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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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관적인 독서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책이 주는 지적인 이미지와 교양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것인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고유한 무엇을 좋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니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조차 모호할 수도 있다. 책이 인간에게 주는 기능과 역할을 진부하게 나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 나갈 때마다 헤어나지 못하고 책 속으로 숨어버리거나 도피하고 싶은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새로운 책의 표지를 접어놓아야 불안하지 않은 상태는 중독이다. 알면서 고치지 못하고 누가 크게 나무라지 않으니 더욱 큰일이다. 책만 읽는 바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때때로 쓰고 싶은 헛된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나무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을 때가 오려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어려운 일은 책을 쓰는 일보다 책을 고르는 일이다. 쉽게 가자면 고전을 섭렵하면 된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맞는 말이다. 현실에 대한 해석과 고전에 대한 새로운 주석에 불과한 책들이 하루에도 수십 권씩 쏟아진다. 나무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쓰레기는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책 속에서 길을 잃고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그래도 읽는 행위를 멈출 줄 모르는 나는 활자중독증이다.

  중독의 쾌락은 느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과 같은 길고도 엽기적인 제목의 책이 내게 그런 즐거움을 준다. ‘18’을 ‘씨팔’로 읽은 것은 나의 오독인지 아니면 남경태의 의도적 오류인지 모르겠다. 남경태가 이번에는 철학에게 ‘서사구조’의 옷을 입혔다. 스토리가 있는 철학은 대중화의 또 다른 신 개발품이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쉽고 간단하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들이 어찌 보면 눈물겹기까지 하다. 철학의 대중화를 위한 몸부림에 가까운 책들 중에 독자들은 보기 좋은 몸부림을 선택하면 된다. 내게 남경태의 저작들은 보기 좋고 입에 달며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개념어 사전>이나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철학>과 같은 맥락이다. 똑같은 제품도 소비자에 따라 만족도는 다른 법이다. 내게는 아주 매력적인 제품들이었다.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독학의 한계는 극복하기 어렵다. 개별 철학자들의 주저들을 한 권씩 섭렵하기도 하지만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엮이지도 않고 퍼즐처럼 한 조각씩 제자리를 찾는 것도 아니다. 그럴 때 이 책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만하다.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가 ‘소설’의 옷을 입고 등장한 ‘서양철학사’라면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은 주제별 철학 개념 사전에 가깝다. 18개의 철학적 기본 개념들을 가지고 주체, 인식, 타자, 지식에서부터 행복, 매체, 텍스트, 언어, 사랑, 욕망, 이념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다. 기본적인 철학적 개념에서 시작해서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대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주요 개념들과 핵심 쟁점들을 선별한 후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이 열여덟개의 ‘스토리’에 있다. 14세기 수도원에서 수도원장과 수도사, 젊은 수사가 미래의 종교와 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가상 시나리오가 등장하기도 하고 저자와 편집자, 기자와 방송국 PD의 푸념이 등장하기도 한다. 연애 편지가 등장하기도 하고 일기 형식의 나레이션과 독백이 이어지기도 한다. 철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다양하고 파괴적인 형식들이지만 독자들의 깔깔한 입맛을 돋우는 진미 역할을 한다. 결코 가볍고 식상한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저자의 노력과 고민이 여실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나의 스토리가 정리되면 뒤이어 이에 대한 저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명쾌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남는다. 철학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주체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든 대상을 관찰하든 그 관계에 대한 인식론이든. 그렇다면 가치가 개입될 수밖에 없고 저자에 의해 선별되고 편집된 개념만을 전해 들어야한다는 한계가 있다. 모든 책의 한계로 치부한다면 속 편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긴 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요약정리에 있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한 명의 철학자 혹은 한 시대의 철학을 간단히 전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호기심과 궁금증 혹은 오해와 단정을 피하기 어렵다. ‘더 읽을 책’ 목록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는 했지만 갈증은 심해진다. 저자의 의도가 바로 그거였다면 대 성공이다!

