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수필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
김용준 지음 / 범우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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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책을 선물 받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선물에 익숙치 않은 탓도 있겠지만 나와 책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어쨌든 오랜만에 책 한 권을 받아 들고 감회가 새로웠다. 김용준의 <근원수필>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근원近園은 김용준의 호를 말한다. 선부(善夫), 검려(黔驢), 우산(牛山), 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등 자신의 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책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참으로 담박하고 진솔하며 고졸한 맛이 느껴지는 글들이다. 시는 지용 소설은 태준이라 했다지만 김용준의 글은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간결하고 격조 높은 문장의 힘이 느껴진다.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고 낭랑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개성이 가장 강하게 그리고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이 수필이다. 글쓰기의 마지막 단계이며 자유스러운 만큼 부담스럽고 치우치기 쉬운 형태의 글을 ‘수필’이라 칭한다면 근원수필은 그 본령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수필을 읽지 않는 이유는 대개의 경우 자신의 사념과 소소한 일상사에 대한 단상이거나 감상적인 멋 부리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남의 글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공감하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용준의 글은 60여 년 전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된다.
분량에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결한 맛을 잃지 않으며 차고 넘치지도 않고 부족해서 미흡하지도 않다. 딱 적당하게 그 만큼만 말하는 절제의 미덕과 중국의 고전 등 해박한 지식,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따뜻한 감수성은 글을 읽는 맛의 절정을 느끼게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간다는 일의 행복과 사람과 사물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의 행복을 고스란히 간직한 김용준의 <근원수필>은 올해 놓칠 뻔 했던 귀중한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몰라서 읽지 못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새삼 깨달았고 책의 숲을 거닐며 얻게 되는 즐거움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되었다.

  2004년에 수능을 치렀던 수험생들은 언어영역에서 만났던 지문으로 기억할 것이다. 김용준의 ‘게’가 출제되었기 때문이다. 2000년에 출제되었던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가 보다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월북했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용준은 1904년에 태어나 1950년 6.25가 발발해 9월에 월북해서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내고 1967년에 세상을 등졌다. 서울대 미대가 만들어질 때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의 영향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 안타까운 또 하나의 예술가였다. 백석, 정지용, 이용악, 김기림과 같은 시인들과 이태준, 홍명희, 이기영, 박태원 등의 소설가를 만나게 된 것은 1988년 이후의 일이다. 해금 작가에 대한 관심과 조명은 이제 불과 20년이 지났을 뿐이다. 아픈 역사와 과거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작가로 나는 김용준을 기억할 것이다.

  상황 속의 존재인 인간은 글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한다. 생활 속에서 글쓰기가 보편화된 21세기에 과연 글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전범이 될 만한 모델이 필요하다.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좋은 책으로 추천할 수 있겠다.

  오늘 윤대녕의 칼럼을 읽다가 토머스 울프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에서 인용한 “더 큰 사랑을 찾기 위하여 지금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어버릴 것. 더 큰 땅을 찾기 위하여 지금 그대가 딛고 있는 땅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구절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만한 문장을 발견했다. 잃어야 얻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으며 얼마나 겸손하게 사람과 사물을 대하고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스스로에 대한 각성과 반성, 보다 깊은 사유와 성찰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항상 낮은 자세로 배우고 익히며 무엇보다도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뜨거운 열정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함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살아냈다.


071128-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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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11-2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필을 꽤 좋아하는 편이라, 반갑게 보관함에 담습니다. ^-^

sceptic 2007-11-29 23:28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추천해도 욕먹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글이야 개인적인 취향도 많이 작용하지만 저는 아주 즐겁게 읽었습니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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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전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지식인들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졌고 특수성과 보편성 측면에서 고민거리가 줄었다.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속내를 폭로하거나 까발릴 것도 없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제 지식인의 역할은 행동과 실천만 남은 것일까? 그런 논리라면 모든 지식인은 활동가나 혁명가가 되어야 하나? 직접 움직이지 않는 지식인은 정체성에 혼란이 온 것이거나 사이비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에서 사르트르가 3일간 강연했던 내용을 고스란히 살려 낸 책이 이번에 새로 발간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다. 고등학생까지 읽힐 목적으로 어려운 용어와 인용한 사람들에 대한 각주까지 상세하게 안내되어 있다. 가장 쉽고 이해하기 쉽게 펴낸 책이라고 볼 수 있지만 내용 자체의 어려움은 쉽게 희석되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친절한 해설이 따라붙지 않는 다음에야 한계가 있는 것이다.

