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 문화는 어떻게 현실에서 도망가는가? , 컬리지언 총서 13
이택광 지음 / 이후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문화는 음악이나 미술 혹은 영화나 사진 등 예술의 한 장르나 어떤 특정한 생활양식을 이르는 말로 이해된다. 이러한 개념은 자연 상태와 상반된 것으로 이해되며 물질적, 정신적인 인간의 역사적 축적물을 통괄한다. 종교나 언어, 풍습, 행동 양식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와 개념은 폭넓게 정의되고 사용된다.
문화의 영역과 범위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인류가 축적해 온 모든 생활 양식과 삶의 태도를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문화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도 힘들다. 그 범위와 개념이 포괄적이기 때문에 문화는 대단히 모호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택광은 문화 비평을 하고 있지만 사실 영화와 문학을 중심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있다. 이 분석이 타당하게 보이는 것은 문화를 만들어가는 한국인에 대한 성찰과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문화는 그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자연 상태가 아닌 인간의 모든 인위적인 행위가 만들어 낸 현상들과 행위들은 문화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나 만화, 드라마 음악, 소설 등은 한 사회의 흐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이것을 우리는 문화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구체적인 문화 현상들을 이택광은 몇 가지 개념들로 묶어 내면서 하나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는 바로 이러한 문화 현상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의 결과물이다.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서사의 무덤에 새겨진 묘사라는 비문’ 우리 사회의 문화 현상들을 서사와 묘사의 차이점을 통해 기발하게 분석해내고 있다. 그것은 모범답안처럼 제시되는 리얼리티는 문화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순수-참여 논쟁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저자의 의도에서 비롯된다. 단순하게 고급문화와 하위문화를 구분하거나 현실이 어떻게 문화 현상에 반영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왜’ 반영되는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 듯하다.
자본주의와 결합된 문화 상품들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고 리얼리티의 문제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서사가 죽어버린 시대에 가상현실에 대한 묘사가 오히려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화와 정치는 다르다. 현실생활에서 140억을 가진 유인촌의 재산 3분의 1은 부인이 가진 현금이다. 이것은 문화예술인으로 분류되는 유인촌과 무관한 현실적인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가 아닌 문화와 예술 행위를 통해 환상과 신기루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몽환적 환타지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거짓이다.
저자는 자본과 결합한 문화의 상품화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전제 조건에서 벗어나고자 할 때 우리는 허위의식을 가진 채 실제 현실과 문화 현상 사이의 모호한 환상을 쫓게 된다. 보수주의는 문화를 통해 음란한 환타지를 만들어준다.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들이다.
저자의 말대로 서사가 초월의 욕망이라면 묘사는 환상적인 비극에 불과하다. 묘사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치밀하게 재현한다. 서사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서사가 죽고 묘사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래서? 재현된 욕망의 판타지가 펼쳐진다. 그것이 사실이든 환상이든 중요하지 않다. 스펙터클과 포르노그라피,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친구와 텔미썸딩 등 우리들 눈에 비치는 모든 문화는 현실로부터 탈주한다. 현실과의 미세한 차이는 반복되고 정착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집요한 시도는 문화 현상과 관객들의 끊임없는 질주로 이어진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제임스본드와 오우삼을, 이문열과 이인화를, 김영민과 강준만과 김용옥과 김지하와 이진경과 진중권과 김규항을 분석한다. 앞서 펼쳐놓은 영화와 소설이 보여주는 우리 사회와 문화 현상들을 거시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면 이제 대중 속에 어필하고 있는 작가들을 점검한다. 단순하게 글을 잘 쓰거나 필력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비교 대조되는 사람들도 결국 문화 상품으로 포장되어 ‘잘 팔리는’ 욕망하는 기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저자의 날선 비평들은 긍정과 부정의 문제가 아니다. 2002년에 출판된 이 책은 세기말의 징후들을 읽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가 될 것이다. 이제 시간이 또 한참 흘렀지만 우리가 소비하고 있는 모든 문화라는 이름의 상품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과 생활과 현실을 녹여내고 있다. 모든 것을 팔아치우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모든 문화는 재편되고 있다.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어리석은 이념 공방이 아니라 내가 소비하고 있는 문화는 도대체 무엇이며 어떤 것인가 그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이 한 권의 책으로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왜 이런 분석과 노력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의문은 조금 풀리는 듯하다.
내용과 무관하게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는 경험들이 - 지나간 영화에 대한 추억들, 사라진 여배우들, 현재에도 건재한 글쟁이들 - 가능했던 책이다. 이 책도 소비의 대상이지만 무엇이 같고 다른지, 그 의미와 논리는 무엇인지 믿을만한 저자의 눈을 잠시 빌려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 될 것이다.
0802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