  저자의 말대로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물론 생각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겠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나에 대한 주체성을 확립하고 행동으로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거창하게 접근했는지 항상 모든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행동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변했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롯이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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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인터뷰 특강 시리즈 4
진중권.정재승.정태인.하종강.아노아르 후세인.정희진.박노자.고미숙.서해성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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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존(自尊)은 자존(自存)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자존(自存)이라는 것이 쉽게 규정하기 어렵다. 인식하는 주체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자아 존중감이 형성될 수 있다. 세계 혹은 대상에 대한 나의 태도와 인식 방법이 자존심의 출발이다. 마음은 자아 정체성과 주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사물에 대한 인식 태도는 타자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만든다. 결국 자존심은 타자와 세계가 나를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반대의 경우 우리의 삶은 불안해지고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험해진다. 내가 삶을 이끌지 못하고 생각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한 개인을 나타내는 정체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와 불화하며 자존심을 지켜나간 사람들은 존경을 받는다. 신영복의 말처럼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는 우직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이기적 욕망을 이겨낸 사람들의 고뇌 앞에 우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시대를 고민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척하는 정치인들의 혐오스런 모습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과 사소하고 당당한 실천만이 조금 더 살만 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싶다.

  진중권, 정재승, 정태인, 하종강, 아노아르 후세인, 정희진, 박노자, 고미숙 등 8명의 이야기를 들으며 올 한해도 저물어 간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2004년부터 매년 봄 특강을 하고 그해 가을이나 겨울에 책으로 묶어낸다. 2004년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2005년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2006년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을 주제로 삼았고 올해는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으로 특강이 이루어졌다. 매년 이 책들을 읽으며 내년 봄에는 특강을 듣고 싶다는 생각만 4년째 하고 있다. 물리적인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내년에도 책을 기다려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존심’이라는 키워드로 인문, 사회, 과학, 여성, 노동, 역사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 혹은 지식인이라 명명될 만한 사람들이다. 활자라는 형식으로 읽어야 하지만 강연을 듣는 것 같은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책이다. 특강이 이루어지고 청중과의 질의응답으로 마무리되는 형식은 예년과 같다. 인위적인 시대구분이지만 21세기도 이제 7년이 지나간다. 20세기와 다른 세기를 살아간다는 특별함이 느껴지진 않지만 세상의 변화 속도는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근대화 이후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슷한 속도감을 경험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쉽게 적응하거나 대처하지 못하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무엇이 잘못되어가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거나 알아도 고치려하지 않고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거 내 이익에 반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외면한다. 이기적 욕망을 자존심으로 착각하거나 자본과 권력의 부당한 침해를 알지 못하거나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채 오로지 자신의 사회 경제적 지위만을 지켜나가는 자존심이 가능할까.

  다른 책을 통해서 한두 번 이상 만났던 사람들이지만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또 강연이라는 형식을 통해 듣는 이야기는 새롭다. 진중권, 정재승, 정태인, 고미숙 등 처음 이 특강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선했고 각자의 분야에서 ‘자존심’이라는 주제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결코 쉽지 않은 주제였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 나갔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자세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특강을 찾아 들으러 가는 사람들보다 듣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진중권의 말대로 진짜 자존심은 자기가 자신을 존중하고 자기 삶을 배려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나와 내게 돌아올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존심은 이미 자신을 버린 것이다. 주변을 돌아본다.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배가 불러야만 자존심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자신을 지켜나가는 방법이 다르다. 하지만 자존심까지 각자 다른 모양과 색깔로 규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없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질 것 같아 용기를 내어 보거나 행동에 옮기다가 고민에 빠지는 일이 많다. 왜 나만 이러나, 내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좀 더 쉽고 편한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좋은 사람, 문안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왜 어렵겠는가.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불편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하종강의 ‘부채감’은 자신의 선택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인식하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 ‘부채감’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해결되지 않을 괴리감 때문에 고민할 정도의 나이는 지났지만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타인과의 관계와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은 양립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상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 접점을 찾는 문제가 내게는 가장 힘들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일보다 보다 먼 미래와 삶의 가치와 목표를 설정하며 고민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이 아니다.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일들이지만 나와 한발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문제들에도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책에서는 나와 직접적인 혹은 조금 떨어져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행동을 바꿔야 하는 이유와 고민들을 풀어내고 있다. 귀 기울여 보면 많은 화두가 던져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항상 아주 작은 고민에서 출발한다. 나의 자존심은 내가 지켜나갈 수밖에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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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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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버지가 결혼도 하시기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늦은 결혼 탓도 있겠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나의 아쉬움은 나이 들면서 커져만 간다. 그 분들에 대한 추억도 없고 기억도 없다. 외할아버지는 자주 뵙지 못하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돌아가셨고 결코 살갑지 않았던 외할머니는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외삼촌과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개인적으로 가족의 울타리와 그 안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을 되짚어 보게 하는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는 여성과 가족에 관한 소설이다. 그것도 중년을 넘긴 아낙들의 이야기다. 여성 중심이며 가족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범위에서 벌어지는 일상사의 보고서에 가까울만큼 친근하고 세심하다. 그 마음의 갈피갈피를 잡아내고 표현해내는 솜씨는 오랜 시간 동안 공력을 쏟아본 소설가의 내공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박완서의 소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위적 허구의 세계를 뛰어 넘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의 세계와 일상사를 샅샅이 훑어내는 입담은 글말보다 구전문학에 가깝다. 구수하고 정겹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옛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막힘없는 솜씨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불편하거나 작위적인 느낌이 없다는 것은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다. 독자의 취향과 소설에 대한 편견으로 읽는 재미와 감각이 조금씩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21세기의 화두를 환경과 여성이라고 했던 이윤기와 최열의 대담이 생각난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의 그림자에 대해. 항상 물과 공기처럼 불편을 최소하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세심하게 살펴주는 그들의 손길의 고마움과 섬세한 마음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딸과 아내,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름으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시선은 따스하다.

