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케이스 스타노비치Keith Stanovich가 지적했듯, 여자는 투표를 할 수 없고 흑인은 읽는 법을 배울 수 없다는 것도 150년 전에는 상식에 속하는 문제였다. - P. 43

미디어의 맹폭격을 잘 견뎌내려면 항상 자신의 사고를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한다. 사고에 오류가 없으면 이런 보도 내용에 휘둘릴 위험성도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요한 원인은 일화적인 증거에 의지하는 우리의 성향에 있다. - P. 49

연구 결과 우리는 통계수치보다 이야기에 더 의존한다고 한다. - P. 51

사고방식은 믿음에, 믿음은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내세울 만한 증거가 없을 경우, 믿음은 틀릴 가능성이 더 많다. 그리고 잘못된 믿음을 토대로 결정을 내리면, 결정도 잘못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러므로 믿음을 형성하고 결정을 내릴 때는 비판적인 사고력을 강도 높게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 P. 74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주의자를 모든 것에서 흠집만 찾으려는 냉소적인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회의주의자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 회의주의자는 어떤 주장을 믿기 전에 그 증거를 평가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일 뿐이다. 회의주의는 하나의 방법이지 태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 P. 75

인간은 원인을 찾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 인간에게는 세계 속에서 일정한 양상을 발견하려는 천부적인 욕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원인을 발견한 이들은 진화의 과정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할 수 있었다. - P. 132

우리에게는 믿음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강력한 욕구가 있다. 세계가 우리의 믿음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확인할수록, 우리 믿음이 진실이라는 생각도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 P. 162

우리 믿음은 소유물과 같다. 우리가 물건을 사는 이유는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음을 간직하는 이유는 흔히 이 믿음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 때문이 아니라, 이 믿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잘못된 믿음으로 인도하는 편향적인 인식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이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1) 이 믿음이 진실이기를 바라는가?
2) 이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가?
3) 이런 바람과 기대가 없다면, 이 일을 다르게 인식할까?

그렇다는 답이 나왔다면,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해석하는 방식에 당신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P. 179

우리는 흔히 상관관계를 잘못 파악하며, 이런 오류로 건강은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대가를 치른다. 그런데도 상관관계가 있으리라는 기대나 바람으로, 있지도 않은 상관관계를 믿을 때가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런 바람과 기대가 세계를 인식하고 평가하는 방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P. 202

“혼돈 이론과 복합성 이론은 미래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것임을 말해 준다. 이는 우리 경제와 주식 시장, 제품가격, 날씨,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개체 수, 이외의 여러 가지 다른 현상들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본질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 P. 240

우리에게는 확인을 받으려는 타고난 성향이 있다. 기존의 믿음과 기대를 지지해 주는 정보에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는 말이다. - P. 244

실제로 면접을 통한 주관적인 평가는 해로울 수 있다. 신뢰성과 타당성이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 결과를 봐도, 면접관의 주관적인 평가는 지원자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훌륭한 지표가 될 수 없으며, 면접관들의 평가도 서로 엇갈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 P. 311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처럼,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과정도 구성적이다. 암시적이고 유도적인 질문들이 기억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조합해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다. 또 인식작용의 경우처럼 자신의 바람이나 기대에 따라 다른 기억을 끄집어낸다. - P. 343

집단이 개인보다 뛰어나지만, 집단 안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는 혼자 일할 때 집단보다 더욱 훌륭한 성과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 P. 371

우리가 믿음을 원하는 이유는 삶에서 확실성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아주 복합적이고 예측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흑백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편이 더 편해도,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는 편이 더 마음 편해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점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 P. 377

심리학자 톰 길로비치의 말처럼, “우리를 곤란에 빠뜨리는 것은, 흔히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인 것이다. - P.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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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 선언 -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
고병권.이진경 지음 / 교양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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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발생 이후 가장 완벽한 사회 체제에 대한 고민은 계속된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이상적 세계로 그려냈지만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홍길동은 ‘율도국’을 허생은 ‘빈섬’을 실험했으나 소설 속의 환상의 섬들일 뿐이다. 인류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고 그 꿈은 영원히 실현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철학자나 경제학자 혹은 문화인류학자나 사회학자에게 그 원인을 묻는다면 제각각 다른 대답을 내놓을 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으로 인한 살육과 침략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부조리한 현실과 모순된 세상을 위해 인간은 신을 창조했지만 그 분도 아직 우리에게 해답을 주거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 같다.

