제목으로 이 시대를 웅변한다. ‘공정사회’를 부르짖는 사회의 불공정성은 악취를 풍길 정도라는 걸 모두가 안다. 감사원의 지적을 받은 정부 각 부처의 결과를 공개한 최근 국감 자료는 우리 사회의 공정성을 방증한다. 이처럼 한 권의 책은 유행가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 현상의 일부로 시대를 측정할 수 있는 리트머스 역할을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앞서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를 읽어본다. 이 책의 부제는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이다. 짧은 논문에 나타난 저자의 생각은 부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롤스의 정의론 비판으로 27세에 하버드대 교수가 된 석학의 말하기 방식은 공감과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전학적 강화와 자연발생적 선택에 대한 지극히 자극적인 도입부는 관심을 집중시킨다. 청각장애 부부가 5대째 청각장애인 가족에서 정자 공여자를 찾아 청각장애 아들을 고뱅을 얻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그른가?

부모가 아이를 고른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프리미엄 난자를 구하기 위한 광고나 장애아 검사 등에 대한 도덕적 논란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근육 강화, 기억 강화, 신장 강화, 성 감별 등에 대한 서로 다른 기준과 잣대가 아니라 ‘생명’ 자체에 대한 윤리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가능한가? 종교, 인종, 문화적 차이에 따라 도덕적 기준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마이클 샌델도 첨단 과학인 생명공학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에 대한 한계를 토로한다. 배아세포에 이용에 관한 서로 다른 기준과 견해는 이 논쟁의 출발이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생명으로 볼 것인가. 이 이야기는 에필로그에서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의 전제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생체공학적 운동선수와 자녀를 디자인하는 부모 그리고 우생학에 대한 자유주의와 공동체적 관점을 다룬 본문의 내용들은 철학적, 윤리적 논란에 대해 어렵지 않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논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논점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저자의 이러한 말하기 방식은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것이 단순히 기능적 관점이나 종교적 관점이 아닌 인간사회의 보편타당한 윤리적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아이비와이즈사가 최상류층을 상대로 대학 입학과 관련된 지원에 2년 동안 3만 2995달러가 드는 ‘플래티넘 패키지’를 출시했다. 창업자 캐서린 코헨은 “나는 대학 지원만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인생 설계를 도와주죠”라고 말한다. 한국의 맞춤형 고액과외, 입학사정관제 관리 프로그램 등과 다를 바 없다. 저자는 아이를 과도하게 공부시키는 일에 대한 예를 들어 우생학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아이들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도덕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주장일 것이다.

윤리학의 관점에서 ‘생명’의 문제는 과학의 발달을 따라가는 형태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논란은 가열되지만 기술의 진보는 철학을 앞선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합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 윤리를 논하는 것은 그것 자체에 대한 위험부담을 넘어 우리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어쩌면 영원히 그 꿈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의 욕망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마이클 샌델은 이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을 제안 한 듯하다. 정답이 없다고 해서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다. 다수결로 결정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학자들의 논리가 정답일 수도 없다.

이 책은 이러한 수많은 논쟁과 서로 다른 관점에 대한 성찰과 당면한 생명공학에 대한 제문제를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완벽하고 근사한 이론을 제시하고 훌륭한 대안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생각의 방향과 일관성 없는 윤리적 기준들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가능성에 도전하면서도 도덕적 가치와 과학적 발전의 욕구 사이에서 갈등할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어 끝을 맺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수많은 담론들은 풍성한 말잔치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과 도덕적 잣대가 ‘생명’이라고 해서 비껴갈 수는 없다. 정교하고 흔들리지 않는 법과 제도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우리 사회의 기준과 원칙을 세워나가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건강한 대한민국의 출발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생명의 윤리’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삶의 윤리’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100930-0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무장지대를 담당하는 수색중대에서 군생활을 마감할 무렵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가 삐삐를 구입해서 복귀했다. 주둔지 마지막 언덕을 돌아 GOP 라인 부근에 이르자 삐삐의 안테나가 사라졌다. 무용지물이 된 조그만 기계장치를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토요일에 전역 신고를 마치고 월요일부터 출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KTF 016 번호를 예약해서 받은 전화 번호를 010으로 바꾸면서 작년에 번호가 바뀌었다. 휴대폰이 생기기 전에는 사람들이 생활이 지금보다 불행했을까?

