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살림지식총서 136
강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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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면 동생이 먼 나라로 떠난다. 내가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선택이지만 마음이 착잡하다. 본인은 새로운 기회와 도전에 고무되어 있지만 갑갑해 보인다. 그 갑갑함의 원인은 물론 복합적이다. 뉴욕대 박사 과정을 위해 떠나는 동생에게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영어를 미국에서 공부하겠다는데 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돌아오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미국에 비전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교육환경과 풍토를 감안한다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비관적인 현실 인식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지만 개인들의 노력과 뜻있는 사람들의 점진적인 의지가 모아진다고 해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모순은 고개를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중등 교육은 물론이려니와 대학에서 벌어지는 교수 임용문제와 전공과 관련된 밥그릇 문제, 학문 자체 내의 건전한 비판과 질적인 발전 측면은 거론 자체가 금기시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부 고발자나 비판자는 이 땅에서 학문과 생활을 접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명원이다. 최근 서울디지털 대학에서 교수 재임용에 탈락한 이명원 교수는 비판적 지성인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대학은 비판적 지성의 무덤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에 솔선수범해서 나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외부인이 적합하다. 아니 어쩌면 외부인은 용기가 없어도 그것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실험과 결과에서도 황우석 사태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데, 인문학 분야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교수 신문사의 강성민이 쓴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는 내용과 분량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다. 살림지식총서로 발간되기에는 내용의 깊이와 범위의 한계가 느껴진다. 굵직한 단행본으로 본격적이고 심층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내용들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나하나의 주제를 걸핥기 식으로 소개에만 그치고 있기 때문에 본격적인 논의들이 진행되지 못해 아쉬움이 많다.

스승을 비판과 전공 불가침의 법칙, 논문 형식의 실험에 이르기까지 대학 내에서 관습화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소개된 것은 저자의 말처럼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확인 작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그것들에 대한 현상을 밝히는 일은 현실에 대한 반성적 태도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알고 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사실들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다. 단순하게 대학의 교수와 제자들 사이의 문제 뿐만 아니라 학계의 오랜 관습과 형식의 틀이 제공하는 고집들을 짚어 보는 일은 미래를 위해 당연히 거쳐야 할 비판이다.

생존 인물에 대한 탐구와 진보와 보수의 문제, 김우창의 학제성, 문화와 비평에 대한 비판에 관한 글들은 새롭다기보다 지루하지만 ‘금기’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로 묶어보는데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최근들어 글쓰기에 대한 관심은 지나칠 정도로 고조되어 있다. 그만큼 글쓰기는 대중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것에 대한 허구성을 지적하는 저자의 지적 또한 적절하지만 지식 대중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글 정도로 끝나 버려 아쉬움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근대성 콤플렉스에 관한 글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는 있다.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다양성과 폭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우리 사회의 ‘금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제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닌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들만의 리그와 침묵의 카르텔이 유지되는 사회는 결코 발전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기회와 합리와 이성이 지배하는 공론의 장이라는 열린 공간만이 대학을 대학답게 만들어 줄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 이론적 틀과 미래의 아젠다를 제공해야 하는 학문의 전당에서 경직된 사고와 봉건적 인습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들을 눈감고 모른척 하고 있다면 미래는 암울하다.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의 6년간의 복직 투쟁 과정은 눈물겨웠다. 서울대에 미대를 설치한 장발 박사의 친일 행적을 비판했다는 학자적 양심이 그가 대학 교수로서 결격 사유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도 국립대에서 말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다 아는 거짓말과 모두가 인정하는 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현실적 대안과 기본적인 틀거리에 대한 고민들은 대안이 쉽지 않지만 반드시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다. 이 책이 지적하는 학계에 대한 금기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숨어 있는 ‘금기’에 대한 모든 ‘해금’이 이루어져야 한다.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는 저절로 우리들 손에 쥐어 진 적이 없다. 피와 땀과 눈물들의 결과물이다. 무임승차는 역사에 대한 반역이다. 스스로 모두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기득권과 이기적 욕망의 노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060822-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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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 - 생물학자가 진단하는 2020년 초고령 사회 SERI 연구에세이 18
최재천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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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휴가지에서 얻은 책 한 권. 청풍의 어느 콘도 TV대 밑에서 굴러 다니는 책을 가져 온 건 제목 때문이었다. 최재천의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는 책의 제목은 흥미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생물학자가 진단하는 2020년 초고령 사회’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인생의 이모작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퇴직 이후에 대비하라는 얘기다. 평균 수명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출산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노인이 많은 사회가 되어 가고 있으니 대비하라?

