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와 아름다운 은행가 -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 이야기
데이비드 앨런 브라운.제인 반 님멘 지음, 김현경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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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술은 우리를 특별한 매혹의 세계로 안내한다.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설명할 수 없는 미적 감수성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적 기쁨이다. 한 화가의 그림이나 성향에 몰입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고 다양하고 폭넓은 그림에 대한 애정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예술, 특히 그림은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과 감동을 전해주기도 하고 그림 하나가 주는 감동을 평생 잊기 어려울 수도 있다.

  르네상스를 빛낸 화가 중의 한 명인 라파엘로의 그림은 부드러운 빛과 여유 있는 인물들의 표정으로 기억된다. 그 중에서 젊은 피렌체 사람의 초상화 ‘빈도 알토비티’라는 젊은이는 대단한 매력을 발산한다. 데이비드 앨런 브라운과 제인 반 님멘이 쓴 <라파엘로와 아름다운 은행가>는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작가의 한 작품을 중심으로 이렇게 역사를 가로지르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이 책은 한마디로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은행가였던 주인공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면 요즘 말로 얼짱에 수많은 오빠부대를 거느릴 만한 미남이다. 단순하게 잘 생겼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것 너머까지 전하는 능력을 지닌 라파엘로의 그림은 보는 사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이 은행가의 그림은 모나리자와 비교되기도 하고 있으며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매력을 묘사하고 있다. 금발의 젊은 남자가 오른쪽 어깨너머로 정면을 응시한다. 검은 모자를 쓰고 있고 푸른색 망토를 걸치고 있다.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으며 이마와 금발 머리에 부딪히는 빛은 환하게 반사된다. 귀밑머리는 가늘고 섬세하다. 아직 솜털이 벗겨지지도 않은 것 같은 남자는 미소년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 눈에 옥의 티처럼 보이는 반지 낀 왼손은 아무리 보아도 어색하다. 오른쪽 어깨부분 가슴에 얹은 손은 나중에 그려 넣었다는 심중을 굳힐 수밖에 없다. 녹색 화면을 배경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젊은 은행가의 눈은 깊고 푸르다. 빨간 입술과 오똑한 코, 짙은 눈썹과 하얀 등은 현실 밖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이 한 장의 그림이 그려진 것은 1512년경이었고 주문받은 그림은 라파엘로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탄생한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부유한 집안에서 초상화는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결혼기념이나 조상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젊은 은행가의 초상화는 수백 년 동안 상속과 매각을 통해 주인이 바뀌다가 지금은 위싱턴의 미국국립미술관에 걸려있다.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그림의 행방과 그림을 둘러싼 수많은 사건들은 마치 영화처럼 인상적이다. 통시적 관점에서 그림의 이동이 보여주는 경로는 그대로 당대 사회의 역사와 문화적 요인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미술사 여행을 이 초상화 하나로 떠날 때 지루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관심 갖고 있던 작가도 아니고 그림이 주는 이미지나 느낌이 환상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상화는 초상화일 뿐이다. 과장과 왜곡이 보태지기도 하겠지만 초상화가 주는 감동이 얼마나 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게는 통용되는 사실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 한 점이 500여 년의 세월을 견뎌온 과정이 그대로 소설처럼 흥미롭기도 하고 충분한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무관심한 태도와 경직된 사고에서 창의력이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다. 내가 생각한 것이 옳고 다른 사람의 견해가 틀리다는 오만은 이미 수구와 보수를 넘나드는 위험한 생각이다. 콘크리트처럼 생각이 굳어지면 깨지기 전까지 바뀌지 않는다. 그림에 대한 숱한 해석과 다양한 논의들은 풍성한 잔치와 같다. 긴 세월 속에서도 그 빛과 이미지를 잃지 않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술적 감동은 여전하다. 미술사에 대한 상상력과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이후에도 여러 사람에 의해 확대 재생산 된다. 수많은 복제가 이루어지고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이 미술사에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이 그림에 대한 동료나 후대 화가들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한 장의 초상화가 보여주는 종횡무진 서양 미술사에 얽힌 에피소드들은 논픽션 드라마처럼 흥미 있지만 번역된 문장이 매끄럽지 않기 때문인지 전체적인 흐름이 이어지지 않고 끊어진 국수처럼 따로 떨어진 느낌이다. 유기적인 문장들 간의 결합이 아쉽기만 하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용 밖의 문제이다. 본문 237페이지와 이후 부록과 주를 포함해 370페이지이다. 부록과 옮긴이의 말은 물론 마땅히 들어가야 한다. 주도 빼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본문 237페이지에 불과한 책의 가격은 무려 29,000원이다. 어지간해서 책값 이야기는 잘 안하는데 하드커버와 컬러 도판이 필연적이었다고 해도 이 책을 화집이 아닌 일반 도서로 판매할 목적이었다면 지나친 가격이다. 소장 가치가 있는 책도 아니고 그저 르네상스 시대 한 그림에 대한 후일담으로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편집과 디자인 그리고 가격을 제시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싶다.

