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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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냉담해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긴장할 수는 있겠지만 냉담해질 수는 없다. 삶의 본질은 온기다. - P. 475

  자기 보호 본능으로 냉담을 가장해 위악을 떠는 사람이 있다. 상처받기 쉬운 영혼은 본능적으로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냉랭한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관찰한다. 긴장은 냉담으로 이어지지만 한없이 외롭고 쓸쓸하다. 인간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삶의 본질을 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온기가 바탕이 되어야 사람이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가족에서 발원한 그 온기는 타인에게 전이되고 사회와 세계로 전파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삶의 본질은 온기다!

  눈처럼 희고 눈부신 환상과 몽환의 공간쯤으로 상상되는 것이 북극의 나라들이다. 얼음과 눈의 나라로 상상할 뿐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편견과 상상은 그곳의 삶을 왜곡하기에 충분하기까지 하다. <인어공주>외에 덴마크의 어떤 작가를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그만큼 신선하지만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덴마크 북쪽 동토의 땅으로 알고 있는 그린란드는 고교 시절 지리 시간에 그 존재 사실을 확인한 이후 없는 장소와 같았다. 적어도 이 소설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작가는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소재를 취하고 호흡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이 책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북극에 관한 보고서로 읽어도 좋을 만큼 이국적이고 신선하다.

  이사야라는 한 아이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스밀라의 아이도 아니다. 그저 한 아이에 대한 애정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소설이, 아니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했는지 모른다. 호기심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자극적인 욕망이다. 알고 싶다는 스밀라의 욕망은 물론 한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인간은 현실에서도 많지 않다. 스밀라가 한 아이의 죽음에 바치는 행동은 삶에 대한 경건함이다.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왜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정해진 답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삶의 아이러니다.

  스밀라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여 온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린란드 이누이트인 어머니와 덴마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스밀라는 경계인이다. 10대 초반에 어머니가 죽자 그린란드를 떠나 덴마크에 건너오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고정된 실체를 거부한다. 결혼이나 종신직 등 안정적 삶에 대한 애착을 가져본 적이 없다. 스밀라는 아주 특별한 캐릭터다.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의 유형들이 많이 있겠지만 페터 회는 ‘조르바’처럼 현실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있어야할’ 인물 유형을 창조해낸 것이다. 독자들은 이 묘한 매력에 빠져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끝까지 놓지 못한다.

  이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보여주는 특유한 문체이다. 매력적이 소설들은 하나같이 ‘문체의 힘’을 알고 있다. 툭툭 내뱉는 듯한 말투 속에 생에 대한 통찰과 작가의 생각들이 배어 나온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기도 하고 안정과 불안에 대한 충돌이기도 하며 나와 너의 혼돈이기도 하다. 기막힌 묘사나 서정적인 분위기는 때때로 감상에 젖게 하지만 눈물에 호소하거나 억지 웃음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때로 메마른 듯 하지만 스밀라를 둘러싼 인물들이 보여주는 특이함이나 인물들간의 관계가 보여주는 냉정함은 스밀라의 생각과 행동을 오히려 빛나게 한다.

인생이 복잡해지는 것은 우리가 선택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떠밀리는 사람은 단순하게 산다. - P. 509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선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스밀라도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무엇인가 두려움 속에 갇혀 있었을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그리움에 한 없는 외로움을 속을 헤맸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인생은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했기 때문에 복잡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단순하게 산다.

  도시에서 바다로 그리고 얼음으로 공간을 이동하며 스밀라가 찾아나선 것이 단순히 이사야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열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추리 소설 형식을 띤 이 소설은 참으로 허망하게 끝을 맺는다. 정교한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방식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대립 구도라는 커다란 기본 구도를 가지고 있다. 문명과 자연 혹은 도시와 바다 그리고 인간과 얼음 등 다양한 대립 구도를 그려 볼 수 있다. 대척점에 서 있는 각각의 요소들은 유클리드나 수학이 보여주는 객관성을 벗어난 지점에 사람들의 본성과 생의 태도가 놓여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이 책은 자연을 통해 그 속내를 보여주고 있다. 단순하게 표현하기 힘든 매력이 있기 때문에 꾸준히 읽히고 나도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모르겠다.