  작가의 개인적 이력이나 늦은 등단에 대한 관심들이 작품 세계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소설집을 내는 모습은 분명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며 소설가로서 영광스런 일이다. 꾸준한 독자와 작품 세계에 대한 자신감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박완서의 소설은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과 빈틈없는 관찰로 빚어내는 천의무봉처럼 물흐르듯 자연스런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긴장과 건너기 힘든 깊은 골짜기들을 상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또 그것을 억지스런 설정이나 상황이 아니라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서술하듯이 막힘이 없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치 그런 느낌으로 읽히는 단편들이다.

  철저하게 1인칭 여성 화자의 입장에서 남편과 아들과 며느리와 손주들과 주변의 친구들을 대상으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대단히 사적인 영역에 머문다. 사회적 환경과 인물들로 대표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화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특수한 관계로 보기에는 어딘지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박완서 소설이 가지고 있는 힘이 아닐까 싶다.

  이제 어쩌면 그녀의 소설집을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랍 문화권에서 판매 금지 처분을 받은 마르케스의 <슬픈 창녀들의 추억>처럼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을 관조하는, 하지만 자유로운 작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안목과 사고의 폭이 지니는 한계는 어느 작가에게나 작용한다. 박완서도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한계는 있다. 하지만 나처럼 그의 소설을 어머니를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다. 친구와 마을 문고 책장 한쪽 벽면 먼저 읽기 내기를 했다는 어머니의 추억도 박완서의 그것들과 유사한 점이 많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 남자네 집’과 같은 추억은 없었을까. 촛불 밝힌 식탁의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셨을 텐데.  상황과 입장은 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에서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체험을 객관화시키고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9편의 단편은 실버 세대의 문학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한 작품들이다. 후반생에 대한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일상들과 고민들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다. 어차피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단면들은 시대와 나이를 불문하고 그 순간에는 가장 격렬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도 없는 노년의 내 모습과 고민들은 어떤 것들일 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순간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인생사에 대한 깊은 성찰도 반성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저 나와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나의 주체성에 대한 고민만이 오롯이 남겨지는 것은 멀리 혹은 가까이, 넓게 혹은 좁게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이 책을 들고 가야겠다. 어머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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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5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경미 옮김 / 책세상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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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행복 시대를 내건 정동영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국가가 가족의 행복을 책임지겠다는 발상이 재미있다. 이 슬로건에는 일자리 창출이나 가정 경제에 국한된 문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지만 돈만 있으면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발상이 위험해 보이기도 하다. 물론 오로지 ‘돈’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공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단순하게 접근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함의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9세기에 바라본 결혼과 가족은 어떤 의미였을지 잘 살펴 볼 수 있는 책이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다. ‘책세상’의 고전시리즈로 나온 이 책은 모건의 <고대사회>에 대한 엥겔스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결혼과 가족의 형태가 어떤 변화 과정을 거쳤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최소 단위가 가족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개인이 최초로 관계 맺는 사회는 가족이다. 엥겔스는 국가의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 최소 단위에 먼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 책은 전문을 번역한 책이 아니라 전체 9장 중에서 1장과 2장만을 싣고 있다. 3장부터 9장까지는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지만 제한된 분량과 시리즈의 특성을 감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전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는 역사와 사회, 문화와 사상을 주유하는 일은 단순한 산책으로 여겨 즐겁기도 하지만 점점 복잡해지는 미로와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군혼 형태를 띤 혈연 가족은 원시 사회가 보여준 인류 최초의 결혼과 가족 제도의 모습이었다. 