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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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제목은 내용 전체를 포괄하며 핵심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책 제목도 마찬가지다. 독자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시켜야 할 뿐 아니라 책 전체 내용을 응축하거나 상징해야 한다.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는 매력적인 제목에 비해 내용은 단 하나에 집중하고 있어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이 책은 혐오를 위한, 혐오에 의한, 혐오의책이다.

 

일상적인 대화, 공적인 언어가 갖는 말의 힘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아니다. 혐오 표현은 말과 글을 모두 포함한다. 사적인 언어라기보다는 사회적 의제이며 상징적 메시지다. 말이든 글이든 언어는 사고를 반영한다.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과 지향점을 점검할 수 있는 도구가 언어다. 언어는 지문과 같다. 개인에게는 정치적 성향부터, 취향, 성격, 지적 수준, 관심사, 종교, 인종, 직업, 나이까지 가늠할 수 있는 도구다. 한 사회의 언어는 소통방식, 공동체의 의식수준, 규범과 질서를 드러낸다. 혐오표현도 당연히 개인 혹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대한 점검 도구로 활용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맘충과 노키즈존, 영화 청년경찰, 퀴어문화축제와 반동성애운동을 통해 한국의 혐오 논쟁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혐오에 대한 법률적 논쟁 보고서에 가깝다.

 

법도 시대정신의 반영이며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투영된 결과다. 각국의 특성과 문화, 공동체의 합의가 법적용에 영향을 미친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서구 유럽과 일부 선진국을 참고할 수는 있으나 그들의 법이 우리의 지향점이 될 수는 없다. 미국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촉발된 혐오 논쟁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피고 있지 못하다. 혐오 논쟁의 문제를 짚어내고 법적 제재가 가능한가, 형법으로 통제하는 게 올바른가, 사회적 논의와 대한은 무엇인가, 생활 속의 혐오는 없는가, 일반인들의 혐오의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혐오가 오로지 좌파의 아젠다인가,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망치 대신 메스가 필요하다면 메스를 대는 부분에 대한 합의는 가능한가, 유럽식과 미국식 제제 어느 쪽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우리 사회 고유의 전통과 문화에서 발원한 혐오의 근원은 무엇인가, 사회경제적 약자와 비정규직, 청년층에 대한 이해와 분석 없이 여혐과 남혐의 이분법적 접근 방식은 타당한가……

 

혐오 표현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조사와 통계 분석도 없이 지극히 편향된 시각으로 시류에 편승한 책이라는 판단은 나만의 생각인가. 내용에 동의 여부를 떠나 논의의 흐름이 정교하지 못하니, “사전적 의미로 혐오는 매우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다. 한국어에서 혐오는 혐오시설’, ‘혐오식품처럼 시설이나 음식을 수식하는 말로 주로 쓰여왔다. 혐오표현은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에서 헤이트는 극도의 싫음, 역겨움, 적대감을 뜻한다.”(24)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우선 저자는 남혐과 개독은 혐오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소한 현재’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여혐과 남혐, 이슬람혐오와 기독교혐오를 동일선상에 놓고 이거나 저거나 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48)이라고 말한다. 남혐은 이후에 미러링을 통해 그 사례를 제시하지만 B급 좌파, C급 페미니스트쯤 되는 내게 읽기에도 논리가 엉성하다. 여혐과 남혐, 이슬람 혐오가 기독교혐오가 등가로 놓일 수는 없고 같은 맥락으로 비판할 수도 없지만 여기서 양비론을 비판할 수는 없다. 남혐과 개독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한 논리는 이해할 수 없다.

 

맘충이나 노키즈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와 엄마가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맘충 따위는 농담으로 넘길 수 있다 …… 맘충이라고 말할 자유와 노키즈존 영업을 할 자유를 얻길 원한다면 아이와 엄마가 차별받는 사회 현실부터 바꿔야 한다. - 53

 

예를 들자면, 이 부분에서 차별받는 사회 현실은 어떻게 바꾸자는 말인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다. 하나마나한 소리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라는 한 문장이면 인문학 코너의 모든 책이 다 필요 없다. 맘충이라는 말을 현실에서 들어본 적도 없고, 노키즈존을 본 적도 없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될 정도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공공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 간의 예의, 암묵적 합의를 깨는 사람, 이에 대한 지나친 분노가 충분히 문제가 될 수는 있다. 이 문제 자체를 떠나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독자의 인식 변화를 촉구하는 발언인지,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대형 화산 폭발로 인해 우리 땅 밑에 거대한 용암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그 용암을 제거해야 한다. 용암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화산 분출만 막아봤자 별 소용이 없다. 남성들의 인식 기저에 있는 여성혐오는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 104

 

앞뒤 맥락을 이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도 모든 남성들의 인식 기저에여성혐오가 땅 밑에 용암처럼 흐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의 남성에게 달린 의 위치가 차별이다. 여성의 관점에서는 남성의 모든 말과 생각, 시선이 혐오라는 주장이다. 그것이 범죄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 궁금해졌다. 존재 자체가 여성혐오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니 조심하고 삼가라는 말인지, 그 인식 기저를 바꿀 용기를 내라는 말인가.