저자는 이 책에서 나이 50을 기준으로 인생을 이모작하라고 이야기한다. 생물학적 기준으로 보아 번식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번식 후기를 잘 준비해야 앞으로 다가올 고령 사회를 대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종족 번식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의 생명이 연장된다. 특별한 종이 되어버렸지만 자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자면 이 기나긴 인생을 현재의 정년 개념으로 살아내기는 힘들다는 이야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평범한 대한민국 사람들의 일생을 생각해보면 서글프다. 여기서 평범의 기준이 모호하기는 하지만 비율로 대다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정년에 대한 두려움은 직업의 안정성에 대한 열망과 뒤얽혀 삶의 중요한 지표이자 변수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철밥그릇으로 불리는 공무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오로지 정년 보장과 연금이라는 매력이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현실은 오히려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이기적 욕망들은 놀랄만하다. 이런 세상에 발표되는 각종 통계 지표들은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한다.

2020년이 되면 젊은이 4명이서 노인 하나를 먹여살릴 정도가 된다니. 현재 출산율이 1. 17명이라는 보도를 접한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며 좀 섬뜩할 것 같다. 고령화 사회를 넘어 고령 사회로 곧 초고령 사회로 진입이 멀지 않다는 경고는 경고에만 그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있다. 엄청난 속도로 급속하게 고령화 사회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진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대안은 쉽지 않다. 생각해 보면 한심스럽다.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는 사회. 아니 그 이전에 산아 제한을 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어린 시절 ‘둘만 나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국가가 정책적으로 인구의 증가를 막았던 시절이 그립기만 할 것이다. 각종 출산율 증가 대책을 마련해보지만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힘들다. 사회 구조적 문제를 단순히 출산율 감소에 대한 대책과 연결시킬 수는 없다. 육아에서부터 사교육비 대입 제도와 경제 문제에 이르기까지 원인을 찾자면 끝이 없다. 대책은 쉽지 않다. 단순화시키면 출산율 증가만이 고령 사회의 사회적 대책이 될 것 같지만 어불성설이다. 노인들의 복지와 삶의 질이 출산율 증가로 해결되진 않는다. 더구나 아직도 지구에는 너무 많은 인간들이 자연을 해치며 살고 있다. 민족과 국가주의를 넘어선 대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민을 확대하고 국경을 허물면 된다. 단순하지 않은 문제라고?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도 병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코앞에 닥친, 초고속으로 진행되는 고령 사회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겠지만 다양한 논의 속에 포함되어야 할 필수 요소중에 하나라고 생각된다.

50대 후반에 정년 퇴직을 하고 나머지 인생을 준비하지 않는 것은 비참하다. 그러나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전의 개념으로 열심히 일한 당신 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달라지면 인간은 적응하게 마련이다. 다만 보다 먼 안목으로 현실성 있는 대책을 세워나가야 한다. 정부 정책만의 문제도 아니고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미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댈 일이 어디 한 두가지랴.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아이들에게 오늘은 정말 어려운 시험 문제를 낼 것이라고 하자. 아이들이 모두 빙 둘러 모여 앉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리둥절한 교사에게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거든 함께 모여 문제를 해결하라는 어른들의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아이이들을 보며 교사는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경쟁과 갈등의 이기적 현실 속에서 모두 함께 다같이 잘 살아 보자고 하면, 성장이냐 분배냐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부터 별의별 분열과 의혹이 싹튼다. 보다 단순한 논리로 살아가기는 정말 힘겨운 듯싶다.