  21세기에 등장한 <코뮨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연구 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과 이진경의 이름을 빌려 쓴 이 책은 발칙하고 신선하다. 기본적인 토대와 연구 성과들이 없다면 이 선언은 불가능했겠지만 서기 2007년에 대한민국에서 외치는 그들의 함성은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참으로 난감해진다. 지금까지 흘러온 인류의 역사와 사회적 변혁의 면면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으면서도 새로운 해석과 주장을 펼치는 이 선언문을 치기어린 발상이나 아웃사이더들의 외침으로만 보기에는 꼼꼼히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들이 많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통해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변혁을 주장했다. 급변하는 혁명의 시기에 선언을 한 걸출한 두 젊은이의 나이는 불과 서른과 스물 여덟이었다. 세계는 용광로처럼 변화의 불길로 들끓고 있었으며 세상은 곧 혁명으로 완전히 뒤바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완고한 세계를 뒤흔들긴 했지만 혁명의 기운은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일 듯 했지만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160년이 흘렀고 21세기 접어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코뮨주의’를 선언한 사람들의 마음과 갈피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과 같다. 현재까지 인류가 이룩한 역사와 사회적 토대는 결코 암울한 예측과 비관적인 전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래와 역사에 대한 해석과 전망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지금 이대로의 현실이 바람직하거나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코뮨주의 선언>은 21세기를 위한 아니 인류 전체를 위한 보편적 이데올로기로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혹은 어디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가. 삶의 역동적 변화 속에서 인류 사회가 만들어 온 문명과 문화 사회 제도와 체제는 자본과 화폐 제도로 대표되는 시스템 속에 갇혀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 원인과 해법을 고민하려는 노력들은 지속되어야 하며 ‘공산주의’가 아니라 ‘공통체’를 전면에 내세운 ‘코뮨주의’의 진정한 가치와 실현 방식들에 대해 귀 기울여 보아야 할 충분한 이유와 타당성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부정과 비판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변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며 더 나운 세상에 대한 꿈을 반영하고 있다. 몽환적이고 이상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삶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성찰이고 나와 우리에 대한 고민과 반성의 결과물이다. 고병권과 이진경 두 사람에 의한 발상과 전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함께 꿈꾸어야 가능한 혁명에 대한 이정표이다.

코뮨주의자의 현실에 대한 긍정은 항상 현실에 대한 변혁을 내포한다. 현실을 긍정하지만 그 현실에 머물지 않기에 우리는 코뮨주의가 이념이라고 말한다. - P. 7

  머리말을 대신한 <코뮨주의 선언>은 본문으로 제시된 정치와 주체 그리고 감응이라는 영역에서 살펴보고 있는 세부적인 모델들을 제시하고 있다. 각각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 왔거나 고민해 왔던 부분들을 살펴보고 지금 우리의 현실과 미래의 삶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들을 정리해 놓은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혹은 아카데미즘 안에 머물러 있는 완고한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들은 우리들 삶의 자유를 표방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기존의 형식적 틀에 온몸을 끼워 맞추려는 노력이 아니라 보다 유연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디자인하려는 노력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즐거움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로크에서 촉발된 개인의 신체에 대한 ‘소유’의 개념 그리고 사유화의 길을 걸어온 인류의 재산권에 대한 반성은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유화의 개념에 반대하는 급격한 코뮨주의가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겠지만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중이며 대중의 힘에 의해서만 모든 변화는 가능하다.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내가 먹고 살기 힘들어진 게 아니다. 이명박이 당선됐다고 해서 장밋빛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마르크스는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상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사태를 자유”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본과 소유의 압박에서 탈출할 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운 삶은 가능하다. 그 대안적 삶의 모델을 제시하고 먼저 행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변화해 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뮈엘 베케트의 말을 패러디 하자면 실패하더라도 아무도 실패해 보지 않은 방법으로 실패해야 하며 그 실패의 과정과 결과들에 의해 우리는 또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다. 비록 160년 후에 다시 선언된, 혹은 새로운 세기에 대한 전망과 변혁의 가능성을 내포한 <코뮨주의 선언>이 헛된 희망과 이상적 꿈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그 가능성과 변화의 노력까지 물거품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굳음 믿음이 필요하다. 선언의 마지막에 나온 말처럼 “자, 이제 우리도 웃으며 떠날 시간이다!”


