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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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소설은 거의 불가능하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이 배제된 소설은 향기 없는 꽃과 같다. 그 향기가 목적인가 아닌가가 문제일 뿐. 그래서 소설을 읽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도대체 이 시대에 사랑이라니? 아직도 영원한 사랑을 믿는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출발해서 사랑까지도 필요한 사랑을 하는 현실과 만나게 되는 일을 비참하기까지 하다. 21세기의 사랑법은 어떤 것일까?

백년 쯤 전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그 사람들에게 사랑은 어떤 것일까를 궁금해 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 오다가다 우연한 만남처럼 선별과정을 넘어선 우연을 만나면 그때 읽으면 된다. 책을 선별하고 읽고 되새기는 과정이 기계처럼 정밀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우연에 기댈 때도 있는 법이다. 일본의 근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는 그렇게 만났다.

1909년에 신문 연재 소설로 쓰여진 이 소설은 20세기 초 일본의 부유층 자제인 다이스케는 안개처럼 몽롱한 인생을 살아간다. 친구 히라오카와 그의 부인이자 대학시절 친구의 누이였던 미치요와의 사랑이 이 소설의 골격이다. 식모와 서생을 데리고 서른이 넘도록 직업도 없이 아버지에게 생활비를 얻어쓰는 주인공은 형과 형수, 조카들과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에 가끔 들러 결혼 재촉을 받기도 한다. 결혼 후 먼 지방에 살던 절친한 친구 히라오카가 다시 그를 찾아오면서 미치요와 재회한다. 이 소설의 등장 인물의 사건은 이것이 거의 전부다.

장편이 가질만한 복잡한 갈등도 사건의 번잡함도 없다. 구성이 탄탄하지도 않고 물 흐르듯 주인공의 의식과 갈등을 지루할 만큼 길게 서술하고 있다. 한국문학사에서 보면 신소설이 등장했던 개화기에 해당된다. 사건의 우연성과 감정의 과잉토로 등 유치할 정도의 사건전개를 보여주던 것에 비교하면 일본 문학의 예민한 감수성과 집중력있는 문체가 돋보인다. 질풍노도와 같았던 한국 근대사를 떠올릴 필요는 없지만 참으로 한가해 보일만큼 정적이고 차분한 소설이다.

<산시로>와 <그 후> 그리고 <문>을 묶어 나쓰메 문학의 삼부작이라고 한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동경제대 영문학 교수라는 탄탄한 사회 경제적 지위를 지닌 그가 발표한 소설은 일본 근대문학의 출발로 평가 받고 있다. 한국문학사의 <무정>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근대적 지성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여러 가지 평가와 논의는 비평가들과 학자들의 몫이고 독자의 입장에서는 일본 근대 문학의 풍경을 살펴 볼 수 있는 작품 정도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다이스케와 미치요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대화와 짙은 백합 향기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추억을 기억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며 감각적 이미지이다. 몸이 기억하는 과거는 잊을 수가 없는 법이다. 그 향기를 잊지 못하는 다이스케와 미치요의 사랑과 그것을 확인하는 방식들이 너무 더디다. 치밀하고 탄탄하지 못한 구성의 한계 때문이지만 그것이 1909년에 발표된 소설에 대한 평가의 잣대로는 적절치 않다. 후반부에, 급격하게 그리고 열정에 가까울 정도로 두 사람이 사랑만을 확인하고 제각각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들은 공감하기 어렵다. 두 사람의 사랑을 미치요의 남편과 다이스케의 가족들이 모두 알아 버린 후 형이 찾아와 경제적 지원은 물론 가족간의 절연을 선언한다. 아버지의 분노와 부모간의 의절을 전한 것은 물론이다. 직업을 구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다이스케의 눈에 비친 온통 붉은색의 세상이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인식될 것인지 ‘그 후’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진다. 긴 여운과 다양한 결말을 의도한 제목이라기보다는 나쓰메 특유의 ‘대충’ 혹은 ‘무의미’한 제목 붙이기로 볼 수 있다.

고전으로 분류된 문학의 현재적 의미는 개개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문학의 본령은 여전히 내 삶에 미치는 영향과 반성적 인식의 틀이다. 감동과 교훈이라고 하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소설의 의미를 떠나 진부한 ‘사랑’과 ‘인생’에 대한 쉼표와 같은 것이 소설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그 후>는 교양으로서가 아니라 일본 근대 문학에 대한 호기심과 당대 한량의 사랑과 인생에 대한 관심으로 읽으면 된다. 그 밖의 것들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방식으로 전달될 것이다.


060709-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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