젊었을 때는 섹스가 친밀감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섹스는 거의 시작에 미치지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 P. 517

  책을 읽다가 전체 맥락과는 무관하게 이렇게 밑줄을 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단 두 문장이지만 여러번 곱씹었다. 내가 ‘나중’에 해당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나중에 읽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문장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나중’에 대해 작가는 알려주지 않고 여운을 남긴 채 소설을 맺는다. 이렇게,

‘우리에게 말해 줘’라고 사람들은 내게 와서 말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문제를 이해하고 끝맺을 수 있잖아’라고.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끝맺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뿐이다. 결코 결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P. 619


07111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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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1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다가 전체 맥락과는 무관하게 이렇게 밑줄을 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맞아요.
그런 적 있어요.

그런데 맨 마지막 줄의 숫자는 뭔가요?
2007년 11월 18일에 올해로는 133번째 읽은 책이란 뜻인가요?
부럽군요.


sceptic 2007-11-22 09:55   좋아요 0 | URL
사람마다 그럴테죠...저도 그렇구요...손이 가는 대목은 전체 맥락과 무관할 수도 있는거겠죠...

맞습니다. 매년 일련 번호를 붙이는 버릇이 있어서...
부러워하실 만한 건 아니고요...저도 권수를 줄이든가...한곳에 집중수렴하던가 계획을 세워봐야죠...
 
일중독 벗어나기
강수돌 지음 / 메이데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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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독 - addiction. 병적 증상에 대한 의과적인 진단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우리는 환자라고 말한다. 정상이 아닌 비정상인 상태를 일컬어 병에 걸렸다고 표현한다. 미셸푸코의 <감옥의 역사>에 따르면 병원은 비정상인 미치광이들의 수용소에서 기원한다. 정상이 아닌 정신 상태나 정상이 아닌 몸의 상태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질병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다. 아프면 병원에 가고 약을 먹거나 수술을 하거나 치료를 받는다. 정상인으로 돌아오면 다시 사회로 환원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상황들이다.

  그러나 중독인데도 칭찬을 받거나 부러움을 사는 경우가 있다. 일중독이 그러하다. 일반적인 기준이 적용되기도 힘들고 병으로 분류하기 어렵기도 할 뿐만 아니라 나쁘다는 인식이 별로 없다. 탁월한 능력, 일에 대한 열정이 만들어내는 괴물같은 인간형은 이미 몸과 마음이 병들어 치유 불가능의 상태에 이른다. ‘과로사’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압축적인 고도 성장을 이룩한 한국 경제의 기저에는 어두운 그늘과 잘못된 인식들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일만 할 수 있어도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배부른 소리를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게 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도 그리 크게 개선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경제적으로 성장을 하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고민한다. 돈과 시간이 있어야 행복한 것은 아니집만 ‘여가 시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레져 산업은 미래에 각광받는 분야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쫓기듯 그리고 ‘빨리빨리’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가만히 있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 뒹굴뒹굴하면서 게으르게 보내는 것은 죄악시되었다. 과연 그러한가? 강수돌의 <일중독 벗어나기>는 이러한 통념과 편견에 대한 충고이자 학문적 고발이다.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부록으로 번역하면서 일중독에 대해 연구한 이유는 우리 사회에 대한 명확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굶어죽는 사람은 없지만 앞으로 우리의 삶이 크게 여유있게 전개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정신없이 뛰고 일하며 내일을 준비하고 전쟁같은 오늘을 보낸다. 매 시간 10건씩의 산재 사고가 나는 나라에 살면서도 이상 징후를 느끼지 못하고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뭔가 이상한 나라가 아닐까?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열심히 살자’는 말의 공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느 순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강자와 동일시’ 과정을 거치면서 멈출 수 없는, 지칠 줄 모르는 폭주 기관차가 되어 달린다. 한 번 입력된 목표는 수정되지 않고, 뚜렷한 삶의 목표(대개의 경우 물질적 부, 사회적 명예나 권력)는 인생의 목표가 되어 모두를 중독으로 만들어가고 서로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준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라고.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참으라고. 그 과정을 견뎌내야 한다고. 공부든 일이든 우리는 목숨 걸고 한다. 남들보다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며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노동력이 기업가에게 쓸모 있는 노동력인가? 그것은 신체 건강, 국어, 산수, 기술, 영어, 컴퓨터 등 노동능력이 좋아야 하고, 다음으로 성실성, 책임감, 신뢰성, 복종심, 충성심 등 노동자세의 측면이 좋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학교 교육 속에서 훈련되는데 노동 능력 측면은 졸업장과 자격증, 각종 상장 등으로, 노동자세 측면은 개근상, 정근상, 봉사상, 생활기록부 등으로 측정된다. 나아가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맹세처럼 국가와 민족에 대한 교육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배타적 민족주의나 획일적 국가주의를 체득하게 된다. 원래 다양하고 복합적인 가능성(잠재력)을 가진 한 인간이 이런 식으로 오로지 일개 ‘생산요소’로서의 쓸모있는 노동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말하는 ‘환경파괴’보다 더 무서운 ‘인간 파괴’다. 또 이러한 인간파괴가 이미 가능했기 때문에 그 환경파괴조차 쉬이 가능할 것이다. - P. 79 

