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공중부양
이외수 지음 / 동방미디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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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로 떠오르는 꿈은 어린 시절 우리 모두가 꾸던 꿈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상에 불가능한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만 간다. 그것은 강요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스스로 깨달은 것도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거나 소망과 희망을 넘어 욕심과 욕망 사이에서 괴로움을 겪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로 돌아가 황당한 공상에 빠져 보기도 한다. 가장 흔하게 하늘을 날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날개가 있든 없든, 그 과정이 어떠하든 하늘로 날아올라 현실을 벗어나 어딘가 먼 곳으로 가버리고 싶은 공상은 어린시절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꿈은 성인이 되어서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구체적인 일에 대한 해결 방법으로 은밀한 욕망을 꿈꾼다.

  그 중에 하나가 글쓰기인 사람들을 위한 책도 이젠 제법 많이 출판되고 있다. 그 목적과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잘 맞는 것을 선택해야함은 물론이다. 이외수의 <글쓰기의 공중부양>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글쓰는 방법을 ‘공중부양’으로까지 승화(?)시키기 위한 나름의 방법과 고민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외수의 것이지 독자들이나 타인의 것으로 확장시키기엔 너무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장인정신으로 습득한 노하우를 그렇게 쉽게 타인에게 전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배우는 사람이든 가르치는 사람이든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이외수도 그 불가능의 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열심이지만 역부족이다. 설명 부족이 아니라 전이과정에서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을 메울수는 없다.

  이외수를 처음 만난 것은 20년 전쯤이다. <내 잠속에 비내는데>를 읽은 어머니의 소개로 처음 만난 이외수는 기인이었다. 평범을 거부하는 삶은 때로 위태로워 보인다. 올림픽이 열리는 해가 되어야 이발을 하고, 거지처럼 춘천에서 글을 쓰기 위해 몸부림 치던 시절과 미스 강원과 결혼한 연애사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어린 맘에 깊게 각인되었다. 이후 <꿈꾸는 식물>, <개미귀신>, <칼>, <겨울나기>등을 읽고 수필집 <말더듬이의 겨울수첩>에서 보여준 그의 감수성에 사로잡혔다. 10대 문학 소년의 감수성에 맞춤한 그의 언어는 지나치게 예리하고 깊이 영혼의 울림을 주었다. 감성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하다고 인정해버렸다. 그 시절의 인연으로 시집 <풀꽃, 술잔, 나비>, 소설 <벽오금학도>, <황금비늘>, <장외인간>, 산문우화집 <감성사전>,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외뿔> 등 그의 글들은 거의 모두 읽고 있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제자리에 머물러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답답하기 보다는 순수하다고 믿는다. 소설의 미덕과 문학성을 논하기 전에 짙은 그리움처럼, 혹은 춘천의 안개처럼 그가 떠오를 때가 있다. 물론 다분히 개인적 취향이거나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해도 그에게 진 빚은 많다.

  이외수의 글쓰기의 특징은 장르를 불문하고 대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따뜻한 감성에서 출발한다. 현실을 뛰어넘고 싶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비현실적인 몽환적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본성들을 들추어내는 일이다. 이외수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사물들 사이에 감추어진 그 영혼의 울림을 들어 보라고. 그 소리를 듣거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육안과 뇌안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꼬집는다. 심안과 영안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이 그의 주문이다. 이런 생각에서 출발한 그의 글쓰기는 누구나 공감하기 어렵지만 천진한 어린아이의 시선과 순수하다는 추상명사가 주는 일반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오랫동안 일반인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지도해온 소설가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눈높이에 맞추기 쉽다는 장점을 지닌다. 대상과 방법이 명확한 글쓰기 강좌는 오히려 명쾌하다. 철저하게 문학적인 글쓰기에 목적을 둔 이 책은 이외수가 생각하는 나름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단어의 선택과 문장의 구성, 창작 방법까지 일반론 수준에서 글쓰기 책의 구색을 갖추고 있다. 대체적으로 중 ․ 고등학생 정도의 수준이나 글쓰기의 기초를 알고 싶은 정도의 호기심 수준에서 가볍게 읽어 볼 만한 정도다.

  이외수의 특별한 글쓰기 노하우를 전수 받고 싶거나 본격적인 글쓰기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직접 ‘격외선당’을 찾아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 될 듯하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진심을 가지고 한 발짝 다가서서 보면 된다. 지속적인 노력과 열정이 있을 때 던져주는 작은 麗?하나, 방법 한 가지는 소중할 테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루한 잔소리에 불과하다. 조금 냉정하게 말한다면 이제 이런 종류의 책은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춘천교대를 중퇴했지만 남을 가르치는 일보다 온몸으로 보여주는 쪽이 훨씬 그에게 어울린다.