부모 자식 혹은 형제 자매 간의 성교 금지에서 출발한 푸날루아 가족과 대우혼을 거쳐 일부일처제로 정착하기까지 인류의 성의 역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로 변모해왔다. 여성 중심의 모계 사회가 주류를 이루었고 자녀에게 재산 상속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시대에 비하면 결혼의 역사는 남성 권력의 강화와 여성 권위가 뒤바뀌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확고하게 굳어있는 가부장제와 차별적 시선들은 결혼과 가족제도의 왜곡된 변형 그리고 사유 재산 제도의 변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18세기 계몽주의에서 물려받은 지극히 불합리한 관념 가운데 하나는 사회 발전의 초기에 여성이 남성의 노예였다는 점이다. 모든 야만인 그리고 낮은 단계와 중간 단계의 미개인, 부분적으로는 높은 단계의 미개인들의 경우에도 여성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존경받는 지위에 있었다. - P. 77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노동 해방을 꿈꾸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각은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도 공유했다. 사회 발전 초기에 여성이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존재였는지 따져보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여성의 모습이다. 일부일처제가 오로지 여자에게만 해당될 뿐이라는 인식은 엥겔스의 결혼과 여성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삶에서도 엥겔스는 부르주아적 일부일처제를 혐오했고 가족을 만들지도 않았으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는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웅변보다 감동적인 실천이 무엇인가를 선언하듯 죽었다. 우리가 흔히 시대정신(Zeitgeist)이라고 말하는 것이 있다. 엥겔스가 살아가던 시대의 시대정신은 ‘혁명 정신’이었을 것이다. 사회의 변혁과 혼란 속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온몸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기도 했으며 좌절과 실패를 맛보기도 했지만 그들의 실천적 노력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혼과 가족 제도에 대한 견해와 그의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일부일처제와 나란히 노예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 즉 남자의 처분에 맡겨진 젋고 아름다운 여자 노예가 존재한다는 점이 애초부터 일부일처제가 오로지 여자에게만 해당될 뿐, 남자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부일처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특성을 보인다. - P. 98

  군혼에 비해 단혼이 가지는 이익과 행복은 절반의 것이다.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단혼은 최초의 계급적 억압을 초래했으며 노예제와 사적 소유와 함께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불합리한 제도라는 것이 엥겔스의 인식이다. 모든 진보는 상대적 퇴보이며 한쪽의 발전과 행복은 다른 쪽의 고통과 억압이라는 말은 지금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것 같아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 대립은 단혼에서 남편과 아내의 적대의 발전과 일치하고,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과 일치한다. 단혼은 위대한 역사적 진보 중 하나지만, 동시에 노예제나 사적 소유와 함께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즉 모든 진보가 동시에 상대적 퇴보이며 한쪽의 행복과 발전이 다른 쪽의 고통과 억압으로 관철되는 시대를 열었다. - P. 102


07120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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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세상에 홀리다 - 신화, 종교, 과학에 얽힌 시각적 경이로움의 역사
줄리언 스팰딩 지음, 김병화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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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의식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은 보는 것(seeing)이다. 시각적 정보에 의해 모든 사건과 사물들이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결정되며 그 시선은 간단하지 않은 우리들의 의식구조와 인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본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고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시각적 정보를 통해 우리는 세상과 만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1차적이고 즉자적인 정보는 오로지 시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감각들의 중요성이 덜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식의 차원에서 본다면 언어의 사용을 위한 청각보다도 우선적이다. 머릿속에 갈무리 되지 않은 언어의 개념은 무용하다. 기표(記表·Signifiant)는 기의(記意·signifie)를 전제로하는데 기표는 감각적 이미지의 재현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은 시각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당연한 진술이 나온다. 줄리언 스팰딩은 예술을 봄(seeing)으로부터 출발한다. <미술, 세상을 홀리다>는 출판사의 책 제목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지만 책 내용을 그다지 잘 담아내지도 못했고, 진부한 방식의 답습으로 강한 인상도 흡인력 있는 문구도 제시하지 못한 채 밋밋하게 ‘○○, ○○하다’는 제목이 주는 안정감에 편승하고 있어 조금 아쉽다. 번역서의 제목은 책의 이미지와 판매부수에 결정적인 요소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고민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제목을 시비 거는 이유는 훌륭한 내용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의 다른 표현이다.