080117-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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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고병권이 쓴 '민주주의'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5-25 15:02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묻는 책들이 태풍처럼 출판계를 흔들어놓고 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채 가라앉기 전에, 뒤를 이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여기에 다시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람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고병권이 몰고 올 바람은 일시적으로 불고 지나갈 바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되돌아올 바람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사상 지형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열을 내는 이...
 
 
 

코뮨주의자의 현실에 대한 긍정은 항상 현실에 대한 변혁을 내포한다. 현실을 긍정하지만 그 현실에 머물지 않기에 우리는 코뮨주의가 이념이라고 말한다. - P. 7

위대한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을 먼저 창조한다고 했던가. 우리는 친구를 창조함으로써만 우리의 우정을 이어간다. 적을 친구라고 우기는 게 아니라, 적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우정이고 사랑이다. 혁명가는 세계를 전복하는 혁명으로 세계에 대한 그의 우정을 보여주지 않는가. 우정이나 사랑은 어떤 때 꽤나 잔혹한 행동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 P. 16

코뮨주의자로서 우리는 또한 사유화(privatization)에 반대한다. - P. 18

자본은 결핍으로 충만한 신체이다! - P. 27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대안적 실험들을 소통시키고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뀐다.” - P. 29

코뮨주의는 대안적 삶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시도 속에서 언제든 실현된다. - P.  29

결여감을 지닌 자는 떠나지 못한다. - P. 31

자, 이제 우리도 웃으며 떠날 시간이다! - P. 31

대중이 혁명적이라는 것은 “대중이 혁명을 욕망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욕망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대중은 ‘소용돌이(volution)’를 ‘반복(re-)’하는 흐름이다. 따라서 대중 바깥에서 혁명을 기획하고 계산하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혁명은 대중에게 속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혁명은 계산 너머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 P. 64

혁명가란 혁명의 불길을 지도하는 자가 아니라 불을 붙이는 자이다. 그는 시대의 습기를 가장 먼저 날려버린 가장 건조한 지대로서 스스로 타오름으로써 불길을 주변으로 전파하는 자이다. 전달도 증폭도 대중들의 운동이다. - P. 68

“스승이 될 수 없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될 수 없는 스승은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이탁오의 <분서> 재인용) - P. 87

혁명은 대중이 만드는 것이고, 대중의 능력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 104

전위는 정해진 어떤 계급적 이익이나 ‘보편적 진리’를 알려주고 전달하는 조직이 아니라, 앞서서 실험하고 앞서서 실행하며 참조할 수 있는 새로운 사례를 창안하는 그런 조직이어야 한다. - P. 105

사적 소유는 타자의 추방과 배제가 기본 특징이다. 그래서 소유권을 기초로 정의된 기본 권리들은 암묵적으로 ‘타자=위험 세력’. ‘타자=침해자’라는 인식을 전제한다. 이런 틀에서는 타자를 향한 어떤 적극적 개방이나 적극적인 구성도 사고하기 어렵다. - P. 127

코뮨주의적 소유는 ‘소유’의 의미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코뮨주의적 소유에서, 소유는 여전히 ‘권리’로 불릴 수 있지만, 이때 권리는 어떤 법적 형식을 지칭한다기보다,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기예’나 ‘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 P. 137