국가 차원에서 국민의 건강과 고령 사회에 대한 대책은 국민들의 합의를 얻어내지 못하는 정책으로는 성고하기 어렵다. 정부의 역할은 단지 국민들의 뜻을 모으고 어렵고 힘든 중재자의 역할에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다. 저자는 조혼예찬, 열린 이민제도, 대학의 재교육, 여성 인력의 활용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일견 옳은 말이지만 사회 구조적 모순들을 지적하고 근본 원인의 제거를 주장하는 데 까지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피상적이고 원론적인 분석과 당연한 주장들이 무리없이 전개되고 있어 많이 아쉽다.


060823-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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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정말 암흑기였나 살림지식총서 25
이경재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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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평가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아니, 평가가 궁금한 게 아니라 도대체 어떤 시대인지가 궁금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객관적 안목에 대한 답은 모두 역사 속에 숨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나간 시대에 대한 편견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잘못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 인식의 힘은 물론 교육에서 출발한다.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특정 시대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쉽게 바뀌지 않는 규정을 지어버린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바뀌거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두 번째는 시대를 관통하는 사상의 흐름이다. 여기에는 문화와 종교, 철학과 예술 등의 요소들이 포함되지만 그것을 하나로 묶어내는 위험을 무릅쓴다. 한마디로 시대를 정의하는 일은 그만큼 어렵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중세에 대한 우리들의 오래된 편견은 ‘암흑’이다. 중세는 암흑의 시대다라는 편견이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이유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일단 그렇게 외웠고 배경에 대해서 심각하고 깊이있게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이경재의 <중세는 정말 암흑기였나>라는 책은 당연한 명제에 대한 문제제기로 보인다. 하지만 그 당연한 문제제기가 논쟁적이거나 설득력있게 진행되고 있지는 못한다.

중세는 주지하다시피 종교와 철학의 문제 그리고 신과 인간의 문제로 요약된다. ‘안다’와 ‘믿는다’는 철학과 종교의 특성을 대비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또한 결합적인 문제이다. 믿기 위해 알아야 하고 그 믿음을 확신하기 위해 철학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보통 ‘암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신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당연히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부정과 비이성적 교리의 힘은 해석 당사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변의 진리 행세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종교의 이런 부정적 측면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자유와 개별적 존재로서의 존엄성을 존중받게 된 것은 중세 이후이다. 과학적, 합리적 사고가 가능하게 된 것은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모욕이며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런 시대의 특징을 우리는 ‘암흑’이라고 부른다. 물론 시대적 가치와 사상을 외면한 채 현재적 관점에서 지나간 시대를 재단한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가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쉽게 지나가버린 시대 상황을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세라는 불분명한 시대를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암흑의 시대’라고 명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시대구분조차 모호한 인문학적 시대구분을 논의의 중심에 놓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중세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역사 시대 구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전 시대와 이후 근대와의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모호한 시대구분과 성격은 지금 이 시대를 규정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어떤 시대적 특징이 곧바로 그 시대를 새롭게 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혹은 미시적 관점에서 한 시대를 바라보는 일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만 지금까지의 논의처럼 단순하게 한 마디 말로 규정 지을 수 없는 복잡성에 대해서 반성하는 태도는 바람직하다고 본다.