  학교의 기능은 이미 순종적 노동 기계를 생산하는 것으로 충분해졌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다양한 경험, 질서와 봉사, 배려와 희생은 잊어야 한다. 획일적인 교복과 머리, 지시와 복종, 반복 숙달, 야자와 보충, 입시 지옥 등 떠오르는 것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대부분 기업에서 요구하는) 노동력을 갖춘 사람으로 길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산학협동은 그대로 학교가 기업을 위한 노동자 양성소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하겠다는 협약이 된다. 취업과 실업은 천당과 지옥 만큼이나 먼 거리에서 우리의 목을 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이제 또다른 신분이 되어 보이지 않는 사회 계층을 형성해 가고 있다.

  일중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러한 논의는 의미가 없어진다. 강수돌은 일중독의 심각성과 위험성 그리고 ‘동반중독’과 ‘2세 중독’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일중독의 특성과 유형을 나누고 이론적으로 접근한다. 역사적 근원을 살피고 가정, 학교, 군대, 직장으로 나누어 사회적 배경을 점검한 후 경험적 사례들을 보여준다. 일본, 미국, 독일과 우리나라를 비교한 4개국 비교 연구는 흥미롭다. 동양과 서양이 다르고 같은 문화권에서 서로 다른 경향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일중독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인데 저자의 대안과 주장이 미흡하다. 개인적 차원과 조직적, 사회적 차원에서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있다. 총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순한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추후에 집중적으로 그리고 심도 있게 논의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일중독을 한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의 체계적 경험과 내면적 자율성의 결핍에 따라 생기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방어’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P. 55)”라고 정의한다. 생존기계로서 기능하는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는 미래의 삶은 모든 것을 효율과 자본의 논리로 풀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변화는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논의할 수 없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교육 환경을 변화시키며 보이지 않게 우리의 삶을 쇠사슬로 묶어가고 있다.

  <‘나’부터 교육혁명>을 통해 보여주었던 저자의 관점은 변함없다. 기존 세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낯설게 바라보는 대안들이다. 정답은 없지만 변혁이 가능한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고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내재한다. 다만, 그 꿈이라는 것이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삶의 진정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욕망이나 물질적 소유욕에 불과한 것이라면 일중독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엇엔가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중독이 어떤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자기 점검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알콜이든 약물이든 일이든 혹은 사람이든지 말이다. 나는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지 돌아본다. 중독은 집착을 넘어선 병리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 책이다. 특히 사회적 비난이나 삶을 황폐화 시킨다는 자각 없이 끝을 모르고 질주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일중독이나 의존적 관계중독이나 그 끝이 외롭고 쓸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다. 헛된 꿈일까?


