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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마음에 남아 - 매일 그림 같은 순간이 옵니다
김수정 지음 / 아트북스 / 2018년 4월
평점 :
아주 가끔, 유리벽 안에 사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신경림의 말대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보이지 않는 투명 비닐막에 싸여 허우적대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알아본다. 그리고 공감의 미소를 보내는 대신 모른 척 외면한다. 생채기 나기 쉬운 멘탈은 세상살이에 부적합하다. 예민하고 까탈스런 감정은 손을 댈 때마다 바스러진다. 타인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 불에 덴 것 같은 상처를 남긴다. 모두 웃는 상황에서도 짜증이 날 때도 있고, 심각한 상황이 너무 우스꽝스러워 미친 듯 폭소가 터질 때도 있다. 뺨을 스치는 바람, 서쪽 하늘에 물든 붉은 노을, 차창에 부딪치는 물방울, 소리없이 흐르는 구름의 모양에 발길을 멈춘다. 배터리를 제거한 핸드폰처럼 때때로 세상이 일시정지 화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깨어있는 모든 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가족과 내 방이 너무 낯설어 불편하기도 하다. 『그림은 마음에 남아』를 쓴 김수정은 아마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는 상상속의 색을 좋아한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제목이지만 내겐 제목만 남아 유토피아처럼 없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색을 쫓는다. 아주 오래 전 읽었던 『그림 읽어주는 여자』가 떠오른 건, 지나치게 내밀한 고백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최근 각 서점의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는 ‘감성 팔이’와는 다르지만 내면의 고백을 듣는 일이 내게는 불편했다. 외면하고 싶은 저 깊은 곳의 감정이기 때문이며, 애써 꾹꾹 눌러놓은 내면의 상처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림은 마음에 남아’ 깊은 울림을 준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마음이 그림에 남아 어쩔 줄 모르는 저자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림을 이해하는 거친 두 가지 방식은 머리와 가슴이다. 미술사에 대한 지식과 회화의 변천사는 미술관에 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진 않다. 그림을 받아들일 감수성이 없다면 기계적인 학습에 불과하다. 김수정은 서양화를 전공한 예술가다. 오랫동안 하얀 캔버스 앞에서 손끝이 갈라질 때까지 물감과 붓을 잡았던 사람이다. 스스로 그 긴 고통과 환희 순간을 말한 적은 없지만 행간에 스민 그림에 대한 열망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일상적 현대인의 모습. 능청스러울 만큼 자연스럽게 그에 어울리는 그림을 소개하는 방식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며 장점이다. 이주헌이나 이명옥이 보여주지 못했던 일상과 그림의 조화가 빛난다. 박제된 고전은 힘이 약하다. 현재성을 획득하지 못한 예술 또한 그들만의 잔치에 불과하다. 김수정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그림, 일상의 고통과 피로를 나눌 만한 그림, 소통과 나눔이 가능한 그림을 말한다. 그것은 지식으로서의 예술이 아니고 교양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며 삶 그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저자의 또 하나의 미덕은 독서력이다. 시와 소설은 물론이고 인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심은 꼼꼼한 밑줄과 인용으로 가슴에서 머리로 그림에 대한 감상을 밀어 올린다. 간지러운 감성에 기대 대책 없는 위로를 건넸더라면 내겐 오히려 감동 없는 책읽기로 끝났을 듯. ‘혀는 거짓말을 일삼고 몸은 과장을 좋아한다’는 천운영의 소설에 그은 밑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문장에 밑줄 긋는 사람들의 동질감은 유리벽 안에 살면서 투명비늘을 뒤집어쓰고 다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 느낌이다.
40개의 주제에 따라 소개된 그림들은 대체로 19세기이후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이 주종을 이룬다. 중세 미술이 더러 등장하기도 하고 한국 작가의 그림도 소개되지만 주로 인상주의에서 상징주의 청기사파까지의 그림을 소개한다. 미술사의 대체적인 흐름을 확인하는 책은 아니지만 다양성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각 유파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대표작도 더러 포함되어 있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는 작품들과 처음 대하는 화가들의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식상한 그림 소개 책보다는 오히려 감상의 측면에서 신선했다.
출근길 지하철의 풍경에서 시작해서 한겨울 찬 공기와 씨름해야 하는 상황까지 솔직하게 고백하는 저자의 일상은 공감대가 넓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웃의 이야기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 대한 깊은 이해가 또 하나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적절하게 교차하고 있어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만족스럽게 읽을 만한 책이다. 일상과 그림과 책이 꼴라주 된 저자만의 색깔이 분명하다. 다음에는 또 어떤 그림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해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