인류의 문화와 인간의 삶이 발전(?)하고 있다면 개인의 인권과 사상이 존중받고 이성과 합리적 사고가 존중받는 시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단순한 비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 할 새로운 가치 속에서도 중세는 분명 ‘암흑’이라는 색깔을 쉽게 벗어던지지 못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반론과 반성은 의미있는 일이지만 단순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는 호기로운 목소리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중세의 철학적 토대와 인간의 의식을 고찰한다고 해서 그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먼 미래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또 다른 의미의 ‘암흑’이라고 부를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와 생활의 방식은 인간 개개인의 인권과 행복이 어떤 형태로 비쳐질지 알 수 없다. 역사에서 객관적인 시각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보다 다양한 시선과 관점으로 시대를 바라보는 노력과 고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060828-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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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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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먼이 간파한 것처럼,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을 읽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세상이라는 방대한 책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 P. 249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여학생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직접 책을 읽는 일보다 즐거울 때가 있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재미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그렇게 책을 읽던 그 많은 사람들은 책 때문에 인생이 달라졌을까? 휘트먼의 말처럼 우리의 임무는 책이 아니라 세상을 읽는 것이다. 다만 책은 세상을 비춰보는 프리즘에 지나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한 사람의 내일이 암울해지고 인류의 미래가 어둡다고 할 수는 없다. 단순히 ‘독서’ 행위 자체가 갖는 사회적 의미는 크지 않다. 다만 책이라는 형태의 지식 전달 수단이 없었다면 현재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제 책은 너무 크고, 노력과 부피에 견줄 때 상당히 비효율적인 저장 매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책을 읽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어떻게 그리고 왜 책을 읽게 되었을까?

이 단순하지만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에 담겨 있다. 이 책은 ‘역사’라는 형식에 대해 갖기 쉬운 선입견들이 없이 형식이 자유롭기 때문에 우선 마음에 든다. 연대기 순으로 혹은 시대별로 책이나 독서와 관련된 정보들을 나열했다면 오히려 지루했을 법한 이야기들을 저자는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먼저 <독서의 역사>는 역사책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역사는 ‘독서’의 역사가 아니라 바로 ‘독서가’의 역사다. 책을 읽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역사책이라서 흥미롭다. 진흙 서판에서 비롯된 책의 역사나 여러 나라의 책의 기원들을 들추지 않고 책을 읽는 ‘행위자’를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 형식의 글들이 훨씬 더 흥미롭고 설득력을 가진다. 그렇다고 내용 자체가 단순하고 가벼운 것은 절대 아니다.

읽는 사람들이 가려 읽고 부분들을 조합해서 읽어도 얼마든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독서에 관한 역사책이다. 어느 대목을 읽어도 독립적으로 독서가에 관한 즐거운 소품이 되지만 부분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룰 때는 한 권의 역사책이 되는 보기 드문 책이다. 어떤 역사든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자료와 증거들을 들이밀며 일목 요연하게 정리해주는 채도 필요하겠지만 그저 차 한 잔의 여유와 더불어 산책을 떠나듯이 저자의 안내에 몸을 맡겨 보고 싶은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독서의 역사>는 책을 좋아하는 ‘독서가’들의 필독서라고 해도 좋을 만하다.

인류 문명의 출발점이자 종착지가 바로 책은 아닐까? 진흙 서판에서 이제는 LCD 모니터까지 책을 읽는 형태와 방법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달라졌다. e-book이 등장하면서 수천년간 지속되어온 종이책의 형태마저 달라졌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책에 대한 개념과 정의도 달라지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책이 갖는 의미와 역할까지도 한번 쯤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 바로 <독서의 역사>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책에 대한 지독한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6000년간 지속되어온 인류의 책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을 저자는 시대를 대표하는 독서가를 통해서 혹은 번역가나 검열관, 책 수집가들을 등장 시키며 독서의 역사를 풍요롭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이 다른 역사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이자 재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행복해지는 방법만큼 행복의 종류도 다양할 것이다. 가장 적은 비용과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최대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나름의 방법이 있겠지만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한 행복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사람은 알베르토 망구엘이 더듬었던 ‘독서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책에 미친 사람들과도 깊은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그것이 책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15세기 초에 "나는 어디에서든 행복을 추구하려고 노력했지만 자그마한 책과 함께하는 좁은 구석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 P. 223