07111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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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11-13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중독의 가장 큰 위험요소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긍정적인 측면과 그로 인하여 자각하기까지는 모든 정신적 요소에 그 중독이 전이된 이후에나 가능하다는거군요.
오타 신고 - 3문단 3째줄 ( 분dirk -> 분야가)

sceptic 2007-11-13 22:28   좋아요 0 | URL
그나마 자각할 수 있다면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삶이 변화할 수 있다는 거죠...이 책에서 대부분 극단으로 치달았던 사례를 소개하고 있어 우울하기만 합니다. 주변에도 극구 부인하지만(본인들은 성취감이나 보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일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죠.

오타 감사합니다...^^

2007-11-14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5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5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5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6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히끄 2008-05-0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각종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 모두 방법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행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행하지 못할 때 그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라고 했지요. 이 책은 다분히 개인의 몫으로 해결의 방안을 돌리는 것 같지만 사실 책을 다 읽고 보니 내용에서 이미 개인적으로 풀 수 없다는 걸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브레히트의 '동요하는 사람에게'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sceptic 2008-05-08 23:14   좋아요 0 | URL
누군가 길을 트고...모두가 함께 꿈을 꾸고, 제자리에서 실천하고...생각해 보지만 현실에서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할 수는 없겠죠.
 
게으를 수 있는 권리 - 개정판
폴 라파르그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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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갈망한 지 오래다. 어떻게 살고 싶냐고 누가 나에게 물으면 이젠 자신 있게 대답한다. 백수로 살고 싶다고. 이 말에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라는 함의가 숨어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다는 이기적이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욕망이 숨어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누가 일하고 싶어 하는가? 일 속에서 자아를 실현하라고? <친절한 금자씨>의 발언을 패러디 하자면 “너나 일 속에서 자아실현하세요.”

  자본주의 산업구조에서 노동은 생산성을 향상 시키는 필수요소였고 그들은 노동하는 인간으로 불리워질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시작했다. 산업혁명 초기에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하루 16시간에서 18시간의 노동시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고, 아홉 살에서 열 살 먹은 아이들도 노동 현장에 투입되었다. 노동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즐거운 인생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인간을 황폐화시키고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하는 고문에 가까웠다. ‘노동기계’가 되어버린 노동운동의 역사를 혹자는 노동 시간 단축의 역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놀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만큼만 쉬는 현대인의 생활 패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시간과의 전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자기계발이라는 미명아래 몸값 - 연봉이라는 숫자로 환산되는 인간의 가치 평가 - 을 높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다. 노동 시간 이후의 회식도 근무의 연장이며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거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투자하는 노동 외적 시간도 전부 노동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일과 노동이라는 용어가 주는 뉘앙스가 다르고 의미 부여도 달라질 수 있지만 쉽게 양분해서 좋고 나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노동은 여전히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요술램프인가에 대한 반성은 이미 120여 년 전에 시작되었으니까.

  아침형 인간이나 성공하기 위한 방법 등 자기 계발에 관련된 책들의 홍소 속에서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황당하게 보일 수 있다. 1883년에 ‘모든 일을 게을리 하세. 사랑하고 한 잔 하는 일만 빼고, 그리고 한껏 게으름 피우는 일만 빼고’라고 외치는 폴 라파르그의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우리의 삶이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노동의 종류와 환경은 개선되었지만 삶의 조건은 더욱 빠르게 악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누가 자신 있게 우리가 더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시간은 금이다’라는 금언은 분명 근대로 들어서면서 생겼을 것이다. 분초 단위의 시간 관리와 테일러가 주장한 철저한 효율성 위주의 경영관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극대화를 위한 가장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요구사항이었다. 시간을 지킬 줄 알고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생산성 향상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뜨며 잠드는 순간까지 시계를 보고 또 본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정교하고 교묘한 자본의 논리와 노동중독에 쩔어 있다. 하루라도 시계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없을까. 눈이 떠지면 일어나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필요한 만큼 일하고 자고 싶은 만큼 자면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걸까.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망상이 개인과 사회에 온갖 재난을 불러 일으켜, 지난 2세기 동안 인류는 크나큰 고통을 겪어왔다. 다름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력한 열정이 바로 이러한 환상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러한 열정이 어찌나 격렬한지 한 개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한 지경에 이르렀다. - P. 14