어깨너머 아득한 눈빛을 던지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맨 처음 떠올랐던 이 책의 표지가 화면에 가득하다. 그림은 언제나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이 휴식할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를 제공하며 우리를 이상적 유토피아로 이끌기도 한다. 완전한 저 너머의 세계에 가고 싶지만 이 책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는 않다.


080328-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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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 문학과지성 시인선 34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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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연휴 특판을 위한 백화점 ㄷ참치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매장에서는 백화점 직원들이 판매를 하고 나는 지하 2층 창고에서 매장까지 물건을 옮겨 놓는 일이었다. 때때로 선물용으로 배달되는 참치를 들고 배달을 나가기도 했다. 보름간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는 시간은 지하 창고 불빛 아래 참치 박스들 틈에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책을 보았다. 그 때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던 책이 바로 오규원의 <현대시작법>이다.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와 시선집 <사랑의 기교>를 보면서 나는 정호승이나 신경림, 황지우와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규원은 내게 그렇게 특별한 시인이었다. 이후 발간된 시집들은 모두 사 보았지만 이론서들은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런 시인이 작고 한 지 벌써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시집 <두두>가 나왔다.

그대와 산
― 서시

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


  시집을 왜 사서 읽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문법전공 국문과 교수처럼 시는 늘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서 있다. 오규원의 시는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시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무색한 오규원의 짧은 시들은 인식 이전의 차원을 보여준다. 언어가 보여줄 수 있는 한계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인의 마지막 목소리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맑고 깨끗한 이슬과 같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물과 자연의 변화는 시인에게 단순히 경외와 감탄을 자아내지 않는다. 지금 거기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언어가 보여주는 장면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점에 따라 선택된 장면이고 선택된 언어에 따라 다르게 보여질 뿐이다. 객관적 거리와 표현은 불가능하다. 그것에 도전하는 무모함을 보여주는 시들은 절대 아니다. 시인은 그저 자신의 눈에 비친 풍경들을 간결한 언어의 세계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읽어내는 독자의 마음에 그려지는 하나의 이미지는 이미 시인의 그것과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4월과 아침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해하네
4월 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


  시간은 정지해 버린 듯 멈춰 있지만 4월과 아침은 교묘한 눈빛을 교환하며 4월의 아침이 빚어내는 장면을 고스란히 정지시킨다. 사진조차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오규원의 시들은 단순한 정지화면만을 보여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산과 길

여러 곳이 끊겼어도
길은 길이어서
나무는 비켜서고
바위는 물러앉고
굴러 내린 돌은 그러나
길이 버리지 못하고
들고 있다


  시집의 제목인 ‘두두(頭頭)’와 물물(物物)은 두두시도(頭頭是道), 물물전진(物物全眞)이라는 선가(禪家)의 말에서 시인이 빌려온 것으로,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며,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식빵과 소리

식빵을 얇게 썰어
살짝 굽는다
한 조각 위에
버터를 바르고
한 조각을 덧씌워
종이 냅킨으로 감싸 쥔 뒤
아, 하고
입 가득 넣고 깨문다

바싹!