삶의 윤리란, 서로를 갈라놓는 분리의 격자 속에 던져진 가상의 이념이 아니라, 함께 생성하는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P. 248

냉소주의자는 단지 질서들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나쁜 질서들을 객관적 현실로 실현하는 기획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냉소주의적 태도를 작동시키는 것은 차악을 선택하지 않으면 최악의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공포이며 자기 능력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다. - P. 303

사뮈엘 베케트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아무도 실패해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실패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유머리스트에게도 어울리는 정의이다. 유머리스트는 빈번히 실패한다. 그러나 아무도 실패해 본 적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만 실패한다. 그는 피로감 없이 유쾌하고 즐거운 실패들을 이어간다. 그는 자신의 실패, 과오, 심지어는 자신의 성공과도 쉽게 헤어질 수 있을 만큼 이별 능력의 최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 P. 322

코뮨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 너머의 이념으로 주어지고 의지의 조직화로 성취되는 초월적 관념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해체하는 운동 속에서 구성되는 공통적(commune) 삶의 양식이다. ‘공통적’이란 어떤 의미인가? 관념론자들은 서로 다른 개체들이 동일한 관념, 표상, 속성을 공유하는 사태를 공통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유물론자에게 공통성은 관념의 동일성이 아니다. 공통성은 관념 이전에, 관념과 무관하게 운동하는 물질의 고유한 양태이다. 공통성은 서로 다른 힘과 방향을 지닌 운동(흐름)들이 연합하면서 구성하는 신체성이다. - P. 328

마르크스는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상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사태를 자유라고 불렀다. - P. 375

코뮨주의란 복수의 개인들이 능동적으로 이러한 집합체인 코뮨을 구성해 가는 활동이다. 능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코뮨주의란 복수의 개체들의 능력이 서로 증대하도록 적극적으로 협력-체인 코뮨을 만들어 가는 활동이다. 코뮨의 구성을 통하여 집합체의 잠재력의 폭이 커지며, 협력하는 각인들은 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잘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코뮨주의란 바로 협력-체, 즉 코뮨의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구성을 통하여 능력을 증대해 가는 활동인 것이다. - P.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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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창비시선 282
이재무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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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는 삶이다. 가장 고급한 예술 장르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며 반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호흡이다. 지천명知天命에 들어선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과 삶의 숨결들은 그대로 생생한 언어로 되살아난다. 시를 칼을 빼들고 언어의 탄환을 장전한 시인은 삭막한 시대현실과 부대끼는 사람들의 고통과 한숨을 겨냥해 날카롭고 절절한 목소리를 토해낸다. 한 시대가 가고 세월은 흘렀으며 또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시인은 시라는 창을 통해 또 다른 풍경과 새로운 깨달음과 삶에 대한 통찰을 적는다.

  정치적 현실이 변했고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간다.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문화와 세계관으로 무장한 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질곡의 현실과 ‘나’를 둘러싼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시인의 내면 풍경에는 여전히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가끔 ‘마량에 가면’ ‘좋겠다’는 희망과 소박한 꿈을 꾼다. 그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뜻도 모르는’ 인생에 대한 회한이며 긍정이며 낙관인 지도 모른다.

좋겠다, 마량에 가면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마지막으로 거덜 내고 싶은 인생이 ‘웃음’으로 마무리 될 만큼 우리들 인생에는 사랑과 웃음이 중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남루한 생의 저물녘에 마주하는 ‘나’의 모습과 과거의 기억 속에는 늘 따스한 미풍이 분다. 상처받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그것도 결국 사랑으로 인한 상처일 뿐이다. 시인에게 세상은 이제 무덤과 어둠과 그늘일 뿐일 수 있다. 비극적 인식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시라는 장르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버텨 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과 남은 시간에 대한 추동력은 어둠 속에 묻힌 작은 불빛과 아름다운 추억과 생명에 대한 외경에서 비롯된다. 이재무의 시를 오독한 것이 아니라면 부조리한 현실과 석양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생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통찰과 섬세한 감각들은 열정과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그 여자