 

표현의 자유를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미국의 수정헌법에 따라 법률적 규제보다 사회적, 문화적 규제가 철저하고 기업과 학교 등 자율적 자정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 미국과 법률로 규제하는 유럽을 비교한 내용이면 충분했다.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규제처벌법은 각각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과 같은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동시에미국처럼 혐오표현규제처벌법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숭미(!)주의자이자 혐오표현 문제를 국가의 개입 없이사회에서 직접 해결하려는 행동가들일 것이다. 혐오표현 규제 옹호론이 맞서야하는 가장 까다로운 상대도 바로 이들이다.”(141)라고 주장한다. 원천 봉쇄의 오류다.

 

혐오표현에 대한 법률이 미비하고 문제 인식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백퍼센트 공감한다. 섬나라처럼 고립된 지정학적 위치와 유럽이나 미국처럼 인종, 종교 문제가 첨예하지 않았고 문화적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벌어진 당연한 결과다. 법은 현실을 앞서 갈 수 없다. 사회 현실과 맥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하는 습관과 오류를 이 책도 피해가지 못했다. 토양이 다르면 자라는 식물이 다르고 같은 작물도 맛이 다르다. 주장과 설득이 아니라 학문적인 비교, 정리, 논쟁거리를 제시하는 정도에 머물러야 했다.

 

지금까지 나의 논의는 책의 내용과 저자의 주장과 무관한 형식과 논리에 대한 엉성한 화풀이였다. 새로운 앎을 얻은 것도 아니고, 기존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지도 않았으며, 대안을 제시하거나 해결방안을 제안하지도 못했으니 지식 습득을 위한 책이라면 다른 방식이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개인적인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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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셜록 1
박상규.박준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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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의 플레이는 아름답다. 종목과 상관없이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다. 물흐르듯 거침없고 억지스럽지 않다. 메시와 호날두는 나달과 페데러와 비교된다. 나는 메시와 페데러의 스타일이 좋다. 원고를 마무리하는 날 호주 오픈 16강에서 한때 세계 랭킹 1위였던 노박 조코비치를 3:0으로 이겼다. 두 번이나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호주의 전설 로드 레이버는 이 경기를 멀리서 지켜봤다. 그리고 오늘, 정현은 싱겁게 8강을 통과했다. 준결승 상대는 황제칭호가 붙은 로저 페데러. 무명의 선수들은 그렇게 거장의 벽을 넘는다. 세월은 가고 영원한 승자는 없다. 지구처럼 공은 둥글다. 한때, 화려했던 명성과 막강한 권력과 엄청난 부귀영화도 찰나에 불과하다. 언제나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 통장 잔고, 아파트 평수, 사회적 직위는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갔을까. 우리가 사는 공동체 안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권력을 거머쥐는 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라. 승진을 준비하는 교사, 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기는 관리자, 진급을 노리는 장교, 당선이 목적인 정치인, 경찰과 검찰의 승진 체계는 참담하다. 86년생 정현이 호주오픈 4강에 오른 날, 영화 1987를 미루고 있는 것처럼 오래 미뤘던 책 지연된 정의를 펼친 건 실수였다.

 

잘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때로 벼랑 끝에 서야 합니다. 걱정마세요. 살길이 열릴 겁니다.”

도망자로 한 세월을 산 류영준의 말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됐다. 슬픔과 상처 없는 사람 없듯이, 불안과 걱정 없는 인생 역시 없을 거다. 내게 필요한 건 떠날 준비가 아니었다. 글쓰기에는 마감이 필요하듯이, 어떤 선택에는 준비보단 결단이 더 중요하다. - 18

 

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의 재심청구 사건 기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추악한 이면이다. 아름답고 즐거운 뉴스로 가득한 세상은 불가능하다. 파산 직전 변호사와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헤매던 기자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니.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사건은 시작에 불과하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은 어떤가. 아직도 진행 중인 완도 무기수 김신혜사건. 지연된 정의는 지연된 인생보다 비참하다.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을 다룬 영화 자백부터 유서대필사건의 피해자 강기훈씨에 이르기까지 역사책에서 경험했던 야만의 세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외면하거나 눈감을 뿐. 그 누적된 시스템의 오류가 이명박근혜를 낳았고 원세훈, 김기춘을 만들었다.