오후
그리고
4시

  동작과 행위들까지 정지해 버리는 시간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미지의 적막을 깨는 소리가 들린다. 바싹! 긴 여운이 남는 소리는 아지만 오후 4시에 들려오는 ‘소리’는 순간 또다시 적막 속으로 사라진다. 이 시집은 크게 ‘두두’와 ‘물물’로 나뉘어져 있다. 유고시집의 특성상 끊임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인의 목소리를 연상하자니 죽음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존재의 무(無)로 돌아간 시인과 유작으로 남은 시들이 던지는 화두는 무겁거나 진지하지는 않다. 시인의 의도였는지 알 수 없으나 의미를 넘어서 존재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깨닫거나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자는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명징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지극히 단순하고 깨끗하게!

고요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고요의 위와 아래를 생각하다가 장미 한 송이가 지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고요하지 않은 세계의 이편에서 고요한 세계의 저편으로 건너 간 버린 시인이 남긴 고요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소란스런 삶의 세계와 대비되는 적막한 죽음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구멍 속으로 사라진 시인이 그립다. 그 구멍은 물론 바닥이 보이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것들은 사라지는 구멍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그의 시를 볼 수 없다는 아쉬움보다 그가 남겨 놓은 시들을 다시 꼼꼼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가 남겨놓은 빈 자리는 작은 구멍 하나만큼 비워 놓고 싶다.

구멍 하나

구멍이 하나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지나가는 새의 그림자가 들어왔다가

급히 나와 새와 함께 사라지는 구멍이 하나 있다

때로 바람이 와서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둘이 모두 자취를 감추는 구멍이 하나 있다



080327-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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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8-03-2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에게 마침 필요한 시들! 보관함 냉큼 들어갑니다.
그런데 대단하세요, 그 힘든 알바 중에 짬을 내어 시집 읽으셨다니. :)
 
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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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의 본질은 소통과 전파에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사람들에 의해 가감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집단 전체의 지혜가 고스란히 다음 세대로 전해지기도 한다. 구전문학은 그렇게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며 공동체의 무의식을 반영하기도 했고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구전 문학이 기록 문학으로 정착되고 집단 창작에서 개인 창작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야기는 글을 통해서 즉 책을 통해서만 유통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의 기능과 역할이 축소 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사회 시스템 전체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가동된다는 사실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창조적이고 흥미 있는 이야기는 문화산업의 이름으로 소설로 창작되거나 영화, 게임의 스토리가 되기도 하며 거대한 부를 창출한다. 그러니 현대 사회에서 이야기는 돈이라는 명제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그들을 위한 사색과 고민은 넘쳐나는 듯 하지만 정말 알맹이는 없다. ‘고교생이 읽어야할~’로 시작되는 시리즈나 ‘논술대비를 위한~’로 시작하는 수험생들의 불안감을 조장하는 자극적인 문구들은 일제강점기 근대 단편 소설이거나 유명 작가들의 대표작들 모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소년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고민하고 선택하고 방황하며 정체성을 찾아야하지만 그것을 다루고 있는 책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입제도에는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관심이 많지만 어떤 길을 가야할 것인지, 그들의 고민과 꿈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은 아주 적다. 네모난 빵틀에 구워진 빵들처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시간에 등교해서 똑같은 책을 펴고 똑같은 공부를 하고 똑같은 꿈을 꾼다. 자본주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썰매를 끄는 개처럼 헐떡이며 무한질주의 고통스런 생활이 오늘도 이어진다.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편견 같지만 큰 틀은 손대지 않고 그 안에서 그들은 사소한 즐거움과 어이없는 고민들을 할 때가 많다.

  아니 어쩌면 제도권 안에서 움직여지고 경쟁의 대열에 서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김려령이 그려낸 <완득이>처럼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점점 남의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제1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다운 이 소설은 청소년들에게 읽힐 만하다. 고민의 폭이 깊고 진지하며 대상이 뚜렷하고 폭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장이 아버지와 외국인 어머니를 둔 완득이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 어머니조차 얼굴도 모른 채 살아왔다. 고등학생으로 설정된 완득이는 말하자면 사회의 소수자다. 어른의 몸과 아이의 지능을 가진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삼촌과 아버지는 춤을 추며 생계를 꾸려가기도 하고 장터에서 물건을 팔기도 하며 지하철에서 구두 깔창을 팔다가 쫓겨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완득이가 살고 있는 옥탑방 건너편엔 담임 똥주가 산다. 소설의 첫 장면은 교회에서 완득이가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주일 안에 담임을 죽여달라는 기도이다.