만날 때마다 몸과 마음

숯불 위에 놓인 번철처럼 뜨겁게 달구어놓는

그 여자 빼어난 미모가 차라리 슬퍼 보이는,

도발 안쪽에 감추어진 가련함을,

구멍 속으로 기어드는 구렁이같이

무논 속으로 뛰어드는 개구리같이

사랑했네 하지만 그 수려한 미색 속에는

호랑이 날카로운 발톱의 마음도 살고 있어

사랑이 클수록 상처도 컸네

그녀를 사랑하는 일 수만평 진흙밭

새구두 신고 걷는 일처럼 벅찬 일이었네

신은 여자에게 지색을 주고 요철 심한

생의 굴곡 안겨주었네

사랑은 불행까지 품어주는 일

나, 오랫동안 그녀를 앓아야 하네


  그러다 문득 도시 한가운데서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이 시집의 표제작이 된 ‘저녁 6시’는 냄새를 통해 생의 감각을 되살린다. 생물학적 공복감의 근원은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먹기 위해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살기 위해 먹어야만 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도심 한복판 저녁 6시에 마주하는 냄새를 통해 확인된다. 때로는 ‘치명적인 독’일 될 수도 있는 본능적 욕망의 범람을 경험한다.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냄새는 현대인들의 욕망이며 신산스런 삶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냄새의 숲속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은 처량하기 보다는 안타까움이며 두려움이고 우울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시인은 일상의 감각과 생활의 패턴들을 ‘냄새의 감옥’으로 표현한다. 비아냥거리는 냉소가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내밀한 고백이다.

저녁 6시

저녁이 오면 도시는 냄새의 감옥이 된다
인사동이나 청진동, 충무로, 신림동,
청량리, 영등포 역전이나 신촌 뒷골목
저녁의 통로를 걸어가보라
떼지어 몰려오고 떼지어 몰려가는
냄새의 폭주족
그들의 성정 몹시 사나워서
날선 입고 손톱으로
행인의 얼굴 할퀴고 공복을 차고
목덜미 물었다 뱉는다
냄새는 홀로 있을 때 은근하여
향기도 맛도 그윽해지는 것을,
냄새가 냄새를 만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다보면
때로 치명적인 독
저녁 6시, 나는 마비된 감각으로
냄새의 숲 사이를 비틀비틀 걸어간다.


  ‘냄새’로 시작된 ‘공복’은 ‘가난’으로 이어진다. 그 개념이 달라진 시대를 반영한 아래 시는 자본의 물결과 신자유주의 시대 한복판에 알몸으로 서 있는 ‘가난’을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는 반복적인 표현으로 강조한다. 이제 가난은 죄이며 악이며 부정이다. 더 이상 생을 긍정하지 못하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가난에는 아무 의미도 희망도 낙관도 없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고 반문하던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는 이제 철지난 유행가가 되어 버렸다. 가난하면 외로움도 두려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허용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이 시대의 가난은 과연 어떤 것인가?

가난에 대하여

선과 악의 기준이 사라진,
오직 미추만이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에
성자였던, 생을 긍정하던 가난은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산개되어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가난은
다만 무력할 뿐이어서 크게 울지도 못한다
가난이 힘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뭉쳐서 무기가 되고 전망이 되던 날이 있었다
떼지어 살고 있어서 쉽게 눈에 띄던 시절
가난은 단연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가난은 저마다 무력한 개인이 되어
모래알로 흩어졌다 지하로 잠적해버렸다
눈에 띄지 않는 가난에 대하여
누가 관심과 애정을 보일 것인가
생활의 중증장애자, 구차한 천덕꾸러기 되어
몰매 맞는 가련한 왕따,
가난은 이제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시인의 마지막 희망은 ‘젊은 꽃’으로 상징된다. 노인의 피부에 검버섯이라는 저승꽃이 피는 것은 ‘누구에게나 밀려드는 시간의 밀물’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생의 진리와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겸허하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된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처럼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꽃을 피우겠다는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젊은 꽃’이 시집의 마지막에 놓여 있는 것일까?