  번역본이 보여주는 용어상의 한계는 ‘세계-내-존재, 준-의미작용, 비-지식’과 같은 철학용어는 그 자체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다. 사용된 맥락보다 먼저 개념이 잡히지 않으니 문맥 속의 의미를 잡아낼 뿐이다. 하이데거를 위시한 실존주의 철학이 성행했던 시기의 용어와 개념들은 우리의 사유 방식으로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존재’라는 개념 자체도 ‘be’동사가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개념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물론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차용되면서 발생하는 당연하고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철학적 개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거칠게 훑고 넘어가도 사실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퇴색하지 않는다. 동양사람인 일본인을 대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사르트르가 강연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롭다. 서양과 동양의 구분이 아니라 패전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우리 시각으로 보면 지독한 ‘빨갱이’였던 사르트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그 의미와 약발이 떨어지지 않는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사르트의 어법은 강경하고 거칠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그가 살아온 삶이 그러하듯이 올곧은 선비의 모습이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힘은 강연을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만큼 분명하고 단호하다. 3일간의 강연을 통해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의 기능’, ‘작가는 지식인인가?’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강연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듯이 지식인은 불안한 존재다. 지배계급(부르주아)와 피지배계급(프롤레타리아) 사이에 위치한 중간자의 입장으로 지배자의 특수성과 피지배자의 보편성을 모두 간직한 모순적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숙명이다. 결국 지배계급에 기대어 살아가 수밖에 없는 이들은 피지배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목표와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두 계급 사이의 모순과 갈등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노동자 계급의 포괄주의와 보편성은 지식의 전문성과 일치한다. 따라서 특수성에 기댄 지식인의 삶은 필연적으로 모순이 생기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이 있다. 삶의 외적 모순을 극복하고 내적인 갈등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기능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보편주의에 기초한 지식인의 전문성은 결국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했지만 소수자에 의한 다수의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다.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더욱 강력해졌으면 네트워크를 형성해가고 있다. 서서히 그 전모가 밝혀지는 검은 괴물 그룹 삼성이 그 증거이다. 산업자본은 현대 사회의 지배계급이다. 맑스주의에 기초한 사르트르의 사유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는 자본의 증식과 거대화를 예견한 듯하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르트르의 사유 방식은 거칠지만 설득력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인간은 ‘상황속의 존재’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지식인으로 자처하거나 그런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의 과연 지식인인가? 지식인의 기능에 충실한가? 더불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는 지식인인가? 지식인인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생충처럼 자본에 달라붙어 있거나 왜곡된 시선을 선전하는 사이비 지식인은 없는가? 두 눈 뜨고 지켜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며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참된 지식인을 만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작은 소망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지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07112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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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
최세진 지음 / 메이데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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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성향이 좌파이든 우파이든 많은 사람들은 현실에서 혁명을 꿈꾸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지킬 것이 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견고한 성을 만들어 나간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변하지 않고 좀 더 확고하게 기반을 다지고 싶어 한다. 이런 사람들을 기득권층 혹은 보수라고 부른다. 물론 물질적인 재산이나 권력, 명예의 높고 낮음으로 쉽게 좌우를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성향은 이것들의 소유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 아니 어쩌면 이념 때문에 그것들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 삶을 살았느냐에 따른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차이가 모든 것을 바꾼다.

  사람들은 대체로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한 자기 신념이나 이론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잘 모르거나 무관심할 수도 있다. 전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변화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지금 현재 나의 삶이 쉽게 달라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정치 따위에는 관심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절대로 욕심이 아니다. 어쩌면 너무 평범한 바람일 수도 있으니까. 세상은 바보처럼 우직한 사람들 때문에 조금씩 변화해 왔다. 그것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도 정치적 신념도 아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소박한 믿음과 그것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에 의해 변화해 온 것이다.

