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0
강용흘 지음, 장문평 옮김 / 범우사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아득한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 보니 나에게도 초당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놀라움. 초등학교 입학 전에 나는 교사였던 아버지 덕에 사택에 살았었다. 그 집이 초가지붕이었던 것으로 기억되어 있다. 70년대 초반의 풍경일 테니 틀린 기억일 수도 있다. 새마을 운동과 함께 시골집의 지붕부터 고쳤으니 학교 사택의 지붕을 기억하기가 쉽지는 않은 노릇이다.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곳은 마당에 상추와 가지가 자라고 담장엔 호박 넝쿨이 올라갔다. 재래식 화장실로 가는 길에 닭장이 있었는데 얼마나 사납게 홰를 치던지 그 앞을 지나지 못해 어머니가 데려다 주던 생각이 난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 같지만 30여 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시골에서도 초가지붕을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니까 강용흘의 <초당>이라는 제목은 가장 적절한 우리들 삶의 풍경을 나타내는 말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요소 중에서 신분 제도의 붕괴와 전통적 삶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일상적 시골의 풍경을 소설에서 만나는 것은 신선하고 새롭다. 그것은 우리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이었고 어린 시절 겪었던 마지막 전 근대의 생활과 문화를 간직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사라져 버린, 그러나 아직은 생생하게 잡힐 것 같은 아련함이 배어 있는 시기가 바로 그 때가 아닌가 싶다.

  강용흘은 1898년에 태어나 1972년에 미국에서 사망했다. 그는 스무 살 무렵 3.1 운동 후에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간다. 광복 후에 귀국해서 4년 정도 체류했지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생의 3분의 1만을 한국에서 보낸 그가 보여주는 한국은 우리의 과거이지만 낯설고 아름답다. 그것은 단순히 내부자의 시선으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것과는 차이가 많다. 미국에서 영어로 쓴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서 읽는 느낌은 미국과의 거리만큼 낯설기도 하다. 우리말 문장이 주는 점착적인 느낌은 없다. 사색적이고 차분한 서술과 객관적인 듯한 시선은 오히려 우리들 삶을 객관화시켜 주고 있다.

  1931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외적인 면에서 이채롭다. 앞서 언급한대로 미국에서 영어로 발표되어 구겐하임상 등 2개의 상을 받았고 한국에 번역 소개된 작품이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와 상황과 맥락이 유사하다. 세계 속의 한국인의 문학은 이제 어렵지 않게 되었지만 그 주제와 대상이 한국에 대한 혹은 동양적인 것들을 형상화 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면 서울에서도 고궁이나 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우리에게 특별함을 준다.

  가끔 이 책, 저 책에서 제목만 듣던 책을 주변 사람의 권유로 읽게 되면 감회가 새롭다. 친숙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책을 읽는 동안 즐거웠고 아득해졌고 현장감이 넘쳤고 내 것이 아닌 것들도 추억하게 되는 착각을 했다. 왜 아니겠는가? 그 파란만장한 20세기 초반의 한국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어냈던 저자의 체험은 우리에게 여전히 충분한 감동을 전달한다.

  마치 단편적인 기억들을 전해 주시던 어른들의 이야기를 쭉 모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구한말에서 개화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 3.1 운동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던 저자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생각과 태도를 갖고 세상을 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극적인 긴장감을 가지고 읽게 된다. 함경도 시골 마을에서 서울을 거쳐 일본에 유학하고 다시 서울에 돌아왔다가 중국을 거쳐 러시아로 가던 도중 체포되고 모진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고 또다시 3.1 운동 당시 고문을 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행 배에 오르는 과정은 한 편의 대하 라마를 연상시킨다.

  어린 시절 조모와 숙부들, 사촌들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1부는 백석의 시를 연상시킬 만한 우리 민족의 삶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실감나게 당시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문학의 힘은 생동감과 구체적 형상화의 힘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모습은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물론 어린 소년의 시각이지만 아련한 추억처럼 물컹거린다.