06031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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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전쟁 - 미래 전쟁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존 에드워즈 지음, 류동완 옮김, 김민석 감수 / 플래닛미디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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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은 전쟁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까지 유효한 이 사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발달하고 있다. 미래의 군인과 가상 전쟁을 생각할 것도 없이 현재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진화하는 전쟁>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인간에 의한 자연의 정복을 넘어 선 자리에 환경 파괴가 놓여 있듯이 살상 무기와 보다 효율적인 전쟁을 위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가능한 모든 상상을 현실로 바꾸어 나가고 있다. 그 현재적 의미를 점검해 보는 책이 바로 존 에드워즈의 <진화하는 전쟁>이다.

  ‘미래 전쟁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전쟁은 추악한 것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지는 않다. 그보다 더 추악한 것은 전쟁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부패하고 타락한 도덕심과 애국심이다. 국민은 지배자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군대에서 대포를 쏘고 총검을 휘두르는 하나의 단순한 인간 도구로 사용될 때, 전쟁으로 인해 타락하게 된다”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말로 시작한다. 이 책이 전하는 의미가 미래 전쟁에 대한 환상과 패배를 모르는 군대를 상상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세계 정복이나 끊임없는 욕망앞에 무력한 지배자에 대한 의구심과 저자의 노파심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인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간 사이의 갈등과 폭력은 단위가 씨족에서 부족으로 그리고 국가로 확장되었을 뿐 우리 인간의 역사와 전쟁의 역사는 쌍둥이처럼 같은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복잡하고 분화된 사회에 항상 내재되어 있는 폭력에 대한 유혹과 파괴에 대한 욕망, 즉 전쟁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고찰해 볼 수 있는 반면교사로 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특히 현대사회는 이미 힘의 균형이 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말에 시작된 식민지 경쟁이나 힘의 논리에 의한 세계지배는 그 목적과 효용성에 대한 의문 때문에 재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 전망은 순진하면서도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탈냉전 이후 ‘세계화’의 미명아래 벌어지고 있는 미제국주의는 한층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세계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은 ‘세계 깡패’ 국가가 된 지 오래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오래된 전쟁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진행형인 전쟁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인류라는 종족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한 파워게임인지도 모른다.

  전쟁의 목적이 승리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도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한 현대전은 인명 살상이 목적이 아니라 군사시설의 파괴와 상대방의 지휘 체계의 무력화, 정보와 통제에 의한 지배체제의 구축은 전쟁의 목적과 양상이 과거와는 판이한 양상을 보여준다. 목적이 어디에 있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인명을 최대한 보호하고 적에게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 개발된 무기체제와 의복, 정보통신, 군수 장비의 발전은 눈부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도 군사 목적으로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책은 찾아서 파괴하기라는 제목으로 전술 체계에 대해 설명을 시작해서 정보, 통신, 정찰, 재난 구조, 보건, 의학, 생명공학, 운송, 군수, 보안, 암호기술 그리고 군복과 보호 장비에 이르기까지 전쟁 수행 과정에 동원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점검하고 있다. 대부분 오늘 현재 시점에서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그 실현가능성을 점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과학기술의 발달과 전쟁이 아닌 현실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은 행간에 숨어 있다.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서 읽다보면 독자들이 생각하는, 혹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일들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책을 읽는 목적이 새로운 정보를 얻고 사고의 폭을 넓혀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높혀주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한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값을 한다. 주의할 것은 저자의 뛰어난 능력과 높은 안목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야하는 정보들 사이의 연결고리와 상상의 즐거움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전쟁이 없는 미래를 상상해 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인명 살상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전쟁 수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 진행 중인 대다수 미국의 전쟁 관련 프로젝트들의 반성적 토대다. 왜 불가능하겠는가? 2010년 실전 배치를 목적으로 진행되?있는 오브젝트 포스 워리어(0bjective Force Warrior)에 비하면 아주 간단하고 쉬운 노력만으로 가능할 지도 모른다. 철학적 반성이 필요한 종류의 책은 아니지만 미래에 대한 환상과 꿈을 전쟁으로 풀어내려는 어리석음을 미리 경계해 본다. 그것은 ‘진화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에 의한 인류의 파멸’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060316-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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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사의 라이벌 - 시대와 불화한 천재들을 통해 본 고전문학사의 지평
고미숙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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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단어 ‘라이벌rival’의 어원은 ‘강river’이다. 같은 강물을 사용하는 건너편 사람들을 이르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농경과 목축을 하던 시대에 강물은 생명과 같은 것이고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아군 아니면 적군이었다. 강을 두고 대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자연법칙을 받아 들이며 살았을 것이다.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삼국시대의 치열한 전쟁은 강의 중요성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찍이 고대 인류 문명은 모두 강에서 발원한다. 강을 차지한 자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이 라이벌이라는 단어는 ‘경쟁관계’를 전제로 한다. 서로 긴장하며 발전하는 긍정적 측면과 오로지 승부에 집착하여 상대를 공격하거나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내며 자멸하는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전문학사에서 걸출한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을 통시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라이벌 관계로 묶을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특히 비슷한, 혹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한국문학사를 관통하는 연속선상의 흐름에서 이해하는 방식보다 이렇게 스타카토로 끊어 읽는 방법은 단편적 사실과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할 수 있어 흥미로운 시도로 보인다.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함으로써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을 서로 견주어보는 일은 색다른 방법이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 입체적인 방법으로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인물의 생애와 사상이 투영된 비교문학적 관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고전문학사의 라이벌>은 삼국시대의 ‘세상과 불화한 두 천재의 갈림길’이라는 부제로 월명사와 최치원을 시작으로 ‘연행예술의 극점을 추구한 두 예술가’ 신재효와 안민영을 비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두 사람씩 묶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배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김부식과 일연, 이인로와 이규보를 비교하는 일은 당연해 보이면서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관점을 비교하거나 ‘시대의 충돌과 균열’이라는 관점으로 풀어낸 것은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특히 정도전과 권근의 비교가 극적이다.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동지에서 적으로 돌아선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은 흥미롭다. 서거정과 김시습을 비교하거나 김만중과 조성기를 비교하는 내용은 단편적인 내용의 서술과 일관된 관점이 없어 아쉽다. 그 중에서도 ‘유쾌한 노마디즘’으로 박지원을, ‘치열한 앙가주망’으로 정약용을 비교한 고미숙의 글은 가장 돋보인다. 두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문학적 성향의 차이를 정확하고 깊이있게 비교함으로써 동 시대를 살았으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더 안타깝게 만든다. 문장의 탄력과 일관된 설명 방식이 흡인력있게 전개된다.