 

황당한 범인 조작 사건의 발달은 대개의 경찰의 사건 조작과 검찰의 동조, 판사의 동조로 마무리된다. 완벽한 팀웍이다. 삼박자가 딱딱 들어맞는다. 가짜 살인범 3인조는 형사 장해구와 오재경이 조작했고 김앤장에서 돈벌레가 된 검사 최성우가 진범을 다시 풀어준다. 이명박 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던 당시 검사장 이종찬은 진실을 외면한다. 진범이 자백하고 조작된 사건 기록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버티는 이유는 자신들의 명예, 권력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한 돈벌이 때문이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못 배운 사람들,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가한 국가의 폭력은 최악이다. 누명은 벗었지만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지도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도 않는다. 뻔뻔해야 잘 사는 법.

 

국가가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삼례 3인조를, 고졸의 가난한 박 변호사가 사람으로 대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 박변호사의 변론은 거기서 출발하고, 다시 거기로 향했다. 박 변호사는 그걸로 싸웠고, 그걸로 이겼다. - 114

 

중국집 배달을 하던 15세 소년이 누명을 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진범이 나타나 황상만 형사가 집요하게 매달렸으나 검사는 끝까지 기소하지 않았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한 사람의 인생보다 중요한 건 자신들의 승진과 성공이었으므로. 묻고 싶다. 〇〇 형사, 정종화 검사, 김훈영 검사는 잘 살고 있나? 행복한가?

 

하지만 저는 죄가 없습니다.” K가 말했다.

……

그건 맞습니다.”

그러나 죄 있는 자들은 늘 그렇게 말하곤 하지요.”

_프란츠 카프카, 소송중에서

 

사건은 모두 그렇게 시작됐다. 완도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수가 된 김신혜씨 사건도 그러하다. 강성구 형사는 보고있나?’

 

이 책은 지연된 인생을 사는 변호사와 기자의 활약기가 아니다. 확신의 함정에 자들이 벌인 명백한 실수 혹은 의도된 오류에 대한 보고서다. 그들은 개인적인 영달과 포상과 승진을 위해 인간을 도구로 이용했다.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이라 함은 결국 공권력을 휘두르는 경찰과 검찰과 법원 조직에 몸담고 있는 인간의 실수와 오류다. 그러나 바로 잡히지 않고 바로 잡을 생각도 없다면?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법은 더더욱 정의와 거리가 멀다. 눈뜬장님으로 살고 싶지 않다면 읽고 생각하고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한다. 등따시고 배부른 돼지의 죄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갈 길은 멀고 날은 저물었다. 손석춘의 과격하고 서툰 사랑 고백, 하종강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후 오랜만에 다시 보는 후마니타스의 우리시대의 논리가 여전해서 반가웠지만 우리 사회의 이면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텍스트로 확인되는 그 깊숙한 행간의 그림자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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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전쟁 - 소비시장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김영준 지음 / 스마트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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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정한 규칙을 따를 수 없소.”

그럼, 인연을 끊어요.”

 

그렇게 결심한 후 그가 선택한 삶의 길을 함부로 평가할 수 있을까. 에릭슨이 말한 결정적 시기는 생애주기마다 반복된다. 영화 나비효과를 비롯해서 타임 패러독스, 시간을 달리는 소녀, 하루, 슬라이딩 도어즈, 롤라 런처럼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는 법. 선택은 잔인하고 결과는 현재와 미래를 만든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합리적이지 않다.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의 기준에 따라 선택할 수도 없고 손익계산서를 놓고 따질 수도 없다.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버튼을 누른다.

 

모든 선택은 부조리하다. 자영업을 선택한 사람들의 결정은 어떤가. 선택지가 없었던 사람부터 놀이로 시작한 사람까지 상황과 맥락은 제각각이다. 업종, 입지, 시기, 투자금액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가 성공했든, 또 누가 문을 닫았든 결과에 따라 사람들은 그 이유를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인지부조화가 발생하지 않도록, 귀인이론에 따라 그럴듯한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창업에 관한 행정 절차와 세법 등 객관적 규정을 제외하면 단 한 군데의 영업장도 동일한 조건은 없다.