  우리가 살아왔던 전통의 모습이 무조건 아름답거나 애틋하다고 볼 수는 없다. 강용흘은 유명한 시인과 박사 숙부와 함께 살았던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자손이었다. 따라서 세상을 대하는 눈과 방법이 다르다. 인생의 목표는 일찌감치 박사가 되어 나라의 둘도 없는 일꾼이 되는 것이었다. 당시의 보편적인 희망과 목표였을 것이니 굳이 비난을 받을 수는 없겠으나 지독한 가난과 생존의 위협을 느낀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이었지 신분적 계급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저자의 눈을 통해 개화기 급작스런 생활의 변화와 일본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한 부당한 고문과 핍박은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더 이상 시골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던 저자는 보다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을 굳건한 의지와 결단 그리고 용기로 이루어낸다.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은 그래서 마치 꾸며낸 듯 파란만장하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오르기까지 스무 살 언저리의 청년이 겪기에는 험난하고 고통스런 과정이 펼쳐진다.

  이 소설은 한국문학에 대한 사전적 정의나 연구 대상과 무관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우리의 삶과 지나간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잊혀진 지난날의 추억이나 아련한 두근거림을 위한 감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할 만한 한 인간의 인생 역정을 통해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한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소설로 읽혔다. 그래서 일본에서 태어나 4살이 되어서야 한국에 돌아온 아버지의 삶을 추억하다가 <여행할 권리>에 등장하는 김연수의 아버지도 떠올렸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허망하고 쓸데없는 곳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지금은 21세기 역사의 현장을 살아가고 있다.


080612-0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읽어야 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고전이라고 한다. 그래도 의무감에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무심코 구미가 당기거나 관련 서적을 뒤적이다가 아직도 이 책을 읽지 않았구나 싶으면 그 때 천천히 음미해도 늦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실 좋은 핑계가 될 수 있겠으나 나는 늘 고전에 약해진다. 마음이 약해지지도 하고 읽지 않은 책이 많아 호기심이 생기는 책도 많다. 강유원의 말대로 결국엔 고전으로 돌아갈 지 모르지만 세상엔 즐길만한 책과 읽고 싶은 책이 늘어간다.

  그러나 때때로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수 많은 책들 속에서 손이 가거나 책다운 책(?)을 쉽게 발견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각자가 마련하는 것이겠지만 숙연해지는 마음을 갖게 하는 책,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책, 읽고 나서도 오래 여운을 남겨 창 밖으로 멍한 시선을 두게 하는 책을 만나는 것은 드물다.

  장르를 불문하고 그 책의 가치는 오랜 시간을 거쳐 많은 독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그래서 고전은 아마도 가장 믿을 만하고 안전한 독서 방법일 지도 모르겠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정말 ‘멋진 신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쉽게 눈치 챌 수 있겠지만 지독한 반어와 역설이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처럼 말이다.

  1932년이면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시즘과 제국주의가 유럽을 지배하던 망령된 시절이었다. 산업화로 인해 기계와 물질 문명에 대한 믿음을 굳건해지고 사람들의 의식은 종교와 사회적 변혁 속에서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헉슬리는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암울한 미래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과 기계문명에 대한 묵시록적 예언처럼 가슴 서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소설 속의 모습은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어쩌면 그 결과는 더욱 참담하게 예견되고 있다. 인간 복제는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 그야말로 개나 소나 복제가 가능하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나 <지구속 여행>처럼 기발한 상상력과 미래에 대한 보이지 않는 흥분과 기대가 뒤섞여 있는 소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며 가상의 미래를 통해 현실을 반성하게 하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소설이다.

  인간복제를 다른 수많은 SF 영화들은 옥덕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빚지고 있는 듯하다. 에이리언의 탄생 장면이나 인간복제를 다룬 영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창조적 세계에 대한 영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소설가의 상상력을 상상을 초월한다. 21세기식으로 말한다면 문화 컨텐츠 산업의 기수가 될 수 있었을 작가의 <멋진 신세계>는 여전히 인간의 현재와 미래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소설의 구조는 단순하다. 부모나 가족이 존재하지 않고 병 속에서 인공 수정을 통해 등급이 나누어진 인간들이 탄생한다. 알파, 베타, 감마, 엡실론 계급이 그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각자의 역할과 능력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갈등이나 경쟁이 없고 기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사회는 구성되어 있다. 무스타파 몬드라는 세계 총통이 태어나는 인간의 교육과 수요를 조절하고 신과 같은 존재인 포드님의 원칙들이 지켜지지만 어디에나 그렇듯 부정응 알파 계급인 버나드 마르크스가 야만인 구역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어머니의 아들인 존과 함께 문명 세계로 돌아온다. 레니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버나드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레니나, 당신은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으세요?”
“무슨 말을 하고 계신지 난 모르겠군요. 전 자유로워요. 자유롭게 가장 멋진 시간을 즐기고 있어요.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요.” - P. 112