  이렇게 도발적인 발언으로 시작된 선언문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지만 아무도 긍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우울한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밝혀주고 있다. ‘노동’의 개념 자체가 많이 변화했지만 개개인이 선택한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하지만 ‘노동’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그 선택의 폭이 넓다고는 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저자의 책이 여전히 고민의 단초들을 제공하는 것은 나태하고 게으른 삶에 대한 죄의식을 만들어 준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있는 노동하는 삶에 대한 뒤집기는 통쾌하기만 하다. 가벼운 농담거리도 아니고 치기어린 반항도 아닌,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한다.

  짧은 분량 때문에 뒷부분에는 전기적 에세이가 덧붙혀져 있다. 분량과 상관없이 강렬하고 진한 인상을 남긴 책이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 없으나 우리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 변화할 것이다. 지향점과 방향을 잃은 난파선이 아니라 등대를 바라보며 항해하는 삶은 행복할 것이다. 그 목적과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한 연습과 훈련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여 먹지도 마라. 무노동 무임금…’이라고 부르던 노래는 이제 어떻게 들어야 하나? 책과 무관한 엉뚱한 상상과 스치는 상념은 어쩔 수 없는 개인적인 버릇이다. 어쨌든 노동하지 않으면 굶어죽는다는 냉엄한 현실의 법칙으로부터 당분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처럼!


07110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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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7-11-10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치열하게 느껴지는 인식의힘 님의 꿈이 한량이었다니, 더할나위 없이 반갑습니다 ^^ (인식의힘 님과 꿈이 같을줄이야!)

sceptic 2007-11-11 14:19   좋아요 0 | URL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한 치열함은 치열함이 아니라 여유겠죠...타인과의 경쟁이나 사회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요...백수는 모두의 꿈이라고 생각해요..웬디님도 마찬가지시겠죠...^^

2007-11-10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1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독교 윤리를 비루하게 모방하고 있는 자본주의 윤리는 노동자의 육체를 저주한다. 그리고 생산자에게는 가능한 최소한의 필수품만 주고, 그들의 즐거움과 온갖 열정을 억누르며, 휴식이나 감사의 인사도 없이 계속해서 돌고 도는 기계의 일부로 남아 있는 저주 받은 운명을 살도록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 P. 10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기이한 환몽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망상이 개인과 사회에 온갖 재난을 불러 일으켜, 지난 2세기 동안 인류는 크나큰 고통을 겪어왔다. 다름 아니라 노동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격력한 열정이 바로 이러한 환상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러한 열정이 어찌나 격렬한지 한 개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생명력까지 소진한 지경에 이르렀다. - P. 14

프롤레타리아들은 매우 형이상학적인 법률가들이 꾸며낸 부르주아 혁명기의 인권선언보다 천 배는 더 고귀하고 신성한 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해야만 한다.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낮과 밤 시간은 한가로움과 축제를 위해 남겨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 P. 38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지배하면서 본성까지 타락시키고 있는 악을 뿌리 뽑아버리려면 가공할 만한 힘으로 떨쳐 일어나야 한다. 단지 자본가들의 착취의 권리만을 의미할 뿐인 ‘인권선언(Rights of Man)’ 또는 단지 불행할 수 있는 권리만을 의미할 뿐인 ‘일할 권리(Right to Work)’가 아니라 누구든 하루 세 시간 이상을 일할 수 없도록 금지하는 철의 법칙을 주조(鑄造)하기 위해 봉기해야 하는 것이다. - P. 71

