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계보학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가장 급진적이고 문제적인 근대 철학자는 니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엄격하고 보수적인 교육을 받았으나 그는 인간관 세계를 비틀어본다. 도덕의 계보학을 읽는 내내 풀리지 않는 의문은 구조와 틀을 깨는 사고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였다. 수없이 명멸했던 철학자들의 개략적 흐름과 특징을 이해한 다음에는 개별 사상가의 변곡점이 궁금하다. 차근차근 벽돌을 쌓듯 선대의 업적을 공부하며 나름의 독창적인 생각을 만든 경우도 있으나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통해 사고의 전환을 이루듯 특별한 전환점이 생기기도 한다. 바그너와의 만남도 니체의 생애주기에서는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만남이나 영향을 누구에게나 비슷한 경험이 아닌가. 기존의 사유 체계를 뒤흔들고 대다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구조 너머를 기웃거리는 기질은 타고 나는 것일까.

 

도덕은 선과 악, 좋음과 나쁨에 대한 의식 체계다. 니체를 이를 권력관계가 발생한 생각과 행동으로 분석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넘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권력적 역학 관계로 환원한 것이다. 예를 들어 고귀한, 귀족인, 고상한 정신적으로 고매한 기질은 좋음이고 비열한, 천민적인, 저급한은 나쁨이다. 이러한 도덕 계보학에 관한 본질적인 통찰은 훗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이어진다. 물론 푸코는 계보의 권력의 역학 관계를 설명하는데 계보학이라는 방법론만을 차용한다.

 

니체가 주장하는 도덕은 운명에 맞서 의연한 자세를 취할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내면화된 억압이라고 분석한다. 도덕의 기준은 공리성과 양심이다. 도덕은 주체성이 결여된 인간에게 선악과는 조금 다른 개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장구한 역사에서 선과 악은 인간의 삶에서 기초적이고 지배적인 원리였다. 하지만 좋음과 나쁨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고 설명한다. 사제와 귀족은 물리적 힘이 다르다. 각각 내세우는 가치도 차이가 난다. 니체는 근본적으로 예수를 인정하지만 교회를 문제 삼는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교회이지 교회의 독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인간의 자유정신이 어떻게 노예도덕으로 전락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고상한 가치 평가방식이 잘못 다루어지면 현실에서 를 짓는 일이다. 이는 개인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괴로움과 고통의 근원은 각자의 기준과 가치가 아니라 소수의 특권을 옹호하기 위한 종속적 태도 때문은 아닐까.

 

좋음공리적, 합목적적이라는 개념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가? 공리성이 증명된 것이 가치 있는 것, 좋은 것인가? 그렇다면 개인의 이익과 공리성 사이에 충돌과 갈등이 벌어질 때 개인을 위한 선택은(이것이 공리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쁜 것인가? ‘고귀한, 귀적인, 정신적으로 고상한, 고결한, 정신적으로 고매한 기질의, 정신적인 특권을 지닌’...좋음인가? 반면에 소박한schlicht, 단순히schlechtweg, 완전히schlechterdings’ 같은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은 나쁨에 해당하는가? 자연과학과 생리학은 도덕 계보학에 관한 본질적인 통찰로부터 자유로운가? 1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을 읽는 동안 떠오른 질문들이다.

 

’, ‘양심의 가책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은 책임에서 발원한다. 니체는 양심이라는 개념의 배후에는 이미 장구한 역사와 형태의 변화가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종교를 비롯하여 고통의 기억술로 인해 고정 관념을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만은 고정된것이다. ‘schuld’라는 주요한 도덕 개념이 부채schulden’라는 지극히 물질적인 개념에서 유래했다. ‘양심의 가책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보복이라 할 수 있는 형벌의 형태로 각인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니체는 “‘’,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는 이 영역, 즉 채권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 세계의 시작은 지상의 모든 대 사건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철저히 피로 물들여졌다. 그런데 저 세계는 실은 피와 고문의 냄새를 다시 완전히 씻은 적이 없다고 덧붙여 말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양심의 가책이란 하나의 병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라는 도발적 선언은 기존의 지배권력, 종교적 교리에 도전하는 명백한 반란이다. 니체는 이를 몰아(沒我), 자기부정, 자기희생과 같은 모순되는 개념들 속에 내재된 아름다움에서 그 연원을 찾는다. 문제는 그 권력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아름다운 희생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닐까. 도덕적 가치로 내세워지는 비이기적인 것은 현대사회에서 이미 반전이 일어난다. 누군가는 행복한 이기주의자 말하고 또 누군가는 개인주의자 선언을 외친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고 해서 생각과 행동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등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죄의식과 양심은 서로 다른 잣대를 가지고 있다. 무엇이 이기적인 행동이며 어디까지가 개인주의로 인정받을 수 있는 행동일까. 가족 공동체에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의 계보학은 생각보다 그 뿌리가 깊고 근원을 안다고 해서 생각의 변화,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니체는 진리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이 아니라 일종의 은유며 그 자체가 삶의 의지에 대한 표현이자 권력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진리와 학문은 궁극적으로 권력을 추구한다. 그것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표현했다. 도덕의 계보학 또한 유사한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신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죄책감을 수천 년에 걸쳐 주입당한 인간이 자유롭고 주체적인 행위의 주체로 거듭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죄나 의무에 관한 종교적 개념일 뿐 도덕과 권력의 관계에서 자유롭다는 의미가 아니다. 국가가 나를 위해 뭘 해 준 게 있나 묻기 전에 당신이 국가를 위해 뭘 했는지 돌아보라는 말 같잖은 소리가 이에 해당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채무자가 아니다. 길들여진 동물적 인간의 운명은 그 자체로 비참하다.