  정출헌, 고미숙, 조현설, 김풍기 공저로 되어 있으나 고미숙, 조현설, 김풍기는 한 장씩만을 썼고 나머지 여섯 장은 정출헌의 글이다. 책으로 묶이고 보니 전체를 통괄하는 하나의 키워드나 주제가 없고 여러 사람의 공저이다 보니 문체와 문장이 고르지 못한 단점이 있다.

  하지만 색다른 방식으로 고전문학을 이해하는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평면적이고 객관적 사실들만 나열한 역사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문학으로서의 역사속 인물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얻게 된다. 우리 고전을 두루 섭렵한 사람이라면 글 읽는 재미가 배가 될 것이고,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고전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는 책이다.

  텍스트 상호성 측면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두 작품을 묶어내거나 책 두 권을 묶어보는 일은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자칫 단순한 분류 방법으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서로 유사한 속성을 묶어내는 지루한 방식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낯설게 묶거나 짐작할 수 없는 다른 방식의 비교 방법이 필요하다. 작품의 비교 뿐만 아니라 작가가 살아온 삶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문학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작품에 투영되었는지 비교하고 분석하는 즐거움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06032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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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열쇠 - 철학
박이문 지음 / 산처럼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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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사유 방식을 철학이라고 부른다면 철학에 대한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어렵고 딱딱한 그들만의 철학은 나에게 필요치 않다. 학문으로서 연구실에 박제된 철학은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용어와 개념에 대한 논리적이고 복잡한 진술들은 읽는 사람에게 중압감 내지 지적 허영으로 여겨진다.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면서도 사고의 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철학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중요하고 절실하게 필요하다.

  철학자 박이문의 <사유의 열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적절하고 요긴한 책으로 볼 수 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사유하는 인간에 대한 연구와 탐구에 전력을 다한 연륜과 깊이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하다. 적절한 언어의 선택과 개념에 대한 일관된 깊이는 현대인을 위한 철학 사전으로서 손색이 없다.

  우리 인간들 사유의 도구는 바로 언어이다. 언어의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철학이다. 인식의 틀과 사유 방식은 철학의 밑바탕이면서 동시에 완성된 하나의 학문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의사소통의 과정을 겪으며 생각을 공유하고 그 생각의 간극을 메우는 일은 철학의 중요한 역할이다. 우리는 여전히 살며 사랑하며 배우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의 기저에 철학이 존재한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쉽고 명료한 철학에 대한 어원 풀이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풀어나가야 할 나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사르트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언어’와 ‘존재’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고 그 관계를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쳐야 하는 일은 철학자의 몫이지만 그 깊이와 넓이를 확인하고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사유하는 도구를 제공하는 일은 철학의 몫이다. 앎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역할은 언어가 존재하므로 가능하다.