 

대왕 카스테라, 벌꿀 아이스크림부터 코인노래방, 인형 뽑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영업의 메커니즘을 한 권의 책으로 배우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에게 세상 사는 게 그렇게 만만해보여?’라는 말을 내뱉지만 사실 그 말은 자기반성이다. 살아보니 이렇더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누가 똑같은 생각과 감정과 능력과 배경으로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건 먼저 살아본 사람들의 오만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자식을, 제자를, 후배를, 가족을, 친구를, 어린 사람을 함부로 가르치려 들지 말라.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다닌 기억이 선하다. 김영준의 골목의 전쟁은 전통 시장과 대형마트 사이에 놓인 자영업자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오해를 풀지도 진실을 찾지도 못했다. 김형준은 상품 가격의 결정과정, 자영업의 성패, 유행의 함정, 상권의 성장과 쇠퇴에 대해 나름의 시각으로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골목의 자영업을 분석한다. 현실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서 본질적 원인을 읽어내는 안목은 개인의 능력이다. 사적 경험과 통계 수치, 이론적 근거가 더해지면 믿음이 된다.

 

이 책의 장점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혹은 선택의 여지없는 자영업이라는 이슈다. 익숙한 소재 선택, 알려진 사실에 대한 분석, 간과하기 쉬운 오해를 쉽게 풀어낸다. 간결하고 쉬운 문장으로 설명하고 근거와 이론으로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거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의지는 없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판세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실패하지 않기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위한 생존전략에는 분명 도움을 준다.

 

쉽게 말하자면 알아둬서 나쁠 건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가독성 있는 문장과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접하는 자영업은 누군가의 생업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미래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의 고통일 수도 있다. 사회학의 관점으로 경제의 흐름으로 트렌드와 라이프사이클의 변화로 자영업에 접근하는 책도 있겠지만 이 책은 그 모든 것을 현실적인 문제로 녹여버린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하지만 경제학 박사가 떼돈을 벌 수 없듯이 이 책을 읽고 자영업에 뛰어들 수는 없다. 실수와 착각을 줄이고 오해와 편견을 없애는 역할로 받아들이는 정도면 충분하다. 안타까운 건 김형준의 분석과 조언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 가능성과 미래는 전혀 예측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데 있다. 행동경제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영업을 시작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마치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시장 경제를 읽어내기는 어렵다.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불공정한 계약과 갑질 논란,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 재벌 3~4세의 떡볶이와 순대까지 체인점까지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구조적 문제만 해결해도 자영업자들의 숨통이 조금은 트일 수 있다. 치열한 경쟁과 임대료 문제가 관건이지만 자영업자는 창업의 문제일 뿐 아니라 내 가족, 친구, 이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용적 목적으로 읽힐 수 있는 책이지만 우리 사회의 단면을 이해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 눈앞에 현실을 외면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경제 비판서는 아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골목에 전쟁대신 평화가 찾아오길, 무엇보다 우리 삶이 전쟁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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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 조지 오웰 평론집
조지 오웰 지음, 조지 패커 엮음, 하윤숙 옮김 / 이론과실천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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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인터넷은 놀랍고 신기하다. 성인이 된 후에야 모뎀으로 겨우 접속하던 시절. 한석규와 전도연처럼 영화 같은 일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네트워크 세상은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우매한 군중은 직접 민주주의에 버금가는 여론을 형성한다.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개인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던 시기에 벌어졌던 신은 죽었다의 재현이었다. 통제된 언론과 권력기관의 압력은 석기시대의 전설이 되었다. 대신, 실시간으로 퍼지는 뉴스와 sns을 통해 확산되는 사건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홍수에 휩쓸리듯 전체 판을 읽지 못하는 분노, 혐오, 증오는 확대 재생산된다.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을 하는 사람도 생긴다. 피아 구분 없이 총질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념, 정당, 계층, 성별에 따라 논리와 이성을 상실한 사람도 많다.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를 법과 인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쟁점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할까?

 

대중의 관행과 의견을 의식과 지성을 발휘해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의 이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조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국가의 권력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정부(invisible government)’를 이룬다는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프로파간다에서 지적한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문제점은 포퓰리즘과 민심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하다. 여론조작은 프로파간다로 가능하다. 언론은 여론을 이끄는 대신 목소리 큰 놈에게 끌려가기도 한다. 질문할 줄 모르는 기자, 받아쓰기와 베껴쓰기로 월급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기자의 기사를 새겨듣는 독자가 사라진 시대는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검색해서 뉴스를 전하면서 기자인척 하거나, 팩트 확인 없이 추측과 사견을 섞어 해설을 하는 기자는 이제 여지없이 걸러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마치 뭘 연구하는지 모르는 연구원이 없는 연구소장이나 혼자 일하는 각종 모임과 단체의 대표처럼.