영국의 기계공들은 1872년경에는 노동 시간을 9시간으로 단축시켰고, 1880년경에는 토요일을 반공휴일로 만들어 주당 52시간만 일하는 ‘영국식 주말’이 널리 확산되었다. - P.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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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 살림지식총서 293
백승욱 지음 / 살림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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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이 쉽다는 말은 아니다. 현실 정치나 사회구조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의 이론이나 이데올로기의 전파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행동으로 결집시켜 응집력있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움직여져야만 가능하다. 지속적인 노력과 각성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 진보는 개혁과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보면 과거의 어느 시점보다 나아졌다고 단언하기 어려워 보인다. 군사 독재 시절의 비민주적 압살에 비하면 행복하다고 자위할 수 있지만 삶의 질에 대한 문제와 아비투스의 대물림으로 세습적 계층 구조가 고착되고 현상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혁명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어야 하지 않을까? 중국의 사회주의는 소련을 모방한 부분이 있지만 색깔이 많이 다르다. 문화적 토대가 다르고 혁명의 과정이 달라서이기도 하겠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혁명 정신도 빛이 바래고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까 하는 관심과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는 당위 속에서 그들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백승욱의 <문화대혁명>은 이런 고민들과 함께 아직도 혁명으로부터의 거리 때문에 명확한 원인과 결과를 말하기 어려운 일들을 소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1966년 8월 8일 통과된 「문혁 16조」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건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로서 “현재 우리의 목적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와 싸워 이를 물리치고, 부르주아 계급의 반동 학술 ‘권위’를 비판하고, 부르주아 계급과 모든 착취계급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교육을 개혁하고, 문예를 개혁하고, 사회주의 경제 토대와 맞지 않는 모든 상부구조를 개혁하여, 사회주의 제도의 공고화 발전에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은 매우 복잡한 역사적 경험이기 때문에 그에 접근하는 방법이나 해석 또한 다양하다. 크게 대별하면 권력 투쟁설과 마오쩌둥의 고결한 이상과 대안적 모델을 향한 유토피아적 전망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다. 시대적 맥락 속에서 검토하면 사회주의와 당의 관계,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당의 지도를 둘러싼 갈등의 증폭이 갈등이 표출되는 방식의 핵심 쟁점이었다. 다양한 접근 방식과 해석으로 그 의미를 펼쳐 보이고 있지만 저자의 말대로 아직도 진행형의 사건으로 보는 견해도 많다. 40년이 지났지만 문화대혁명의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커다란 변혁 운동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로 혹은 변화의 계기로 기억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문화대혁명 그 후의 문제일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수많은 대립 구도와 무장 충돌이 벌어졌으면서도 제도적으로 무엇을 남겼는지 불명확하다는 것은 상징성 이상의 현실성을 갖지 못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기존의 제도적 틀 속으로 다시 포섭되었다는 것은 문화대혁명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1989년의 6.4 천안문 사건은 그것이 문화대혁명의 그림자를 보여주었다는 이유 때문에 더 이상 운동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억압되어 끝나버렸다. 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잠복기를 거쳐 결실을 맺기도 하고 불씨가 사그라지기도 한다.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와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은 단순화 시킬 수 없다.

  개혁 개방 정책으로 중요한 변곡점 위에 서 있는 중국에는 벌써 빈부격차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심각한 사회 문제들이 하나 둘씩 터져 나오고 있다. 자급자족의 국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국제화 개방화 시기에 적응할 수 있는 사회주의와 혁명의 계속성 사이에서 중국의 고민은 깊어갈 것이다. 종류가 다르지만 우리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변화와 개혁의 시기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라면 지금 무엇을 어떻게 변화 시켜야 하며,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짚어나가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 사회의 지향점이 사회의 제도적 형태적 합의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무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지금-여기에서 출발한다면 그 고민의 폭이 조금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현실을 인정하고 미래를 내다본다면 문제가 조금 쉽게 풀릴 수도 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나라에 적용하거나 대안을 모색하기는 힘들겠지만 문화대혁명이 중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변혁의 시점에 서 있다고 믿는 우리 사회를 점검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모든 반역은 정당하다(造反有理)’는 구호들이 살아 숨쉬는 혁명의 언어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071107-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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