  언어와 사유의 문제에서 시작해서 가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에 의해 서술된 이 책은 단순한 철학 용어 사전과 구별된다. 일목요연한 연속선상에서 우리는 인류의 사상과 인식 방법에 붙여진 이름들에 대해 명징한 언어를 통해 확인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이 책은 단순한 개념과 용어에 대한 지식들의 편린이 아니라 저자 박이문의 ‘주관’에 따라 해석되고 정리된 언어들과 만나게 된다. 득과 실을 판단하고 구별해서 취사선택하는 문제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특징이다. 나는 여기에 높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하나 하나의 개념들을 두 세 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순서에 상관없이 찾아 읽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는 방식을 권한다. 본류에서 뻗어나간 지류들의 미묘한 관계들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 이후에 발간된 ‘과학’과 ‘종교’ 그리고 김성곤의 ‘문학’ 시리즈가 있지만 동일한 성과를 담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성곤 교수에 대한 믿음으로 ‘문학’편을 다음 목록에 올려 본다.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하는 ‘생명’의 계절에 삶에 대한 욕망과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인식보다 먼저 인간에 대한 성찰과 실존의 문제는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매년 반복되는 계절의 흐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 속에 내던져진 존재는 감성적 비애를 자아낸다. 개인의 존재가 사회적 존재로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을 되짚어 본다.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길잡이’라는 부제가 붙은 박이문의 <사유의 열쇠>는 인간의 ‘정체성’을 성찰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류의 지성사를 일별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 방에 들어가는 조그마한 열쇠 하나를 제공한다. 손에 잡힌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 무엇을 보고 어디에 앉아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는 물론 독자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060306-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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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고요 문학과지성 시인선 312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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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을 만큼

사진은 계속 웃고 있더구나, 이 드러낸 채.
그동안 지탱해준 내장 더 애먹이지 말고
예순 몇 해 같이 살아준 몸의 진 더 빼지 말고
슬쩍 내뺐구나! 생각을 이 한 곳으로 몰며
아들 또래들이 정신없이 고스톱 치며 살아 있는 방을 건너
빈소를 나왔다.
이팝나무가 문등(門燈)을 뒤로하고 앞을 막았다
온 가지에 참을 수 없을 만큼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밥풀을 가득 달고.
‘이것 더 먹고 가라!’
이거였니,
감각들이 온몸에서 썰물처럼 빠질 때
네 마지막으로 느끼고 본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동체(胴體) 부듯 욕정이 치밀었다.

나무 앞에서 멈칫하는 사이
너는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떤 모습으로든 우울한 날이 있듯이 어떤 자세로든 이제 인생의 황혼녘을 준비할 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황혼으로 비유된 늙음의 시간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인생은 공평하다고 주장한다. 사뭇 진지해 보이는 이 주장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거짓에도 불구하고 나이들어 죽어가는 모든 인간에게 느끼는 연민은 다를 수가 없다. 하얀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를 보고 느낀 욕정의 끄트머리. 그 환한 어둑발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다. 정년을 마친 노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의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간다. 사물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공명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이다. 한발 더 다가갈수록 소리와 의미 사이의 긴장은 풀어지고 무화된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에 침묵보다 더 큰 소리로 내면의 풍경소리 울린다. 그 울림이 실어증의 원인이 되고 침묵의 극치라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실어증은 침묵의 한 극치이니

아 이 빈자리!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누구’가
의자 하나 달랑 남기고 사라지고
오랜만에 만나 사람이
그 ‘누구’와 무척 가깝지 않았어요? 물을 때
느낌만 남는 자리.
목구멍에 잠시나마 머물게 할 무엇이 나타나지 않는....
나름대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공터만 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설명이 불가능한 순간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소리로 표현되지 않는 침묵으로 전달되는 소리.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시인의 몫이다. 황동규 시의 편력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이 또 다른 시작인지. 외로움보다 즉물적인 ‘홀로움’을 내세운 이 작품이 그를 대변한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시인의 모습에서 나이를 읽어내기 보다 세상속에 풍경처럼 펼쳐진 사물들의 모습과 맑고 조용한 시선들이 만나는 명징한 소리를 읽어낼 수 있다면 <꽃의 고요>는 비로소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

홀로움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 더디게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지독한 반어가 독자들을 화자와 동일시한다. 봄이 짧다는 진술을 이해하는 독자나 느껴본 적도 경험할 겨를도 없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짧은 생에 대한 담담한 목소리가 오히려 슬프게 들린다. 그래서 ‘더딘 슬픔’이 무섭도록 빠른, 혹은 찰나와 같은 순간적인 슬픔으로 전달된다. 꽃이 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꽃이 ‘고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사는 것이 슬프다. 침묵하는 꽃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현실이 너무 차가운지도 모른다.

더딘 슬픔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처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06032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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