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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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의 시를 통해 우리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읽는다. 사회와 문화, 정치와 역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학작품은 위대하다. ‘문학의 종언’에 관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가 읽히는 시대는 어떤가. 사춘기 시절, 문학에 눈을 뜨게 해 준 정신적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인 정호승의 열 번째 시집을 읽는 감회는 남다르다.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를 닳도록 읽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음을 그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게 인생일 지도 모른다. 무언가 조금 알 것 같을 때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작년 겨울 정호승 시인을 학교에 특강 초청 강사로 모셨다. 나는 고등학생이었다가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그대로 시인이었다. 흰머리가 조금 늘었을 뿐 그 형형한 눈빛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개인적 감회에 불과하겠지만 시를 읽고 시인을 만나는 기회는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첫 시집부터 고스란히 그의 시집이 꽂혀 있는 책꽂이가 이제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

김지하, 김남주, 황지우, 조태일, 곽재구, 김정환, 이성부나 이성복, 오규원, 황동규, 최승자, 김승희와 다른 방식으로 시대를 노래했기 때문에 현실참여도 서정도 아닌 혹은 두 가지를 모두 담고 싶었던 시인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이었다. 극단의 경계에 머물며 별을 노래했던 시인 정호승.

봄비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서정시’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시인이 된 정호승. 안도현이나 김용택과 더불어 시를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해 준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은 ‘봄비’처럼 촉촉하게 가슴을 적시며 시작된다. 그 가슴 안에서 시의 씨앗이 자라고 꽃을 피우고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믿고 싶어지는 그의 시를 읽는다.

추운 겨울 뜨겁게 한몸이 되는 역설적 순간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그 추위를 견딘다.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일생에 한 번은 그렇게 꽝꽝 얼어붙고 싶다.


결빙

결빙의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매일매일 ‘고비’를 넘기는 사람들. 영원히 살 것처럼 희망에 부풀고, 내일 죽을 것처럼 절망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고비들을 마지막이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우리들의 인생이다. 시인은 이제 시대를 고민하지도 않고 아픔과 슬픔에 절망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고비’라는 모호한 말로 뭉뚱그린다.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날선 시선도 조금은 둥그렇게 다듬어졌고, 세상을 따뜻하게 품는 방법도 알게 되었나보다. 가볍고 쉬운 발걸음이 경쾌해 보인다.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 아프지도 않아 보인다.

고비

고비 사막에 가지 않아도
늘 고비에 간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면서
오늘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이번이 마지막 고비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이런 시에 눈길이 머문다. 심장이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고 했던 어느 경제학자의 말이 떠오르는 시가 한 편 눈에 띤다.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파란 안경을 벗겨주고 싶었을까?

시인이 말한 ‘왼쪽’의 기준은 어디일까. 한 편의 시가 말하는 시대의 진실은 아득하기만 하다. 때론 너무 모호하고 난해하다. ‘왼쪽’에서 시인을 바라보면 그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갑작스런 생각.

왼쪽에 대한 편견

한쪽 날개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겨울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가 더 아름답다
한쪽 어깨가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나는 젊은 마음의 육체를 지녔을 때부터 왼쪽 길로만 걸어가
지금 외로운 마음의 육체마저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직선의 대로이거나 어두운 골목이거나
내가 바라보던 모든 지평선도 수평선도 왼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기울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멀리 사람을 바라볼 때
꼭 왼쪽에서 바라본다
왼쪽에서 바라본 사람의 옆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절대 불변의 진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지구에 여행 온 나그네들의 삶이 점점 팍팍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떤 삶을 꿈꾸어야 하는가. 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술에 취할 일이 아니라, 사라지는 꿈을 위해 슬퍼할 일이다. 시인도 사라지고 별빛도 사라지고 삶의 방향도 사람들이 걸어야 할 길도 사라지는 시대의 슬픔으로 읽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오독(誤讀)이다.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나는 나의 가장 가난했던
미소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목마른 저녁 거리에서
내가 늘 마시던 물은
내 눈물까지 데리고 땅속으로 사라지고
날마다 내 가슴속으로 눈부시게 날아오르던 새는
부러진 내 날개를 데리고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쓸쓸한 저녁 바닷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수평선과 함께
인간이 되고 싶었던 나의 모든 꿈조차
꿈속으로 사라져

캄캄한 서울
종로 피맛골 한 모퉁이
취객들의 밤의 발자국에 깊이 어린
별빛들만 사라지지 않고 홀연히
술에 취한다

여전히 ‘소년’이 되고 싶은, 아니 여전히 ‘소년’인 시인의 고백으로 이 시집은 문을 닫는다. ‘봄비’로 시작해서 ‘소년’으로 끝날 때까지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시인은 오늘도 여전히 시를 쓰겠다고 고백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는다. 말랑한 감수성과 쉬운 표현 몸에 닿는 이야기들을 통해 이제 수많은 독자를 얻는 시인이 더 이상 내게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만나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으로 읽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울 뿐. 누군가의 말대로 이제 그가 ‘쓸’ 시를 기대해 본다. 그래야 언제나 ‘소년’으로 살고 있는 철없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달랠 수 있다. 오늘 밤은 별도 없이 캄캄하여 바라볼 수도 없다.

소년

몸에
함박눈을 뒤집어쓴
하얀 첨성대
첨성대 꼭대기에 홀로 서서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다가
눈사람이 된



10111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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