“…… 하지만 레니나, 다른 방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자유를 원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당신 자신만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타인들과 같은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말입니다.” - P. 113


  진정한 자유는 문명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소마라는 약품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는 버나드는 제조(?) 과정에서 알코올이 과다 투여된 인간으로 의심받는다. 이유야 어떻든 그가 데려온 존은 세익스피어를 읽고 오델로를 인용하는 야만인이다. 레니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감정을 만들어주는 존은 결국 문명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들은 ‘외부생식과 신파블로프식 조건반사 훈련과 수면시 교육법’을 통해 시간은 걸리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프로그래밍 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생각,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은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인간의 조건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이라는 사실을 멋진 신세계의 인간들을 알지 못한다.

  올더스 헉슬리는 이 책에서 단순하게 문명 세계에 대한 비판과 미래 세계에 대한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댓가를 치러야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있겠는가?

“……인간에겐 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걸세. 행복도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야. 왓슨 군, 자네도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야. 자네는 미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불해야 하는 걸세. 나도 과거에는 진리에 너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네. 그래서 나도 그 대가를 지불했던 걸세.” - P.285

  세상은 더 이상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도 없고 과학과 기술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연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는 걸까? 그것이 매우 궁금해졌다. 우울한 우리들의 자화상, 아니 지구의 미래를 상상하다가 헉슬 리가 보고 싶어졌다. 지금 그가 살아있다면 과연 어떤 미래를 그려낼지! 인간 복제가 아니라 동물복제나 광우병으로 세상의 종말이 오는 소설 한 편 쯤 쓰지 않았을지! 인류의 미래보다 대한민국의 10년 후가 더 궁금해지는 2008년이다. 소설은 소설일 뿐?


080608-0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 궁리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은 착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법이란 착한 사람에게는 필요 없다는 전제가 되는데 과연 그럴까?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일정한 규칙이 없이 생활하는 게 가능할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자들의 일갈에 대해 살펴 볼 필요도 없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성선설을 믿든 성악설을 믿든 백지설을 믿든 모든 인간은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것이 선천적이든 학습에 의한 후천적인 것이든 그 접점에서 갈등은 시작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눈을 가리고 있다. 왼손에는 천칭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은 상징적이다. 불편부당한 법의 원칙을 강조하는 엄숙한 손짓은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 천칭이 균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던 ‘無錢有罪 有錢無罪’의 원리는 디케의 칼보다 무서운 원칙으로 작용한다.

  돈과 권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동일한 법 적용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그 대상이 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답하지 못하 것이다. 현실과 이상은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세상을 이끌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 법은 법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움직여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법적용의 원칙과 취지는 이상적이지만 현실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법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호소하는 많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고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법은 언제나 진실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 주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아마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 하지만 냉정한 현실과 마주할 때면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법을 가장 큰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법을 집행하고 법을 다루는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부와 권력을 거머쥐는 것과 동일시한다. 그 행위의 숭고함과 냉정함에 대해 고려해 볼 여지도 없이 현실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한겨레 신문에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2006. 9. 11)이라는 기고문으로 화제가 되었던 금태섭 변호사의 <디케의 눈>은 법에 대한 고민들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피의자가 됐을 때 행동지침을 서울중앙지검 검사 신분으로 일간지에 실었으니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지금은 변호사가 되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 때의 시선과 용기가 훨씬 숭고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 그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내부 고발자는 아니더라도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영화 ‘라쇼몽’으로 출발한다. 개인적으로도 자주 인용하는 영화라서 일단 반가웠다. 디케의 눈을 속이기 위한 사람들의 치열한 거짓말 혹은 스스로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에 대한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법의 존재 의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탄생한다. 검사보로 일하던 시절의 사건을 통해 혹은 유전자 감식의 발달로 인해 진화해 왔다고 하지만 법의 심판은 지금도 여전히 진실의 발끝만 매만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실을 찾는 것은 맨손으로 물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는 저자의 말은 순결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법으로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는 비관론이 아니라 법을 집행하고 혹은 법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진지한 외침이다. 정의正義를 무엇이라고 정의定議할 수 있을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LA폭동이나 두순자 사건, 패리스 힐튼 사건은 흥미 있게 법과 현실 사이의 고민을 읽어낼 수 있게 한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란다 경고의 유래를 통해 과연 우리 사회의 법이 지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고민해 볼 만하다.