신속하고 편리한 생활은 생각할 시간과 여유 있는 삶을 앗아갔다. 우연에 기대지 않아도 좋을 만큼 뭐든 정확하고 빈틈이 없어졌다. 숨가쁘게 살 수 밖에 없는 촘촘한 네트워크로 세상은 연결되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이제는 문자와 메일, 소셜 네트워크로 모든 사람과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시대를 살아간다. 문득, 강원도에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풀씨를 코팅해서 만든 책받침을 우체통에 꽂아 놓았던 친구를 떠올린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그때는 전화벨이 울려도 나를 찾는 전화가 많지 않았다. 공중전화 박스를 지날 때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 마음의 문을 닫고 스스로 상처 받던 시절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보편적 정서를 담아낸 소설들의 종착역은 사랑이다. 작가는 어떤 종류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할 뿐이다. 사랑을 다양하게 변주했던 신경숙의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을 천천히 읽는 가을은 또 어떤가.

기억이란 제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속성까지 있다. 기억들이 불러일으킨 이미지가 우리 삶 속에 섞여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기억이나 나의 기억을 실제 있었던 일로 기필코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고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면 나는 그 사람의 희망이 뒤섞여 있는 발언으로 받아들인다. - 22쪽 

연애소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구체적 시공간을 걷어내고 보편성을 담아내려는 노력과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는 이 소설은 ‘시대’와 ‘사랑’ 두 가지를 모두 아프게 읽어내야 한다. 그러한 시대가 있었고 그러한 사랑이 있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없는 행간의 깊이와 떨리는 문장과 긴 호흡이 압권이다. 그러나 지나친 감수성과 인물들이 가진 작위적 성격은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공감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은 곳곳에 흘러넘친다. 오랬동안 신경숙의 소설을 읽어온 독자로서 피로감이 들기 시작한 걸까. 『엄마를 부탁해』의 감동과 여운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서로 다른 감정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랑이 차고 넘쳐 부담스럽다.

신형철은 “왜 나는 지드와 헤세의 청춘소설에 감동받은 척했던 것일까. 그들의 책은 아름다웠지만 상처가 만져지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었는데. 그러나 신경숙의 소설은 아파서, ‘세계는 떠나버렸다. 내가 널 짊어져야 한다’라는 첼란의 시구를 생각나게 했지. 자신의 삶을, 동료의 죽음을, 심지어 공동체의 운명을 짊어져야 했던 한 시대의 ‘크리스토프’들이 여기 있네.”라고 말했지만 나는 지드와 헤세의 청춘소설에 감동받았다. 그것은 작가의 힘이나 작품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나이와 감수성과 상황 때문이었다.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청춘의 한 구석의 먼지를 털어내야 하는 일은 기쁨이거나 고역이다. 신경숙의 소설은 너무 아파서, 한 시대의 ‘크리스토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듯해서 부담스럽다.

내가 그쪽으로 갈 수 있는 마음인지 그럴 수 있는 상황인지는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네 명의 청춘과 윤교수는 한 시대와 서로 다른 방식의 사랑과 아픔을 토해낸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도 모든 사람은 ‘크리스토프’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강을 건너는 사람과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네. 여러분은 불어난 강물을 삿대로 짚고 강을 건네주는 크리스토프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전체이며 창조자들이기도 해. 때로는 크리스토프였다가 때로는 아이이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실어나르는 존재들이네. 스스로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게. - P. 63쪽

오래된 기억 속의 조작된 추억들을 수채화로 채색하고 싶은 사람들이나 가장 비극적인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할 만한 소설이지만, 신경숙의 소설 중에서는 만지작거리다가 다른 소설들을 우선 추천하게 될 것 같은 작품이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해질 수밖에 없는 청춘소설 한 권을 읽은 셈이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기억의 언저리를 기웃거렸을 뿐이다.

또다시 주어진 시간과 과거의 결과인 현재를 돌아본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려도 듣지 못하는 순간이 있고 간절하게 기다려도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때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때때로 그 모든 순간을 인생이라고 부른다. 다 지나가는 인생.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 291쪽


100928-0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