  시종일관 담임 똥주와 완득이의 관계는 유쾌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똥주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교사의 말투와 행동은 아니다. 욕도 잘하고 지독한 반어와 역설로 학생들을 비꼬기도 하며 끊임없이 완득이를 괴롭게 한다. 그 괴롭힘은 물론 완득이의 입장에서다. 두 옥탑방을 중심으로 완득이와 똥주가 만들어내는 인간적인 관계가 이 소설의 중심 축이다.

  완득이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삼촌은 완득이의 배경이다. 같은 반 여학생 정윤하는 완득이와 다른 모범생이며 공부도 일등이다. 윤하를 완득이 옆에 세우는 작가의 의도가 눈에 띠게 노골적이고 담임 똥주에게 부자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가난은 장식에 불과하다는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고민의 폭은 완득이의 불우한 환경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거시적 관점으로 확대된다. 이주 노동자 문제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 입시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학교 교육의 현실, 기성세대의 편견 등 다양한 관점들이 서로 얽혀 있지만 청소년들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도록 경쾌하고 발랄한 문장과 표현이 유지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다.

  킥복싱을 배우게 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완득이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이기지 못한다. 싸움이라면 자신 있는 완득이에게 사각의 링은 또 다른 하나의 세계이다. 정해진 규칙과 룰이 엄존하는 현실의 축소판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해내는 과정이 완득이가 성장하는 과정일 것이고 이 사회에 편입되는 통과의례일 것이다.

  이 소설은 청소년 성장 소설이라는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어쩌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느 학교에나 오늘도 맨 뒷자리에서 엎어져 자고 있는, 학교를 그만두고 담장 밖에서 길을 잃어버린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있는 소설이다. 다양한 관심과 그들의 고민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하거나 단순한 고민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다. 성적과 대학만이 지상 과제일 때도 있겠지만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당연히 갖게 되는 성장통을 앓고 있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으로 밤을 새우기도 한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그리움이나 사랑, 이별과 죽음, 삶의 이유와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벌써 그 시절을 잊어버린 어른만의 생각일 뿐이다. <완득이>는 불과 얼마 전에 겪었던 우리들 유년의 기억을 되새기며 청소년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책이며 무엇보다도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위해 청소년들이 꼭 읽을 만한 소설이다.


080325-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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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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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럼slum의 어원은 slumber선잠이다. 피곤하고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는 빈민층에게는 숙면조차 사치일지 모른다. 편안하고 안락한 잠자리는 거주 조건을 단적으로 말해줄 수 있지만 그것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빈민층이 사는 곳을 슬럼이라고 하는 지도 모르겠다. 또한 슬럼은 도시와 별개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인간 문명의 눈부신 결과물인 도시의 거주형태는 슬럼이라는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게 마련이다.

  왜 인간은 한 곳에 모여 살아야 하는 것인가는 우매한 질문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서로 협력하지 않고 군집 생활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얼마만한 거리에서 어떤 거주 형태로 모여 살아야 하는 문제는 그 답이 쉽지 않다. 도시의 발달은 통치 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노동 집약적인 산업 혁명의 이후 급속하게 확산되기에 이른다. 효율성을 우선으로 하는 공장식 기계 산업은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보다 많은 노동 시간이 필요했다.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그리고 정보화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도시는 필연적으로 확대되었지만 70년대 이후 벌어지는 도시의 집중 현상은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거대도시의 필요성에 따라 계획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밀려 황폐화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가난한 사람들이 슬럼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는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도시의 갱년기가 만들어내는 자연스런 슬럼현상은 일부 서구 유럽의 선진국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멕시코와 인도를 비롯한 후발 개도국이나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 도시화와 급작스런 슬럼의 형성은 참혹하기만 하다.

  슬럼은 다음 몇 가지 유형을 지닌다. 도심이 빈곤해지거나 해적형 도시화가 이루어지거나 눈에 띄지 않는 셋방살이 형태이거나 변두리의 밑바닥을 이루거나. 이들 슬럼 주민은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먼저 스쿼터, 즉 남의 땅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사는 주민이 있고 두 번째로 해적형 분양지의 피분양자, 세 번째로 세입자, 네 번째로 강제퇴거 주민, 농촌 유민, 국내외 난민들이다.