  엠마 골드만의 말을 인용한 최세진의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는 제목이 지나치게 강렬하다. 내용을 포괄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는 상상력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좌파적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들의 이면을 살펴보고 드러난 현상에 만족하지 않으며 본질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일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들 중 하나일 수 있다. 모르는 게 약이고 배속 편한 분들을 위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돌이킬 수 없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우며 대세를 쫓아가는 것이 편한 삶의 방식을 가진 분들게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김규항의 말대로 그런 분들은 이런 책에 손도 대지 않는다.

  혁명은 거창한 대의명분도 범접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그저 생활 속에서 조금씩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실천이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세상이 180° 뒤바뀌는 것만을 혁명이라고 배웠다. 프랑스 혁명, 동학혁명 등 성공이든 실패든 상관없이 기존의 질서와 틀을 완전히 버리고 전혀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온하고 과격하며 때론 폭력적이고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혁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다.

예전에 ‘혁명은 어느 순간 펑하고 터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의 급격한 질적 변화’는 어느 날 그렇게 급작스럽게 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이 오기를, 혹은 ‘그날’은 올 것이라고 줄기차게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그날을 위해 참고, 희생하고, 결의하고, 투쟁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며 보니까 그날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혁명은 그날부터 시작하나고 믿었던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의식의 급격한 변화가 어느 한 날에 일어날 리 없습니다. 오히려 그날은 오랜 논쟁과 투쟁, 반란의 결과물이고, 하루하루가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그 혁명은 나날이 계속되는 일상 속에 지속되는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었고,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 ‘머리말’ 중에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온 이 대목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온몸으로 부딪혀 살아온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 이 말을 전해 듣는 독자인 나는 최세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이 책은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SF라는 장르를 가지고 자본주의와 노동자의 관계를 미래의 로봇으로까지 확장시킨 소설과 영화를 소재로 풀어나가고 있다. 즐겁고 재미있는 해커들의 이야기는 ‘혁명’이라는 단어가 왜 즐거움과 연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상상력이 없으면 불가능 한 것이 혁명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해 준다. 2부에서는 바그너, 쇼스타코비치, 마야코프스키 그리고 조지오웰과 존 레논, 피카소, 미야자키 하야오 등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가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무엇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들의 삶과 예술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첨바왐바의 노래와 기행들은 대중 음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혁명은 즐거운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혹은 역사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사람들과 사연들은 우리 인간의 역사가 다름 아닌 혁명의 역사였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세상은 얼마나 변화할 수 있으며 어떻게 변해가는 가를 보여주었던 대표적인 사건은 2002년 ‘효선이와 미순이’를 위한 촛불 집회였다. 그것을 계기로 통신의 역사와 좌파적 상상력으로 이루어낸 변화들을 살펴보는 마지막 4부는 미래를 위한 제언으로 읽힌다. 인터넷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순진한 생각을 버리라는 충고로 이 책은 끝이 나지만 저자가 보여주고자 했던 세상의 감추어진 진실들과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들은 유쾌하고 즐겁게 보인다. 변화의 중심에서 혹은 고통과 억압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예술들이 미래를 위한 현실의 희생으로만 비춰지진 않는다. 내가 춤출 수 있을 만큼 즐겁고 행복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과 새로운 인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혁명이다. 체 게바라의 거친 수염이 아니라 양복쟁이의 단정한 넥타이에서 혁명은 시작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상업주의에 물든 체 게바라의 초상권 문제로 알베르또 꼬르다가 열받은 적이 있지만 평전에 붙어 사은품으로 온 목걸이를 나는 내일도 목에 걸고 출근을 해야겠다. 공짜로 얻는 체의 초상화가 그려진 목걸이를 걸고 현실 속의 혁명을 꿈꾼다면 체도 꼬르다도 이해하겠지...