  미국와 우리는 역사와 문화가 다르다. 하지만 가끔 그들에게 배워야 할 혹은 부러운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메리칸 드림도 맹목적인 반미도 우리에겐 필요없다. 냉정하게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현실의 문제를 고쳐 나갈 만한 이해와 용기가 필요하다. 1년에 88건의 사건을 맡는 미국의 대법원과 그보다 200배가 넘는 사건을 판결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비교하는 것도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민의 한 자락을 펼쳐 놓는다.

  저자의 ‘법으로 세상읽기’는 실제 생활과 관련된 사건이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법과 연결시켜 일반들도 ‘리걸 마인드 legal mind'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안다. 누구나 그것이 필요한 줄을 안다. 하지만 현실에서 누가 얼마나 법의 원칙을 따져가며 살며 많은 관심이 있는가. 억울하고 고통스런 순간에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이 법이기도 하고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해결해 줄 대상으로 법을 찾기도 한다. 우리가 법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언제라도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의 편이라는 사실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금태섭 변호사의 <디케의 눈>은 사람들의 눈을 밝혀 주길 바라지만 폭넓은 시야와 실용적인 상식을 제공하기 보다는 ‘법’ 자체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법을 통해 세상과 사람을 읽어가고 있는 변호사의 진솔한 이야기로 읽힌다.

  즐거움과 정보를 함께 전해주며 고민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금태섭의 다음 책도 사 줄 용의가 있다. 완결된 구조를 지닌 잘 짜여진 책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에 대해 혹은 유사한 상황들에 대해 한번 쯤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성찰의 기회가 되었다. 인권은 멀고 자본과 권력은 가깝다. 우리 사회가 조금 성숙했다고 느낄 수 있는 판결과 합의들이 계속 이루어지길 바랄 수밖에. 그래도 나는 법과 저만치 멀리 떨어져 살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080605-0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실을 찾는 것은 맨손으로 물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 P. 12

진실에 대해서는 항상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 P. 20

제삼자에게 객관적 진실이란 과연 있을까? 나는 내가 <라쇼몽>에 등장하는 나무꾼과 같이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내가 나무꾼일까? 그리고 과연 나무꾼의 말은 진실일까? - P. 35

어떤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혹은 외부의 적과 만났을 때 내부의 희생양을 찾아 구성원들의 단결을 이뤄내고 위기를 극복하려고 시도한 것은 역사상 흔히 있던 일이다. - P. 88

법은 나에게 항상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처럼 구애와 도전의 대상이었다. 온갖 암시와 신호로 가득 찬 법의 미로 속에서 진실의 단서를 찾아 헤매는 과정은 결코 나를 지치게 하지 않는 진지하고 스릴 넘치는 모험과도 같았다. 짧고 보잘 것 없는 글을 통해서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눌 동행을 찾을 수 있다면 나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 P. 2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교보문고가 있다. 주말에 한 번씩 들러 포식자가 먹잇감을 사냥하듯 천천히 서점을 산책한다. 나는 이것을 눈으로 즐기는 뷔페라고 하는데 그 포만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으로 실제 음식으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팔짱을 낀 채 분류된 코너 매대를 돌며 신간을 확인한다. 관심이 가는 실용서까지 훑어보는 것으로 에피타이저를 마친다. 본격적으로 벽과 스탠드형 책꽂이로 발길을 옮긴다. 일요일 오후의 여유 있는 만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분야별 개론서와 전문서를 일괄하고 한 권씩 꺼내들고 목차를 읽고 첫 페이지 첫 문장을 읽는다. 책등을 보인 채 일목요연하게 늘어선 책들의 제목을 훑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흐름이 파악되고 내가 읽은 책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상하좌우에 꽂혀 있는 책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의미를 되새기기도 하고 다름 도서 목록에 참고하기도 한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꺼내들고 강유원을 떠올리다가 <천의 고원>은 수없이 표지만 만지작거리다 도로 꽂아 넣는다. 장석주의 말이 생각나서 사지 않는다.

