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6시 창비시선 282
이재무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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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는 삶이다. 가장 고급한 예술 장르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며 반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호흡이다. 지천명知天命에 들어선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과 삶의 숨결들은 그대로 생생한 언어로 되살아난다. 시를 칼을 빼들고 언어의 탄환을 장전한 시인은 삭막한 시대현실과 부대끼는 사람들의 고통과 한숨을 겨냥해 날카롭고 절절한 목소리를 토해낸다. 한 시대가 가고 세월은 흘렀으며 또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시인은 시라는 창을 통해 또 다른 풍경과 새로운 깨달음과 삶에 대한 통찰을 적는다.

  정치적 현실이 변했고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간다.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문화와 세계관으로 무장한 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질곡의 현실과 ‘나’를 둘러싼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시인의 내면 풍경에는 여전히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가끔 ‘마량에 가면’ ‘좋겠다’는 희망과 소박한 꿈을 꾼다. 그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뜻도 모르는’ 인생에 대한 회한이며 긍정이며 낙관인 지도 모른다.

좋겠다, 마량에 가면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마지막으로 거덜 내고 싶은 인생이 ‘웃음’으로 마무리 될 만큼 우리들 인생에는 사랑과 웃음이 중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남루한 생의 저물녘에 마주하는 ‘나’의 모습과 과거의 기억 속에는 늘 따스한 미풍이 분다. 상처받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그것도 결국 사랑으로 인한 상처일 뿐이다. 시인에게 세상은 이제 무덤과 어둠과 그늘일 뿐일 수 있다. 비극적 인식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시라는 장르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버텨 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과 남은 시간에 대한 추동력은 어둠 속에 묻힌 작은 불빛과 아름다운 추억과 생명에 대한 외경에서 비롯된다. 이재무의 시를 오독한 것이 아니라면 부조리한 현실과 석양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생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통찰과 섬세한 감각들은 열정과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그 여자

만날 때마다 몸과 마음

숯불 위에 놓인 번철처럼 뜨겁게 달구어놓는

그 여자 빼어난 미모가 차라리 슬퍼 보이는,

도발 안쪽에 감추어진 가련함을,

구멍 속으로 기어드는 구렁이같이

무논 속으로 뛰어드는 개구리같이

사랑했네 하지만 그 수려한 미색 속에는

호랑이 날카로운 발톱의 마음도 살고 있어

사랑이 클수록 상처도 컸네

그녀를 사랑하는 일 수만평 진흙밭

새구두 신고 걷는 일처럼 벅찬 일이었네

신은 여자에게 지색을 주고 요철 심한

생의 굴곡 안겨주었네

사랑은 불행까지 품어주는 일

나, 오랫동안 그녀를 앓아야 하네


  그러다 문득 도시 한가운데서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이 시집의 표제작이 된 ‘저녁 6시’는 냄새를 통해 생의 감각을 되살린다. 생물학적 공복감의 근원은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먹기 위해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살기 위해 먹어야만 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도심 한복판 저녁 6시에 마주하는 냄새를 통해 확인된다. 때로는 ‘치명적인 독’일 될 수도 있는 본능적 욕망의 범람을 경험한다.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냄새는 현대인들의 욕망이며 신산스런 삶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냄새의 숲속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은 처량하기 보다는 안타까움이며 두려움이고 우울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시인은 일상의 감각과 생활의 패턴들을 ‘냄새의 감옥’으로 표현한다. 비아냥거리는 냉소가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내밀한 고백이다.

저녁 6시

저녁이 오면 도시는 냄새의 감옥이 된다
인사동이나 청진동, 충무로, 신림동,
청량리, 영등포 역전이나 신촌 뒷골목
저녁의 통로를 걸어가보라
떼지어 몰려오고 떼지어 몰려가는
냄새의 폭주족
그들의 성정 몹시 사나워서
날선 입고 손톱으로
행인의 얼굴 할퀴고 공복을 차고
목덜미 물었다 뱉는다
냄새는 홀로 있을 때 은근하여
향기도 맛도 그윽해지는 것을,
냄새가 냄새를 만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다보면
때로 치명적인 독
저녁 6시, 나는 마비된 감각으로
냄새의 숲 사이를 비틀비틀 걸어간다.


  ‘냄새’로 시작된 ‘공복’은 ‘가난’으로 이어진다. 그 개념이 달라진 시대를 반영한 아래 시는 자본의 물결과 신자유주의 시대 한복판에 알몸으로 서 있는 ‘가난’을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는 반복적인 표현으로 강조한다. 이제 가난은 죄이며 악이며 부정이다. 더 이상 생을 긍정하지 못하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가난에는 아무 의미도 희망도 낙관도 없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고 반문하던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는 이제 철지난 유행가가 되어 버렸다. 가난하면 외로움도 두려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허용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이 시대의 가난은 과연 어떤 것인가?

가난에 대하여

선과 악의 기준이 사라진,
오직 미추만이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에
성자였던, 생을 긍정하던 가난은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산개되어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가난은
다만 무력할 뿐이어서 크게 울지도 못한다
가난이 힘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뭉쳐서 무기가 되고 전망이 되던 날이 있었다
떼지어 살고 있어서 쉽게 눈에 띄던 시절
가난은 단연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가난은 저마다 무력한 개인이 되어
모래알로 흩어졌다 지하로 잠적해버렸다
눈에 띄지 않는 가난에 대하여
누가 관심과 애정을 보일 것인가
생활의 중증장애자, 구차한 천덕꾸러기 되어
몰매 맞는 가련한 왕따,
가난은 이제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시인의 마지막 희망은 ‘젊은 꽃’으로 상징된다. 노인의 피부에 검버섯이라는 저승꽃이 피는 것은 ‘누구에게나 밀려드는 시간의 밀물’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생의 진리와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겸허하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된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처럼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꽃을 피우겠다는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젊은 꽃’이 시집의 마지막에 놓여 있는 것일까?

젊은 꽃

때 되면 누구에나 밀려드는 시간의 밀물
그 또한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물에 잠긴 자리마다 검게 죽어가는 피부
지나온 생의 무늬는 목까지 차오른다
하루의 팔할을 사색으로 보내는 그,
긴 항해 마치고 돌아온 목선처럼 지쳐 있지만
바깥으로 드리운 그늘까지 늙은 것은 아니다
주름 많은 몸이라 해서 왜 욕망이 없겠는가
봄이면 마대자루 같은 그의 몸에도 연초록
희망이 돋고 가을이면 붉게 물드는 그리움으로
깡마른 몸 더욱 마르는 것을,
늙은 나무가 피우는 저 둥글고 환한 꽃
찾아와 붐비는 나비와 벌 들을 보라
검은 피부에도 가끔은 꽃물이 든다


080114-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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