07112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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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335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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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비에 젖은 낙엽만큼 처연해 보이는 것도 드물다. 심장을 태울 듯 타올랐던 붉은 단풍과 강렬한 노오란 단풍잎이 11월 겨울비에 젖어가는 저녁 어스름의 불빛들은 불행을 위장한다. 화려했던 시간들은 뒤에 두고 떠나는 아쉬움을 그나마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어둠이다. 낙화가 그러하듯이 첫사랑도 그러하다.

낙화, 첫사랑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삼십대 후반에 이른 시인의 목소리는 생의 한가운데 서 있는 위태로움과 희미한 깨달음들이 듬성듬성 뒤섞여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일반적인 시의 문법에서 조금 비켜 서 있다. 언어의 내밀한 조직들, 소리의 울림들이 잔잔하다. 어렵지 않은 단어들과 쉽게 닿는 문장들이 머리보다 먼저 가슴에 도달한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어야 한다는 엘리어트의 말에 충실하다.

  여전히 시의 존재와 기능은 위태롭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는 낡은 유물처럼 식상해져 버렸다. 언어의 기능이 살아 있는 한 시를 읽는 사람과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은 존재한다. 이분법적 구분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시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이 마음들에 여유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부대끼고 속삭이기도 하다가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통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만큼 크지 않지만 작지 않은 진동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상황과 느낌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자신만의 몫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활이든 꿈이든, 현실이든 이상이든 관계없이. 어느 구석진 계절의 끝자락을 여미는 사람들의 가슴에 오롯이 전해질 수 있는 슬픔이 있다면 그녀의 시는 조용히 다가설 수 있겠다. 내 몸속에 잠든 이가 누구이든지 간에.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앞의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을 다른 방식으로 나누어 본다. 시를 읽는 사람과 시집을 읽는 사람. 그것은 왜 다른가? 한 편의 고운 시는 유행가 가사처럼 가슴에 스몄다가 모래위에 내린 비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가슴에 낙인을 찍어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한 권의 시집은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소리 없이 조용히 흐르는 강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참을성 있게 집중해야 한다. 낮은 목소리로 평화로운 오후의 햇살을 느끼게 하다가 역사의 뒤안길에서 울부짖는 처절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다. 김선우의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는 그렇게 읽혔다. 큰 호흡과 느낌으로 한 권의 시집을 따라가다 보면 중간에 표제작을 만난다. 대표 선수를 만나 한 판 겨뤄보려는 심사가 아니라 제목으로 선택된 시의 갈피들을 조금 더 샅샅이 훑어보게 된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꽃나무

꽃이 지고
누운 꽃은 말이 없고

딱 한 마리 멧새가
몸을 튕겨가는 딱 그만한 천지

하늘 겹겹 분분하다
낮눈처럼 그렇게

꽃이 눕고
누운 꽃이

일생에 단 한 번
자기의 밑을 올려다본다


  무엇을 노래하든 그것을 읽어내는 독자는 다른 음성으로 듣는다. 시의 운명은 그러하다. 내 곁에 누가 머물러 있는지 돌아보다가 두고 온 사람의 뒷모습만 안타깝게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처럼 이미 작가에게서 떠나온 시들은 수런거리며 독자에게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읽는 것은 시가 아니라 어쩌면 내 삶과 내 마음의 갈피들인지도 모르겠다. 창 밖에 천둥이 치고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을 보여주어도 나는 어둠 속에 내리는 겨울비의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거미

새벽잠 들려는데 이마가 간질거려
사박사박 소금밭 디디듯 익숙한 느낌
더듬어보니, 그다

무거운 나를 이고 살아주는
천장의 어디쯤에
보이지 않는 실끈의 뿌리를 심은 걸까

나의 어디쯤에 발 딛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발은 魂처럼 가볍고
가벼움이 나를 흔들어
아득한 태풍이 시작되곤 하였다

내 이마를 건너가는 가여운 사랑아
오늘 밤 기꺼이 너에게 묶인다


  시인은 생활인이고 문명인이며 언어의 노예이다. 모든 존재 이유인 말들을 거미줄처럼 뱉어내야 하는 천형. 안타까움보다 더 깊은 마음으로 가끔씩만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어진다. 말해버리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너에게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나 괜찮습니다’라고.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어 창 밖 어둠 속에 눈길을 건넨다.