 

아날로그의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디지털 시대에 비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였을 것. 왜냐하면 어마어마한 정보격차 때문.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낮에 수평선을 본 사람과 밤에 파도소리만 들은 사람만큼 크다. 조지오웰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에서 천국과 지옥은 같은 곳에 있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제도의 변화는 소용없다.”(41)는 말로 그 시절과 이 시대를 하나로 묶어버린다. 그렇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제도의 변화는 소용없다. 시스템과 구조를 바꿔도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달라질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로파간다는 어떻게 가능할까. 마음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여성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평화와 비폭력을 내세운 마틴 루터 킹과 폭력과 투쟁으로 맞선 말콤 엑스를 비교할 수 없듯 페미니즘 운동에 메갈리아는 숱한 이슈와 논란을 가져왔다. 지금도 그 논쟁은 계속된다. 시간의 문제일 뿐 변화는 계속된다. 국가의 정체, 권력구조, 경제체제도 끊임없이 변했다. 사람들의 생각도 행동도 변한다. 그러나 자연스런 변화는 없다. 생각의 전환, 실천적 행동이 이어져 변화가 일어난다. 급진적, 일시적 변화를 혁명이라 하고 점진적, 단계적 변화를 개혁이라 하자. 보다 큰 개념인 인권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사형제 폐지는 어떨까. 남성은 여성의 적인가. 물론 여성은 남성의 적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보편성과 범용적 원리를 들이밀지 말라는 논리는 타당한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김남주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로파간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다. 그 방법의 핵심은 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 구조를 바꾸고 시스템을 고치는 일은 늦었지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지 못하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보는 환영이 아니며 실제로 이루어지지만, 느리게 진행되고 언제나 실망스럽다.”(42)는 말은 정운영의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선언처럼 아프게 들린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게 프로파간다다. 조지 오웰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디킨스 본인도, 빅토리아 시대 대다수 소설가도 이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 모든 프로파간다가 예술은 아니다.”(78)는 말로 흔들리던 시대의 예술을 평가한다. 아날로그 시대의 소설은 그대로 가공할 무기였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영향력은 지금과 다른 양상이었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 세상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다. 그들의 말이 항상 옳고 선경지명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시선으로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했다는 의미다.

 

예술은 글 쓰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20세기를 여는 영화예술은 텍스트와 다른 힘으로 대중을 쥐고 흔들었다. 그것은 이성과 논리에 호소하는 방식대신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을 택했다. 찰리 채플린은 삼류 슬랩스틱 코미디의 달인이 아니다. 조지 오웰은 이 책에는 단 한편의 영화 이야기가 나온다. 위대한 독재자가 바로 그 영화다. 부분적으로만 봤던 영화 전체를 다시 봤다. 채플린은 영화 천재가 맞다. 영화 말미에 나오는 연설만 들어보자.


위대한 독재자》 마지막 연설

 

찰리는 모두가 예상하는 연설 내용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관용, 상식적인 예의를 지지하는 투쟁 연설을 인상적으로 펼친다. 아주 대단한 연설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헐리웃 영어로 바꿔놓은 형태라 할 수 있었는데, 나로서는 오래간만에 들어본 아주 강렬한 프로파간다였다.”(204)는 평가처럼 이 책의 제목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예술은 찾기 힘들다. 선언적 의미의 민주주의, 자유, 평화, 인권, 평등에 대한 가치 기준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프로파간다는 20세기 예술의 전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앞으로도 지속되야 할 예술의 가치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매일 쏟아지는 책과 텍스트는 개인적 기록으로 의미 있는 비평으로 예술 작품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가치또한 프로파간다가 아니면 인정받을 수도 없고 그 판단 또한 모호하며 기준 또한 점점 희미해진다. 러디어드 키플링, T. S. 엘리엇, 살바도르 달리, 조나단 스위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가들에 대한 조지 오웰의 평가는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말한 대로 정치적이다. 어떤 예술이 프로파간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마는.