  이 책은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슬럼 현상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이며 우려할 만한 미래에 대한 묵시록이다. 국가별로 슬럼의 유형과 원인 슬럼의 주거 조건들을 살펴보고 있는 부분에서는 할말을 잃는다. 6장 슬럼의 생태학에서 이런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재난과의 동거, 죽음과 질병을 부르는 도시, 똥통생활, 유아살해범에 관한 상세한 내용들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조금만 눈을 들고 멀리 내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은 모순과 재앙으로 가득하다. 저자는 물론 이런 현상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과 대책을 촉구하기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에게는 우울한 우리들의 자화상을 확인하는 것에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강제 철거에 대한 세계사적 기록은 한국이 보유하고 있다.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서울과 인천에 살고 있는 빈민 72만을 강제 이주시킨 기록은 영원히 기록될만한 충격적인 사례로 이 책에 소개되고 있다. 어느 나라보다도 철저하게 개인의 사유 재산에 대한 공적 제재가 빈번하고 강력한 나라 대한민국은 토지 수용과 강제 철거에 관한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소개되는 대한민국의 사례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도심 재개발이나 신도시 개발로 인한 강제 철거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슬럼 화재 사건을 다룬 대목에 이르면 독자들의 충격은 극에 달할 것이다. 일찍 죽어버리는 개는 쓰지 않고 쥐나 고양이에게 불을 붙혀 화재를 일으키는 방법을 사용하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1990년대 이후 급속도로 진행되는 농촌의 파괴는 도시의 슬럼을 가속화고 있으며 도시 주변의 슬럼은 또 다른 형태로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다. 상하수도 문제, 인구과밀, 전기 등 공공설비의 부재 -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재앙은 계속되고 있으며 미래는 불투명하다.

  제 3 세계 도시들의 초호화 주택 단지들은 슬럼과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으며 빈민들의 세금이 부유층의 공간과 설비에 투자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금융 제국주의와 부패 권력, 중간계급의 헤게모니가 빚어내는 빈곤과 억압의 슬럼화는 지구의 미래를 보여주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최근의 지구 상황을 비교적 차분하고 객관적인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더욱 섬뜩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슬럼은 우리와 동떨어진 다른 나라의 특별한 상황일까? 빈부 격차의 심화, 비정규직의 확대, 고용 없는 성장, 한국형 재벌의 성장, 순환 출자 구조를 통한 비정상적인 지배구조, 계급을 고착화시키는 교육기회의 대물림, 청년실업률 급증, 사회 복지 비용의 감소 등 최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몇 가지만 떠올려 보아도 우리는 안전지대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저자의 의도가 미래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나 위협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에 대한 반성과 대책 마련에 있는 것이라면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어떤 측면을 다시 돌이켜 보아야 하고 현실의 어떤 부분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고민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이 책의 의미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현실과의 접점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도시 행정, 경제 개발, 정책 결정 등 다양한 분야의 관련자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이 우선 필요하다. 무서운 미래, 암울한 세계는 바로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다가온다. 나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먼 우주에서 바라보는 나의 삶과 나를 둘러싼 세계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이 책은 그것에 대한 아주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어 우울하다.


08032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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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겉과 속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재미가 없어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거실에 TV를 치우고 붙박이 책장으로 채워버렸다. 끊임없이 쌓여가는 책들이 비좁게 서서 칼잠을 자고 있지만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다. TV대신 책을 보는 것이 뭐 그리 나을 것은 없겠지만 적어도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갖지는 않는다.