젊은 꽃

때 되면 누구에나 밀려드는 시간의 밀물
그 또한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물에 잠긴 자리마다 검게 죽어가는 피부
지나온 생의 무늬는 목까지 차오른다
하루의 팔할을 사색으로 보내는 그,
긴 항해 마치고 돌아온 목선처럼 지쳐 있지만
바깥으로 드리운 그늘까지 늙은 것은 아니다
주름 많은 몸이라 해서 왜 욕망이 없겠는가
봄이면 마대자루 같은 그의 몸에도 연초록
희망이 돋고 가을이면 붉게 물드는 그리움으로
깡마른 몸 더욱 마르는 것을,
늙은 나무가 피우는 저 둥글고 환한 꽃
찾아와 붐비는 나비와 벌 들을 보라
검은 피부에도 가끔은 꽃물이 든다


080114-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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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먹고 싶은 과자를 아껴 두는 아이의 마음-그것이 단순한 욕망의 절제가 아니라 충족이 주는 낯선 소멸과 허무 때문일지라도-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소풍 전날 잠 못 이루는 아이가 결국 땅거미 질 무렵 귀가 길의 비참함을 꿈에서 보아 버리듯이 말이다. 나는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오랫동안 미뤄두다가.

  김연수의 유일한 산문집을 애써 외면한 것은 은근한 기대나 설렘과는 다르다. 애써 감춰 둔 서랍 깊숙한 곳에 존재 여부만 알고 있는 낡은 편지의 내용처럼 짐짓 모르는 척 하는 마음에 가깝다. 서른 다섯. 소설가는 청춘을 정리한다.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는 순간들을 알아채버린 것이다. 그 때부터 아주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워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 분명하다.

  축축하게 비에 젖은 날씨를 핑계로 포장마차에 들어서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젖어있다. 현재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모든 순간이 발화되는 순간 과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그 아쉬움을 달래듯, 자신의 젊음 혹은 과거의 한 찰나들을 정리한다. 과연 이런 책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선 소설이 아닌 현실속의 작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팬서비스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의 배역이 아니라 현실 속의 배우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소설가의 일상과 마주하며 친근감을 느끼고 그의 소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배경지식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면 작가는 소설의 형식으로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편안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시대적 공감이다. 동년배이거나 유사한 환경에서 성장했거나 생활하는 사람과의 교감과 공통점은 작가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알고 있으면서도 미처 생각지 못했거나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의미한다. ‘그때 그 시절’을 노래하는 철지난 유행가처럼 낡고 빛바랜 사진들이지만 흑백으로 포장되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어도 굳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이런 시간의 흔적들과 삶의 파편들은 단순한 회고담을 넘어서 한 작가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들을 심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미래에 대한 자그마한 꿈과 희망을 만들어보기도 한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은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는 먼지 묻은 뮤직 박스와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데미안>과 <파우스트>와 <설국>에 대한 기억, 김광석의 노래에 대한 선명한 기억과 그의 죽음, 천개의 눈을 가진 밤을 사랑한다는 고백, 중문 바다에 대한 회고, 스무 살 언저리에 느꼈던 삶의 불확실성……. 책을 읽으면서 나는 김연수와 낄낄거리고 소주를 한 잔 했으며 어깨 겯고 거리를 쏘다니기도 하다가 김광석의 노래 소리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리고 반어적으로 이 책은 참 나쁜 책이다.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문장들, 시편들, 노래들과 얽힌 추억들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김연수라는 작가의 삶에 대한 내밀한 고백들은 맨 정신으로 들어주기 힘들다. 어설픈 가난과 시간에 대한 불가해함을 읊조리는 문장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의 지나친 편애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작가의 말대로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먼 기억 속에서 안개처럼 모호하게 혹은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서성이고 있는 것을. 제발, 부디 오래도록 철들지 않고 나이와 무관하게 ‘청춘’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삶을 꿈꾼다. 그리고 단 하나의 문장을 기다려 본다.그와 함께.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08011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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