060829-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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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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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립다는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춘기 시절이 떠오른다. 축제기간 시화전에 다녀갔던 여학생이 톱으로 두 동강을 내서 개칠을 해 놓은 시화 판넬 위에 노란 국화 한 다발을 걸어 놓고 돌아갔다. 열일곱의 가을이었고 세상은 온통 초록빛이었다. 남녀간의 사랑은 지금까지 태어났던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종류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마주치는 사랑은 그래서 진부하다. 아직까지 남녀간의 사랑을 읽기 위해 소설책을 뒤지는 부류는 두 종류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여중생이거나 지난 시간을 곱씹어 추억의 빈 자리를 메우고 싶어하는 중년. 더 있을까?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관한한 전문가인척 하면서도 연애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본능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가장 흔하면서도 그 많은 경우의 수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이상 심리를 발견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내 사랑의 부피와 크기에 대한 비교 심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들의 사랑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쉽게 안심이 되지 않는 나만의 그것을 위해.

오래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광고가 있었다. ‘선영아, 사랑해’라는 티저 광고는 이목을 집중시켰다. 골목길 여기 저기 나붙은 ‘선영아, 사랑해’는 이 땅의 모든 선영이들과 선영이 아닌 여성들까지도 흥분시켰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감성적 광고 기법의 하나였지만 가장 단순하면서도 선명한 ‘사랑해’라는 말은 ‘선영이’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름과 결합되어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거두었다. 김연수의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제목을 보는 순간 그 광고가 떠올랐다.

90년대 초 사회적 이념 공방이 가라앉고 방황하던 무렵 유하가 들고 나온 <바람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라는 시집이 주목받았다. 물론 내용 자체가 가볍고 덜떨어진 신인류의 삶을 표방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압구정동’이라고 하는 코드 자체가 이슈가 되었다. 동명의 영화로 감독 데뷔를 한 유하의 영화를 보러 간 기억이 새롭다. 엄정화와 홍학표 주연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향후 10년간 한국영화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유하는 실제로 10년만에 <결혼은 미친짓이다>로 재기에 성공한다. 아무튼 ‘키취세대’로 불리웠던 세대들의 사랑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는 김연수의 연애소설은 흥미롭다.

89학번과 86번 사이의 갭을 설명하는 책 뒤의 해설은 쓰레기다. 사회적 공방과 이념 대결의 골을 넘어 단순한 시간 개념으로서 3년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를 보는 관점이나 운동권을 바라보는 등장인물들의 발언 등을 앞세운 해설은 한 작가의 연애소설에 대한 지나친 오역이다. 운동에 대한 개념과 시선을 작가의 그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형적 개인들의 발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잡다한 컴퓨터 오락과 상업 광고, 만화와 싸구려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잡지들을 접하며 성장했던 70년대 신인류의 연애와 사랑 그리고 결혼 이야기를 김연수는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와 울리히 벡을 인용하는 분석적 태도가 현학적이기 보다는 빠른 호흡을 조절하고 개별적 사건을 일반화시키는 사고 과정을 이끌어 낸다.

드물게 주목할 만한 작가 김연수의 힘은 끝임없는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다. 새로운 어휘에 대한 적절한 배치와 차용, 즉 ‘쫀쫀함’과 ‘얼멍함’의 대척점에 서 있는 두 남자 광수와 진우는 선영이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삼각관계가 아니다. 사랑싸움이나 삼각관계가 이 소설의 중심 축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술자의 창조적 상징에 의한 비유들,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 사이에 놓여 있는 외로움을 포착하는 데에 나는 개인적인 관심을 두었다. 깔끔하고 담백한 말맛을 통한 유쾌함과 사려깊고 예리한 감정에 대한 분석적, 선언적 태도가 오히려 몰입에 대한 즐거움을 반감시킬 수 있지만 이 소설의 재미를 덜어 낼 수는 없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추억이 뒤얽힌, 누구나 유사 체험이 있을 듯한 평범한 이야기지만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능력은 탁월하다. 결국 동일한 이야기의 끊임없는 변종들을 우리는 새로움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면 이 소설은 김연수의 다른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충분한 매력이 있다. 영원한 사랑은 없지만 영원은 기억은 가능하다.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사랑보다 기억이 소중한 나를 발견하는 일은 서글픈 것일까?


060831-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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