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917년 붉은 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회주의는 현실이 되었다. 1991년 구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74년간 지속된 인류의 또 하나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충격은 한 국가의 패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였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국가 건설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은 실망을 넘어 사회주의 진영을 공황에 빠뜨렸다. 60년대는 물론 70년대와 80년대라는 질곡의 시대를 지나왔지만 90년대의 전망은 불투명하기만 했고 21세기에 들어서도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요원하기만 하다.

얼마 전에 읽었던 하종강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의 서평 시작부분이다. 우연하게도 조정래의 <인간연습>은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남북 분단 문제의 완결판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인류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인 ‘이념’의 문제가 그 중심에 놓여 있다. <태백산맥>과 <아리랑> 그리고 <한강>으로 이어지는 현대사를 대하소설로 일단락 지은 조정래의 <인간 연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는 외적 지향의 거대담론에서 내적 지향의 미시담론으로의 변화이다. 한국인에게 현대사의 질곡은 견뎌내기 힘든 집단적 트라우마였다. 그러나 개별적 인간에게 부여된 의미와 상처가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세부적인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인간 연습>은 작가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조정래 분단문학의 마침표로 읽어도 좋겠다. 두 번째는 사회적 관점의 이념과 역사가 아니라 개인적 관점으로의 이행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 연습>은 한 인간이 사회적 신념 속에서 겪어야했던 내면의 본질적 갈등이다. 본능과 이기적 욕망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념과 신념에 대한 질문들로 가득하다. 길이가 중요한건 아니지만, 이 소설을 장편으로 보기엔 길이도 내용도 부족하다. 단편과 장편 중간쯤 된다.

장기수 문제를 다루었던 영화 <송환>에 출현했던 노인 한 분을 떠올리며 읽었다. 현실과 소설을 중첩시키는 바보같은 방법이 통할만큼 사실적인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전향 장기수 윤혁 노인의 내면적 갈등과 방황이다. ‘사상의 조국’이었던 소련의 붕괴는 물리적 폭력에 의해, 정신이상 상태에서 전향해버린 윤혁, 박동건 두 노인에게 정신적 공황상태를 일으킨다. 더구나 북한의 굶주림에 대한 사실 확인 취재 기자에게 전해들은 후 박동건 노인은 숨을 거두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김형사의 보호감찰과 같은 방에 살았던 운동권 강민규의 도움으로 번역을 하며 살아가는 윤혁 노인은 수기를 쓰게 되고 부모없는 두 아이의 후견인 노릇을 하며 살아간다.

당과 조국을 위해 남파하던 순간의 아내의 얼굴. 그 얼굴은 윤혁 노인을 평생 따라 다닌다. 결정적인 순간에 당과 인민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는 인간적 고백이 더 아프다. 그렇다고 해서 이념과 사상에 의해 희생당한 한 인간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소설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신념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된 것 같은 시대적 변화에 충격을 받는 두 노인의 모습이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아픔으로 보일 뿐이다. 30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은 사회와 인간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어쩔 수 없이 이 사회에 적응해가야 하는 전향 장기수의 삶은 비전향 장기수의 삶보다 오히려 더 비참하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편견에 가득찬 시선들, 사회적 냉대가 어우러져 견디기 힘든 세월이 된다. 민주주의를 국가의 정체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현실과의 부조화가 아이러니하다.

조정래라는 이름만으로 의심없이 읽게 된 소설이다. 소설 자체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주제가 주는 무게와 깊이가 만만치 않다. 쉽게 답을 얻거나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기 위해 연습이 필요할까? 이 땅에서 ‘인간’으로 대접받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과연 윤혁에게는 없는 것일까? 끊임없는 회의와 질문들이 쏟아지게 하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은 우리의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고민과 합의를 묻고 있다. 통일을 위한 우리의 마음가짐과 이념적 갈등에 대한 논의는 계속 되어야 한다.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밤새워 읽으며 작가 조정래 선생님께 느꼈던 마음이 이 책에서도 여전히 식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인간의 삶,
그것은 결국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연습’이다.


06071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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