  텔레비전이든 책이든 많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린 문화 현상들은 순간적인 유행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부른다. 계층과 계급에 따라 향유하고 즐기는 문화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한 사회의 혹은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문화로정착하게 된다. 이에 비해 대중문화라는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일반 대중들의 소비적 문화 현상으로 이해한다. 상대적으로 고급문화라는 말이 성립된다면 대중문화는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거나 깊은 사색과 통찰을 거쳐 얻을 수 있는 문화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즉흥적이고 일회적이며 소모적인 현상일 수도 있고 가볍게 접근하고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특징도 갖는 것이 대중문화이다. 2005년에 나온 <대중문화의 겉과 속 3>은 가장 최근에 벌어졌던 문화 현상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김찬호의 <문화의 발견>이 실제 현장 중심의 다양한 문화 현상들을 몇 가지 키워드로 풀어냈다면 강준만의 <대중문화의 겉과 속 3>은 문화 현상을 이루는 매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텔레비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절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방송문화와 연예문화 그리고 인터넷 문화와 디지털기술 ․ 산업, 휴대전화 문화와 생활 ․ 소비 ․ 일상문화 등 여섯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3권은 이론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시켜 나간 2권과 다르게 다시 1권처럼 현상 중심으로 초점을 바꾸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열광했던 사람들의 심리, 삼순이 역할을 맡았던 ‘김선아’의 이미지, 주인공 ‘김삼순’의 행동과 대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책은 흥미롭게 접근한다. 하나의 문화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은 그것이 파괴력이 어디에서 출발하든 공감대와 내재적 폭발력을 지니게 된다. 확대 재생산 되는 과정을 거쳐 유행이 되고 하나의 현상이 되며 사람들의 생각이나 생활까지도 변화시킨다. 이것이 문화의 힘이다. 이름도 생소했던 파티쉐를 선호하는 청소년이 늘기도 했고 당돌하고 대찬 30대 솔로 여성들이 함께 울고 웃기도 했다.

  이른바 유행이라는 것은 일시적이고 소모적인 현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당대의 시대정신이나 사회 현상을 잘 드러내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최근 ‘텔미댄스’의 열풍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볍고 경쾌한 몸짓과 반복적이고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리듬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국민을 열광시켰다. 순진하고 귀여워 보이는 소녀들의 표정과 몸짓속에 순수함과 섹시함을 교묘하게 결합시켜 놓은 박진영의 솜씨 또한 놀랍다. 하나의 현상은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즐거움과 쉽게 결합한다.

  일본과 중국을 뒤흔들었던 한류 현상에 대한 분석과 인디 문화에 대한 고찰들은 지나간 이슈라기보다 진행되고 있는 우리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블로그나 포털 저널리즘은 유행을 넘어 댓글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소통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온라인 게임의 강국인 대한민국의 원인과 현상들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고 MP3 산업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여전히 지속되는 대중문화의 핵심적 요소들을 다양한 시선과 이면에 대해 고민해 보는 일은 현재를 고민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제공한다.

  4권, 5권으로 이 책은 계속해서 나올 수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문화 현상들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의 삶을 담아냈던 박태원의 소설들처럼 시대의 이 책들은 훗날 기록 필름과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기록도 기록자의 가치가 반영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것은 강준만의 눈에 비친 사회 현상들이다. 얼마나 객관적으로 - 객관적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다면 - 분석하고 기록하느냐의 문제는 저자 뿐 아니라 독자들의 비판적 시각도 필요하다.

  하나의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내듯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미래의 아젠다를 만들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확고하게 자리잡은 휴대전화 문화는 눈여겨 볼만했다. 메시지에 열광하는 사람들과 생활이 되어버린 아이들, 카메라폰이 바꾸어 버린 세상의 모습은 심각하게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디지털 치매 현상에 대한 분석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공감했다. 그 당사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그만큼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가고 있다. ‘지식in’이 백과사전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식에 정의와 태도마저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아무리 걱정하거나 경계해도 시대는 변하고 세대는 바뀌며 그것을 따라 대중문화가 형성된다. 다양한 이념들과 삶의 가치들이 부딪히고 조화를 이루면서 이 사회는 유지되고 지탱되어 간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 모든 현상들의 주체로서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며 이끌어 간다고 볼 수 없다. 그 현상들의 이면에 숨겨진 자본의 논리와 왜곡된 사실, 추악한 음모들을 가만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눈 뜬 장님으로 혹은 무비판적 소비재로 활용될 수도 있다.

  안다고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내 삶 속에 물들어가는 모습에 대한 반성과 작은 실천은 대중문화 현상들 속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자세이다. 그것이 어디쯤에 멈출 것인지, 어떤 태도와 반응을 보일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내가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 각자의 몫이다. 책임 회피가 아니라 주체적 자각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08032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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