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의 시작 부분이다.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았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면 어느덧 창밖에는 어둠이 당도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항상 최선을 선택하며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조금 더 먼 곳에 시선을 던지고 주위를 살펴보면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 이렇게 바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제각각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장하준의 신작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80년대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부터 시작된 것으로 이야기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대한 논쟁은 그간 끊임없이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기업가들의 입을 통해 들려왔다. 일반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그들의 결정과 정책에 따른 삶의 조건에 온몸을 맞춰왔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자본주의 시스템은 어떤가. ‘자본주의’의 개념 자체를 논하는 이야기부터 더 나은 ‘자본주의’를 꿈꾸는 이야기까지 수많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아무도 정답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한국인 장하준은 『사다리 걷어차기』부터 『쾌도난마 한국경제』, 『국가의 역할』, 『나쁜 사마리안인들』에 이르기까지 줄곧 세계 경제의 문제점을 비판적 시각으로 진단해 오고 있다. 이 책은 장하준의 경제적 신념을 살펴볼 수 있는 역작이다.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경제학에 대한 지식과 정책들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도와 생각으로 현실에 적용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장하준이 말하는 ‘그들’은 권력과 자본을 쥐고 있는 정치가와, 기업가 그리고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경제에 관한 진실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세계의 실물 경제를 움직인 경제학 이론과 정치적 주장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23가지로 정리하며 저자는 미국과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이슬란드의 경제현실을 종횡무진 넘나든다. 해박한 경제학적 지식을 토대로 지난 30여년 세계경제를 진단하고 현재의 모습을 평가한다. 2008년 금융위기로 촉발된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장하준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쳐진다. 단순히 낡은 경제학의 이론들과 새로운 이론들을 비교하는 전문서적이 아니라 경제를 둘러싼 정부의 역할과 기업의 생리 그리고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점검하며 현실 경제의 문제점과 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나는 수많은 문제점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좋은 경제 시스템이라고 믿는다. 그저 지난 30여 년간 세계를 지배해 온 특정 자본주의 시스템, 즉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싶을 뿐이다. - P. 14

서론에서 이렇게 명확하게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서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에 대해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로 시작해서 ‘좋은 경제 정책을 세우는 데 좋은 경제학자가 필요한 건 아니다’로 끝날 때까지 명시적인 이야기로 주의를 끌고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와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는 짧은 글로 현실을 진단한 후 문제점을 진단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지막 결론에서 저자는 ‘세계 경제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여덟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더 나은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난 30년 간의 실험을 통해 실패로 결론 난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업가와 경제학자는 물론 정치인들이 이 책을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실 경제 체제를 비판하고 문제를 지적하는 데 머물고 있지 않다. 근본적인 원인을 지적하고 문제점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80년대 이전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동했던 원리를 통해 그 대안과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세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해지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자는 아주 순진한 발상에서 출발한다면 경제학자 장하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경제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삶의 문제이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지금 이대로 점점 더 문제가 많아지고 있는 혹은 이미 실패한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다. 생각을 바꾸고 정책을 점검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일은 우리들의 마땅한 의무이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계 경제 시스템 안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숨쉴 수 있을 것인지 ‘그들’에게만 맡길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삶의 방향을 고민하고 시스템을 점검할 시간이다. ‘경제’에 관심이 있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추천할 수밖에 없는 책 한 권이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지난 30여년에 걸쳐 벌어진 경제 현상들을 보면 우리는 자유 시장 경제학보다 이들 다른 경제학자에게서 배울 점이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여러 기업, 정부, 정책들 중 어떤 것들은 성공하고 어떤 것들은 실패하는지를 잘 보면 이제는 무시당하고, 심지어 잊힌 이런 경제학자들에게서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경제학은 쓸모없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올바른 경제학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 P.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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