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지도 - 세계지성사를 풍요롭고 활기차게 한 핵심 키워드 88
기다 켄 지음, 김신재.심정명.윤여일 옮김 / 산처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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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 문장이다. 완결된 고대 그리스 문화의 구조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는 루카치의 이 문장은 너무도 유명하다. 20세기를 전망하고 있는 듯한 이 문장은 어둠과 암흑의 시대를 예견이라도 하는 듯하다.

  겨우 7년이 흐른 시점에서 20세기를 정리한다거나 마무리하는 것은 무리한 욕심인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무언가 끝맺고 싶은 욕심과 정리하려는 본능을 가진 것 같다.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어야 객관적인 시점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20세기를 정리하려는 노력은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혹은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장석준은 <혁명을 꿈꾼 시대>라는 책을 통해서 20세기는 인류의 역사상 끊임없는 혁명을 꿈꾸었던 시대라고 정리하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결정적 시기를 나눈 또 하나의 기준이 될 것이다.

  기다 겐은 <현대 사상 지도>를 통해 20세기의 세계 지성사를 풍요롭게 했던 핵심 키워드를 정리하고 있다. 88개의 개념을 통해 19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주요 개념들을 정리하고 있다. 한 사람이 이 작업을 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여러 명의 일본 학자들에 의해 정리된 이 책은 일종의 현대 사상에 관한 개념어 사전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선 사상의 흐름과 키워드를 제시하며 거시적 관점에서 20세기를 파악한다. 응용윤리학에서 출발해서 해석학, 현상학, 구조주의와 실존주의, 분석철학, 포스트모던 등 지난 세기를 풍미했던 개념들을 소개하고 가능세계, 젠더, 상징, 타자성, 탈구축, 노마돌로지, 차이와 차연 등 현대 철학의 용어와 개념을 설명한다. 그리고 언어, 심리,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인류, 종교, 과학, 비평에 관한 용어들을 분야별로 잘 정리하고 있다.

  어떤 책이든 장단점을 가지고 있겠지만 이런 종류의 책은 감탄과 아쉬움이 교차된다. 우선 장점을 보자. 한 권의 책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개념들과 한 시대의 사상의 흐름을 깔끔하게 일별할 수 있다. 특히 개념 중간 중간 학자들과 학파들 그리고 사상의 흐름들을 표로 정리하고 있다. 영향 관계를 화살표로 정리해 놓고 있어 시각화의 장점을 백분 활용하고 있다. 또한 중요한 용어와 핵심 개념들을 서로 연계 시키고 있고 마지막 부분에 그 개념과 관련된 용어와 키워드를 찾아 가도록 안내하고 있다. 즉 순서대로 읽는 책이 아니라 화살표를 따라 지도를 찾아 가듯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현대 사상 지도>라고 지었을 것 같다. 또 하나의 장점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의 수고가 돋보인다. 공저가 갖게 되는 문제점, 즉 일관성과 통일성의 결여는 이 책에서 의미가 없다. 어차피 개별 개념들에 대한 정확하고 명쾌한 설명이 필요한 책이니까. 그리고 공동 번역의 효과는 모르겠지만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연구원 세 명의 노력이 좋은 책을 소개하고 있는 것 같아 흥미 있게 읽었다. 내용 자체가 무슨 재미가 있을까마는 머릿속에서 쉽게 정리되지 않는 현대 사상의 흐름과 용어들이 그나마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또 하나의 장점은 용어별로 마지막 부분에 우리말로 번역된 관련 서적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책꽂이에 꽂아 놓고 사전처럼 쉽게 찾아보고 관련 서적을 찾아본다면 훌륭한 현대 사상의 안내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어떤 책이든 그렇겠지만 이 책의 활용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읽고 사용할 것인가는 개별 독자가 선택할 일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당연하게도 지나치게 짧고 굵은 설명이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짧게는 한 페이지가 안 되는 것도 있다. 서너 페이지에 걸쳐 특징과 흐름을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각 분야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관심도 없었고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은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일 것이다. 자신의 취향과 목적에 맞는 책을 구입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독서라는 것이 처음부터 예정된 길만 걷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연히 이 책을 만난 독자라면 오히려 혼란스럽고 어려운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다.

  비슷한 얘기지만 하나의 개념이나 용어를 설명하는 데 있어 분명하고 핵심적인 접근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모호한 표현이나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 변죽만 울리고 마는 것도 있다. 일일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쉽고 간단한 것을 너무 어렵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몇 가지 아쉬움이 남지만 곁에 두고 참고할 만한 부분이 많은 책이다.

  20세기는 루카치의 말대로 별빛이 길을 안내해 주지도 않았고, 지도가 없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21세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걸어야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인류가 걸어온 사상과 문명 발달의 길이 더욱 험난하게만 느껴진다. 양보와 배려를 위한 이타적 유전자보다는 자본으로부터 소외되고 물질적 욕망의 덩어리로 가득한 세상을 비참하기만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합의도 없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책이 답을 줄 수는 없다. 다만 사상의 흐름과 사유의 방식을 뒤돌아보는 방식을 통해 미래를 짐작하고 고민하며 한 걸음 내디뎌 볼 뿐이다.


080227-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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