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김현아 지음, 유순미 사진 / 호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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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나에게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물었을 때, 좋은 책은 가슴이 먹먹하도록 울림이 큰 책이라고 말한다. 물론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문학 작품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든 역사든 사회든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카프카의 말대로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의식의 한 부분을 일깨우는 책은 이성의 한 부분을 자극하는 깨달음의 책이 된다. 문학이든 아니든 이성과 감성을 나눌 필요도 없이 오랜 향기와 여운으로 가슴에 남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김현아의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는 보기 드물게 머리와 가슴을 모두 어루만지는 책이다.

  이 책은 기행문 형식의 글들을 모았다. 문학적 답사라고 해도 좋겠지만 얄팍한 흥미 위주의 책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 아프고 난해하게 이야기를 풀어 놓지도 않는다. 난삽하게 수다스럽지도 않고 부산스럽게 치장하지도 않았지만 그 깊이와 고민들은 단순한 기행과 답사의 결과물로 볼 수만은 없다. 웅숭깊은 흑백의 사진과 더불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 현실을 벗어난 초월적 공간을 산책하는 듯하다.

  지나가 버린 시간들에 대한 단순한 경외나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기 위한 책도 아니다. 그녀들의 삶과 문학은 오롯이 현실이 되었고 수만 가지의 고리들은 인과 과정을 거쳐 현실 속에 살아 숨 쉰다. 다만 우리는 그것들을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멀리 신라의 박제상 부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거쳐 조선의 허난설헌과 신사임당 그리고 매창을 만나고 20세기의 김일엽과 나혜석과 조우하며 마지막으로 고정희로 마무리 된다.

  그 지난한 세월 속에서 여성의 삶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진지한 고민과 학문적 성찰보다도 오히려 그들이 남긴 자취를 더듬어 보고 현장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통해 그녀들을 반추하는 일이 우리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류의 절반인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 반문해 본다. 미래의 화두로 여성과 환경을 제시한 이윤기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이제 수 천 년을 숨죽여 온 여성성의 재발견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스럽게 거론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제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경주에는 치술령과 분황사터, 선도산과 여근곡이 있다. 그곳에 가면 박제상의 부인과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만날 수 있다. 강릉 초당리와 오죽헌에 가면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을 만난다. 부안 채석강과 곰소에 가면 매창을 볼 수 있고 수덕사에 가면 김일엽과 나혜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해남에 들러 고정희의 시를 읽어본다.

  한반도의 좁은 땅을 뒤져 이 나라의 역사에서 명멸했던 여성들의 삶을 만나는 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다. 여성 해방 운동의 선구자로서 대표적인 인물들을 탐방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올곧은 그녀들의 영혼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남성, 그들만의 리그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었던 여성들의 삶은 그녀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여성’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저 한 ‘인간’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시대를 앞서 생각하거나 살아가는 일은 모질고 고통스럽다. 무엇보다도 외로움을 선택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의 시대정신을 미래는 무엇이라고 정의할까 궁금하다. 자본의 욕망이나 경쟁의 논리로 무장한 사람들의 피폐한 삶을 미래는 어떻게 한 줄로 정리할 것인가. 과거의 상식이었을 평범을 거부했거나 소수자였던 그녀들의 삶의 궤적을 쫓는 일은 즐겁고 행복한 산책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는 일은 인류의 역사, 아니 우리들의 과거를 아프게 돌아보는 것이고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작은 화두를 발견하는 일이다.

  기획과 출판 의도를 뛰어넘는 저자 김현아의 글과 류의 사진들이 결합하여 이 책은 누구에게나 선물하고 싶고 읽히게 하고 싶은 책이 되었다. 때로는 답사의 과정을 생생하게 묘하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흔적들을 통해 그녀들의 생을 돌아보는 저자의 감각적인 문장과 사색들을 따라가다 보면 류의 사진을 만나게 되고 사진 안에서 다시 그녀들을 만나게 된다.

  그 곳에 가면 그 여자의 살았던 시대가 있고 그 여자의 삶이 있고 아직도 살아 숨쉬는 그 여자의 영혼과 만나게 된다. 역사는 반복된 미래일 수도 있겠다. 이 책에 소개된 곳에 모두 가보았지만 어렴풋이 역사의 흔적들만 돌아보았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배낭 속에 책 한 권 집어넣고 사진기 둘러메고 떠나라고 끊임없이 충돌질하는 문장들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제 ‘그 곳’에 갈 때는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해야겠다. 어디서든 볼 수 있겠지만 이 책에 소개된 곳은 특별한 시선으로 돌아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 여자’를 찾아보라는 저자의 숨은 의도를 발견하지 못할 뻔 했다.

  나무와 숲 사이로 사라져 버린 그 수많은 길들처럼 ‘그 여자’가 사라졌지만 세상은 또 다른 ‘그 여자’들로 가득하다. 우리 모두는 ‘그 여자’를 기억할 것이고 그녀들의 삶을 통해 더 많은 ‘그 여자’를 지금 여기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저기 멀리 서 있는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우뚝 선 ‘그 여자’를 위해 이 책이 쓰여졌다고 믿는다.


08043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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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5-0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지네요...

sceptic 2008-05-04 18:06   좋아요 0 | URL
문학적 기행문...여성들의 삶에 대한 기억들...을 더듬고 싶을 때, 혹은 여기 소개된 동네에 가시기 전에 한번 읽고 가시면 다른 의미가 전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키도 2008-05-13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혜석의 죽음 뒤에 붙는 불운한 그림자를 걷게 해준 책이지요.
누가 누구의 죽음을 제단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경주와 고정희가 있는 해남.
제 경험속에도 상실과 희망이 교차하는 곳이어서
참, 울림이 컸습니다.

앞으로 님의 서재에 자주 오게 될 것 같네요.^^

sceptic 2008-05-15 13:12   좋아요 0 | URL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 있는 책이었습니다.

무이님도 많이 공감하셨다니 이 책은 독자들에게 충분히 생각의 기회를 제공한 듯 하네요.

가끔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