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갑 1957-2005 - Kim Young Gap, Photography, and Jejudo
김영갑 사진.글 / 다빈치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바하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했던 1996년 가을의 제주도가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지만 기대와 열정보다는 니힐리즘과 시니컬한 태도로 팔짱을 낀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망도 기대도 인생에 대한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참 어처구니없는 20대를 보내고 있었다. 현실은 뿌연 안개 속에서 좀체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길고도 험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나 비슷하게 시작하는 직장생활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생의 의미를 알 수 없었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모호한 상태였다. 차츰 적응하기 시작했지만 투명한 유리벽으로 둘러싸여 깊은 바다로 침잠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살아지는 건가. 삶이란 이런 것인가. 청년 실업이 극에 달한 지금의 20대라면 배부른 돼지의 푸념으로 들리겠지만 그 당시 내겐 실존의 문제였다.

  그 해 가을 제주에 갔다. 김포공항에서 날아올라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거짓말처럼 금세. 예약해둔 차량에 올라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산포에 도착했다. 이생진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꺼냈다. 해삼 한 토막을 안주 삼아 ‘눈물처럼 맑은 소주’를 마셨다. 밤바람은 차가웠고 어둠은 습관처럼 찾아왔다. 멀리 성산포를 바라보며 제주도의 껍데기만 사랑했다. 제주도의 이미지만 가슴에 담아두었다. 다음날 아침 성산포에 올라 눈이 베일 것 같이 짙푸른 바다와 수평선 너머의 그리움만 확인하고 내려왔다. 2박 3일 동안 해안 도로를 달리며 파도와 바람 갈대만 바라보았다. 철저한 고립감 속에서 내가 만난 것은 어쩌면 제주도가 아니라 나의 고독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이십대는 아직도 규정되지 않고 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은 진실일까? 그 모든 기억들은 왜곡된 것일까? <김영갑 1957~2005>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벤야민의 말대로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의 예술에 바치는 경외와 감동은 복제된 것일지도 모른다. 집집마다 들어앉아 책을 들고 김영갑의 사진에서 느끼는 감회와 정서는 제각각일 수 있겠다. 제주도에 대한 기억과 아스라한 추억들, 혹은 제주의 역사와 삶을 뼈저리게 실감한 사람들의 회한과 눈물들 그 모든 것들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사진일 수 있을까? 사진이란 무엇인가? 쓰지 않고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찍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을 나는 느끼고 있는 것일까?

  제한된 시야와 고정된 프레임 속에 담아내고 싶었던 ‘김영갑의 제주’는 무엇일까? 이 책은 그것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진집을 넘기다가 목울대가 울컥울컥했다. 형언하기 힘든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나는 보통 ‘울림’이라고 부른다. 머리가 혼란스럽거나 어지러운 상태, 이명이 들리거나 눈이 뿌옇게 보이고 아득해지는 느낌, 혹은 가슴이 따끔거리거나 뭉클거리던 덩어리가 빠져 나가는 느낌. 그것이 무엇이든 한 장 한 장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혹은 그의 글을 읽다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세밑에 사진으로 보는 제주는 10여 년 전 제주 공항을 출발하며 이제 영원히 가슴 속에만 묻어 두고 싶었던 환상의 섬을 다시 찾고 싶다는 욕심을 만들어 주었다.

내가 사진에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렬한 그 순간을 위해 같은 장소를 헤아릴 수 없이 찾아가고 또 기다렸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 아니라 대자연이 조화를 부려 내 눈앞에 삽시간에 펼쳐지는 풍경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 한 순간을 위해 보고 느끼고, 찾고 깨닫고, 기다리기를 헤아릴 수 없이 되풀이했다.
- ‘원시 오름에서 부르는 삶의 찬가’중에서

  루게릭 병으로 생을 마감하면서도 제주에 ‘두모악 갤러리’를 완성한 사진가. 그는 제주의 영혼을 들여다 본, 그것을 사진으로 남긴 최초의 예술가가 아닐까 싶다. 사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다소 역설적인 이유 때문에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김영갑은 제주의 들판과 바람과 구름과 비와 안개를 보여준다.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은 그 순간에 집착한 것은 아니었을까? 찰나에 집착하는 것도 덧없고 허무하겠지만 한 장의 순간 속에 그것을 담아내려는 노력과 처절한 몸부림은 그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사진이 무엇을 보여 줄 수 있는지 묻기 전에 사진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결코 보여줄 수 없는 수많은 주체와 객체 그리고 그것들의 관계를 묻는 사진은 어쩌면 불가능에 도전하는 어릿광대의 몸짓일지도 모른다. 보여줄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또 한 해를 맞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듯이 순간을 사진 속에 담아 둔다고 해서 사라진 시간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지나온 시간과 쌓인 세월들이 지금의 나이고 너이고 우리들이다.


07123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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