  이 책은 다른 미술관련 책들과 많이 다르다. 우선 미술사를 표방하고 있지만 연대기적 서술이나 유파별 혹은 작가별 서술은 찾아볼 수가 없다. 미술사를 통찰하는 유일한 기준은 ‘경이로움(wonder)’이다. 책의 원제가 ‘경이로움의 예술(Art of Wonder): 보는 행위의 역사(A History of Seeing)’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국의 큐레이터이자 미술사가인 저자는 미술에 대한 또 하나의 접근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에 의한 미술과의 만남은 1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접근이다. 보는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수많은 미술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자리에 독자들은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눈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는 프랑스 소설가 마르셸 프루스트의 말로 시작되는 이 책은 미술 뿐만 아니라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여행의 중요성은 장소가 아니라 동행하는 사람인 것과 같이 무언가 깨달음과 각성이 필요하다면 새로운 풍경을 쫓을 것이 아니라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는 전언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한 오해와 관심은 사실 편견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없지만 보이는 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seeing) 자체에서, 우리 눈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과정에서 또다시 놀라운 것이 발견될 것이다. 사적 경험의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세계는 지금까지 사실관계만을 따지는 과학적 탐구 분야에서 오랫동안 배제되어 왔지만, 이제는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예술가가 활동할 풍요롭고 다채로운 사냥터이다. 의식, 죽음의 인식, 예술 제작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 있고, 이러한 연관성이 바로 우리와 다른 생물, 심지어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네안데르탈인과의 차이일 수도 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지평선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 경험의 핵심적 본질인 감정과 생각은 그 지평선에서 다시 한 번 경이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결국은 우리 눈에 별이 있는지도 모른다. - P. 315

  예술의 발생과 기원으로부터 출발해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적 표현과 흐름들을 재미있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저자의 노력은 책 곳곳에 배어있다. 우선 책날개 부분을 활용한 삽화들과 사진들은 낯선 작품과 애매한 느낌을 즉각 해소시켜 주는 시각 자료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다. 본문에 삽입된 그림이나 사진 자료는 물론이지만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크기와 편집을 통해 적절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배열하고 있어 가독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장점을 지니고 있다.

  과학과 종교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특히 서양 예술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신화의 시대부터 종교의 세기 그리고 과학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와 예술적 경향들 그리고 작가들의 노력이 작품을 통해 제시된다.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저자는 해박한 지식과 인문학적 배경으로 예술과 역사 그리고 색다른 예술의 세계를 소개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부한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은 미술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별과 태양과 달, 탄생과 죽음, 빛과 어둠 등 주제별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묶이면서 전체가 미술사 전체를 조망하도록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계획한다고 해서 아무나 쓸 수 없는 책임은 물론이다. 일견 부럽기도 하고 번역서가 가지는 다소 딱딱하고 건조한 문장이 가지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는 책이다. 어쨌든 대중적인 미술사로 이만한 책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책을 번역한 김병화가 인용한 마티스의 말을 다시 한 번 음미하며 책장을 덮는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후천적인 습관에 따라 다소 왜곡된다. 이런 현상은 영화 포스터와 잡지들이 온갖 틀에 박힌 이미지를 쏟아 내는 오늘날 더욱 자명해 보인다. 편견이 마음을 오염하든 이런 이미지는 눈을 오염한다. 왜곡 없이 사물을 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는 모든 대상을 항상 처음 보듯 대해야 하는 화가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어린아이와 똑 같은 눈으로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능력이 없으면 자신을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형태로 표현할 수 없다.” - P. 321(마티스)


07120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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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2-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도서로 보관해 놓은지 좀 되었는데...언제 읽게 될런지.^^

sceptic 2007-12-04 09:03   좋아요 0 | URL
묵혀 두었다가 마음의 여유가 생기실 때 읽어보셔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