  철학 분야 윤리학 코너의 책등을 읽다가 피어 싱어와 짐 메이슨의 <죽음의 밥상>이 윤리학 책이라는 사실이 생각난다. 원제가 ‘The Ethics of What We Eat’이다. 윤리학의 주체는 항상 인간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도대체 먹는 것까지 윤리를 따져야 한다는 말인가? 자연의 약육강식이라는 기본적인 법칙으로 보아도 인간은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피터 싱어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옮긴이 함규진도 후기에서 이 책을 끝까지 번역하고 나서도 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고기를 먹었지만 자연스럽게 젓가락이 채식 쪽으로 기울었다. 앞으로도 베건이 될 자신은 없다. 완전 채식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면 양심적인 잡식주의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먹을 게 없단 말인가? 책은 나에게 희망과 즐거움보다 고민과 실천을 요구한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형적인 현대의 식단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양심적인 잡식주의자와 완전 채식주의자들을 살펴본다. 한 가정에서 먹는 일반적인 식탁의 풍경에서 시작해서 장을 보는 과정을 취재하고 그것들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하나 역추적한다. 소나 돼지, 닭이 키워진 농장의 현실을 파헤친다. 앨빈 토플러처럼 발로 쓴 <죽음의 밥상>은 올해 읽은, 내가 뽑는 추천 도서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이론에 치우치거나 일방적인 주장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농장의 잡부가 되어 바닥을 기고 ‘쓰레기통 다이버’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직접 쓰레기통 속에 뛰어드는 철학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피터 싱어가 쓴 이 책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론과 실천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가나 책을 만나게 되면 경외감을 느낀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공장식 농장에서 길러져서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과정을 알게 된다면 육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A4 한 장 크기의 공간에서 생의 전부를 보내야 하는 닭의 일생에 대해, 전기충격기에 의해 기절하지 않은 채 목이 잘려 뛰어다니는 소에 대해, 꼼짝 못하게 갇힌 돼지의 스트레스에 대해 나는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피터 싱어가 내세우는 동물에 대한 동정同情은 사실 인간에 대한 개념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각종 종교와 근대 시민 혁명을 통해 이루어낸 인종 차별의 극복과 남녀평등 등은 자연스럽게 인간과 동물의 ‘차별’ 문제로 이어진다. 그간 끊임없이 반박의 논리와 반대 이론들이 제기되었지만 인간의 종種차별주의에 저항하는 철학자 피터 싱어의 이야기는 한 마디 한마디가 살을 파고들며 뼈에 사무친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제 유기농은 낯설지 않다. 공정무역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나로서는 조금 더 많은 관심과 실천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좁은 면적을 가진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로컬푸드는 화석 연료의 사용, 지역경제 활성화, 우리 농민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문제로 얽혀 있다.
 
보통 미국인의 한 끼 식사는 그 거주 지역에서만 식재료를 구해 만든 식사에 비해 석유 사용량이 17배나 높다. 따라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17배나 높다. 따라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17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 P. 205

조그마한 텃밭이라도 스스로 가꾸고 상추 한 잎이라도 키워 먹어야겠다는 뼈아픈 자각들이 생긴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실천이다. 이 책 한 권으로 피터 싱어의 생각과 방법을 모두 알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겠지만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먹거리에 대한 윤리학이 철학적 문제를 동반하고 있으며 오로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산업이 되어버린 우리의 식탁을 돌아보게 되었다.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이라는 부제에 어울리는 긴 여행처럼 읽었다. 미친소 문제로 뇌용량 2MB임이 드러난 대통령 덕분에 이 책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고 국가가 국민위에 존립할 수는 없다. <리바이어던>의 가르침이나 <아나키즘 이야기>의 주장이나 <코뮨주의 선언>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실천적인 책 한 권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있는 법이다. ‘죽음의 밥상’이 아닌 ‘건강한 밥상’은 국가라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차려 먹어야 한다.


080602-0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