‘너 괜찮은 거니?’라고.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중에서



07112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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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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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원인에 따라 결과가 명확하다면 나는 인생을 좀 더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만 말이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원인이 있을까? 그걸 알면 문제가 해결되거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까? 행복은 앎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오늘도 끊임없는 의문부로로 가득한 인생을 기웃거린다.

  소설이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장르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더 어렵다. 소설 뒤에 ‘나부랭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한다. 소설 나부랭이나 읽을 시간이 있으면 다른 걸 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읽고 나서 인생이 바뀌거나 먹먹한 감동에 목이 메이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은 호기심에 대한 욕망을 주체하기 힘든 사람들의 몫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이 궁금하거든 뒷담화에 골몰하지 말고 소설을 읽으면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 중 하나일 수도 있고, 하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인물들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 소설이다. 살아 숨쉬는 활자들 속을 헤집다 보면 현실은 환상이 되고 현실은 하나의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아름다움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언어 자체가 드러내는 명징한 광휘. 이것은 보통 시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즐거움이다. 말들이 수런거리고 그 말들이 만들어내는 풍성함과 흥성스러움은 말들의 잔치이다. 소설이 전하는 즐거움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 따라 말들을 풀어놓고 조이고 다듬는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소설가 한강의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는 독자들에게 아름다움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구차한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음식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다. 거식증은 그냥 생기는 병이 아닐 것이다.

  영혜는 꿈을 꾼다. 모든 것은 꿈 때문이다. 지나치게 평범해서 아무것도 문제될 것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을 조심하라. 꿈에 드러난 메시지는 환상이며 비현실적이지만 무의식에 내재된 또 다른 욕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 문명을 가꾸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감추어진 야성과 본능적인 충동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통로가 차단된 채 길들여지고 현실에 매몰되어가는 우리들에게 영혜는 또 다른 자아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어떤 것에든 열정을 쏟고 싶지만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풍경들이 고기에 대한 거부로 표현된다. 채식만을 고집하겠다는 이데올로기나 신념이 아니라 단순히 고기와 냄새에 대한 혐오감이 생기면서 그녀는 달라진다. 잠이 줄어들고, 고기를 못 먹는 차원을 넘어 음식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거식증은 삶을 포기하겠다는 그녀의 선언처럼 들린다. 자살로 귀결되는 생의 허무주의가 아니라, 생명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진다. 정신 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통해 삶을 반성한다는 것이 기괴할 수도 있겠으나 생각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몽고반점’은 2005년에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연작은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으로 이어지는 연작의 하나였다. 세 편의 소설이 정교하게 얽혀있다. 동일한 등장인물이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혜와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 그리고 인혜의 목소리를 통해 서로 다른 소통 방식을 선택한다. 물론 이 소통은 인물들 간의 소통이기도 하지만 작가와 독자와의 소통이기도 하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고 차라리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강의 다른 소설들을 읽지 않아 그녀의 소설에 대해 속단하긴 어렵다. 쓴 것보다 써야할 것이 많은 작가라고 믿고 싶다. 후기에 썼듯이 볼펜으로 자판을 눌러가며 한 자씩 꼽씹었을 작가의 수고는 화려한 문장이 아니라 담백하고 속 깊은 영혼의 한 자락을 짚어내고 있다.

  오래된 친구와 기분 좋은 술 한 잔, 그리고 긴 수다 - 참치 살점을 들다가 문득, 영혜가 생각났었다. 그리고 또 잊어버리겠지만 그녀가 거부한 것이 고기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볼 때마다 문득 그녀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채식주의는 생명에 대한 외경과 거리가 멀다. 채식도 생명이니까.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에 굳이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채식주의자>는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심연으로부터 전해지는 고주파의 신호음과 유사한 느낌이다. 교신할 수 없다면 쉽게 다음을 이야기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도 어쩌면 끊임없이 누군가와의 교신을 시도하며 보이지 않는 신호를 보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혹은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간에 말이다.


07112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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