 

소련은 고속 성장을 보이는 대국으로 과학 연구자들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에 그들을 후하게 대우한다. 심리학과 같은 위험한 학문을 가까이 하지 않는 한 과학자에게는 특권이 주어진다. 반면 작가는 극심한 박해를 당한다. 일리야 예렌부르크나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은 막대한 돈을 받고 있지만 그와 같은 작가들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 즉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 - 341

 

 

조금이라도 가치를 지니는 작가의 글은 언제나 온전한 자아가 만들어내는 산물이어야 하며, 이 자아는 한쪽에 비켜선 채 진행되는 일을 기록하고 그 일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일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결코 속지 않아야 한다. -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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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프랑스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드니 디드로 외 지음, 이규현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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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파이프가 아니란 말인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라고 하자. 언중言衆들이 모두 라고 했으면 는 비가 아니라 가 된다. 지시하는 언어[형식]와 대상[내용]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만남이 숙명을 가장한 우연이듯이. 이를 언어의 자의성恣意性이라 한다. 이름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돌은 한국에서만 돌이다. 미국에서는 스톤이라 부른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이를 기표(記標, 형식, 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記意, 내용, signifié 시니피에)라고 명명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은 이미지의 배반이다.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림은 사물의 재현이다. 당연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다. 파이프의 재현일 뿐. 글과 그림을 분리해 보자. ‘이것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가. 파이프를 그린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과 평면의 종이만 남는다. 그림으로 보여주려는 파이프와 추상적 개념으로 기표와 기의 사이에 약속인 텍스트는 상호 연관성이 없다. 파이프 그림과 텍스트는 캔버스 안에 동시에 놓여 있으나 이질적이다. 미셸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이 그림은 칼리그람(+그림)이다. 보여주는 것과 말하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서로를 포개어 놓았다라고 지적한다. 글과 그림을 은폐한다는 말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숨김과 드러냄이라는 표면적 의미와 글과 그림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선언은 기존 질서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관습적 사고에 대한 경고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처럼 우리는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재한다고 믿는다. 교육 제도, 정치적 이념은 말할 것도 없고 윤리와 종교적 교리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그렇다고 믿는, 대다수가 인정하는 이념과 가치는 언제나 위험하다. 당신의 자유의지가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면 무엇인가

 

드니 디드로의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는 소설인가 아닌가. 소설이란 무엇인가. 300년의 간격을 두고 발생한 용어인 꽁뜨conte와 누벨nouvelle은 어떻게 다른가. 소설의 이론을 소설로 보여주는 것은 가능한가. 반성적 사고는 새로운 출발의 전제 조건이다. 디드로는 기존의 소설에 반기를 든다. 소설다운(?)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면서 스스로 단편소설의 전형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자기부정이다. 의심과 질문, 자기부정이 결여된 진보는 가능하지 않다.

 

프랑스의 단편들은 미국,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영국을 거쳐 오며 느꼈던 소설과 차이가 크다. 라틴아메리카의 환상적 리얼리즘과 또 다른 환상과 현실의 공존이다. 현대소설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 즉 개연성 있는 허구를 전제로 한다. 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한정짓는 어리석은 이론을 들추자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근대 이전의 서사문학과 다른 특징에 대한 이야기다. 꿈과 환상의 나라로 떠나는 여행은 여전히 계속되지만 프랑스의 단편들은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며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고전소설의 전매특허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구별되는 혼란이다. 발자끄의 붉은 여인숙과 메리메의 푸른 방은 그 자체로 사건의 재미를 보여주지만 문신론자들의 저녁식사, 씰랑스, 코프퓌아 왕에 이르는 동안 내용은 고사하고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끌레지오의 륄라비와 블랑제의 낙서에 이르러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언어 자체가 환상이다. 소설은 세계를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소설은 세계를 창조한다. 프랑스의 단편을 읽는 동안 지금-여기의 관점으로 세계문학을 읽으려는 어리석음이 그때-거기의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욕망을 앞섰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봄 밤, ‘사랑이 상대방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이라면 누구도 그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블랑제, 낙서, 458)라는 낙서만 남았다. 멀리 신호등에 걸린 자동차의 붉은 등이 흐릿하다. 일단 멈추지 않으면, 달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어둔 밤길 조심.

 

나는 밤을 열렬히 사랑한다. 사람들이 조국과 애인을 사랑하듯 나는 본능적이고 물리칠 수 없는 깊은 애정으로 밤을 사랑한다. 내 모든 감각으로, 밤을 보는 내 눈으로, 밤을 호흡하는 내 후각으로, 밥의 정적을 듣는 내 귀로, 어둠이 어루만지는 내 살갗 전체로 밤을 사랑한다. - 모빠쌍, ,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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