 

언젠가 사랑과 경멸을 품은 구원의 인간은 올 것인가. 130여 년 전에 신을 부인하는 자인 차라투스트라에게만 허용된 권한이라던 니체의 생각은 지금 어떤가. 창조적 정신의 소유자의 고독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 속에 몰입하고 파묻히며 몰두해 있는 것이며 이상이 현실에 부과한 저주로부터 구원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여기에 적용될까.

 

금욕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제3논문의 주제다. 금욕적 이상은 철학자, 학자에게 금욕은 높은 사유 능력을 위한 직감이나 본능 같은 것이지만 예술가에는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니체는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소환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은 가장 근원적이고 독립적인 예술이며 심연으로부터 끄집어낸 계시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음악가는 신탁을 전하는 자이며 사제이니 음악이 곧 형이상학이다. 철학자들에게 금욕적 이상의 가치는 현혹되지 않으려는 태도다. 금욕적 이상은 세 가지 커다란 슬로건은 청빈과 겸손과 순결이다. 진리를 위해 고통 받는 걸 견디라는 말인가. 높은 정신성에 도달하기 위한 금욕죽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니체가 살던 시대와 우리가 시대는 맥락이 다르다. 세계를 지배하던 암묵적 합의, 전통의 권위가 무너졌다. 신과 공동체의 질서보다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라고 권유하는 시대다.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으나 제3논문은 감흥이 별로 없다. 금욕적 사제가 삶의 가치를 결정하고 도덕의 계보학을 잇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일까. 당대에는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였겠으나 지금은 다르다. 니체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시대를 뛰어넘는 혁명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정신을 소유한 채 기존의 것을 깨트리고 비판적이고 실증적인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을까. 25세에 시험과 논문 없이 출판된 저술들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니체는 성공에 취한 대가 바그너의 오만과 군중의 속물근성을 보고 그와 결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충분이 자신도 그럴 수 있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건 아닐까.

 

니체가 말하는 천민이란 신분적 의미에서의 천민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 창조를 못하는 인간, 즉 권력, 명예, , 쾌락을 좇는 노예가 된 현대인을 말한다. 그리고 대통령이든 재벌이든 지식이든 개인의 내면에 귀족과 노예가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자나 고귀한 자는 스스로 사물과 행동에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인간을 말하지 신분적인 의미에서의 귀족이나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 센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우리의 일반 상식과 달리 권력과 부, 지식을 장악하고 있는 오늘날의 지배자를 강자로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권력과 자본의 노예로 본다. - 해설 위험한 도덕 혁명가 니체의 삶과 작품’, 254

 

홍성광의 해설 부분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박근혜/이명박와 이재용/조현민을 떠올렸다. 권력과 자본의 중심에 우뚝 섰으나 그들은 결국 노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은 대다수 사람들이 저들의 삶을 욕망한다는 것. 그 주변에 파리떼처럼 기생한다는 것. 끊임없이 자기 삶과 아이들의 미래를 저쪽으로 밀어낸다는 것.

 

니체가 말하는 도덕의 계보학은 결국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를 의욕하려고 한다…….”는 말을 증명한다. 가치의 전복을 시도하는 철학자에 대한 오해도 많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우리가 노예도덕이 아닌 주인 도덕을 지닌 사람이 될 것을 권한다. 차라투스트라처럼 자신을 극복하고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며 위대한 모습으로 삶을 긍정하고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는 충고다. 노예 도덕을 부정하고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며 자유롭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노력과 실천은 언제나 각자의 몫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인식하는 자들조차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 번도 탐구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느 날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난단 말인가? - 11쪽

책임이라는 이례적인 특권에 대한 자부심, 이 진기한 자유에 대한 의식, 자기 자신과 운명을 지배하는 이러한 힘에 대한 의식은 그의 깊디깊은 심연에까지 내려가서 본능, 지배적인 본능이 되었다. 만일 그가 이 지배적 본능에 걸맞은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낀다면 그것을 뭐라고 부를까? 그러나 그 주권적 인간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을 자신의 양심이라 부를 것이다……. - 77쪽

그러므로 ‘죄’, ‘양심’, ‘의무’, ‘의무의 신성함’과 같은 도덕적 개념 세계는 이 영역, 즉 채권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 세계의 시작은 지상의 모든 대 사건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철저히 피로 물들여졌다. 그런데 저 세계는 실은 피와 고문의 냄새를 다시 완전히 씻은 적이 없다고 덧붙여 말해도 되지 않을까? - 84쪽

‘진보’의 정도는 그것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 모든 것의 양에 의해 측정된다.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보다 강한 개별 인간 종족의 번성을 위해 희생된다는 것 ― 이것이 진보일지도 모른다…… - 103쪽

양심의 가책이란 하나의 병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임신이 하나의 병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병이다. - 118쪽

‘법’이란 오랫동안 하나의 금지vetitum였고, 하나의 불법행위였으며 하나의 혁신이었다. 그것은 폭력으로 나타났고, 사람들은 그것에 복종하는 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치욕으로 느꼈을 뿐이다. - 159쪽

무(無)에의 의지, 삶에 대한 반감,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에 대한 반항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 있는 것이다! …… 그러면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를 의욕하려고 한다……. - 23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