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 라면 교양 2
하승우 지음 / 뜨인돌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떻게 보느냐’가 ‘어떤 세상인가’를 결정한다.

책 표지를 넘기니 선명한 파란 색지에 검은 글씨로 한 줄 인쇄되어 있는 문장이다. 이쯤되면 제목과의 조합 속에서 어떤 관점으로 무슨 내용을 말하고 싶은지는 읽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청소년을 위한 ‘라면교양’이라는 재밌는 이름의 시리즈 중 하나이다. 1권이 <미국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면?>이다. 단순한 가정법을 위한 문장이 아니다. 뒤집어 생각하고 관점을 달리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는 뜻일 게다.

같은 하늘 아래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이 시대에 대한 해석과 분석은 제각각이며 대한민국을 규정하는 방식도 다양하기만 하다. 무엇을 볼 것인가, 어떻게 볼 것인가, 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문제는 세상은 살만한 곳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생각의 차이가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개인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성과 논리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으며 역사는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인류의 건망증은 지금 여기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읽어보지도 않은 권인숙의 <대한민국은 군대다>는 읽고 싶지도 않다. 권인숙을 알고 대한민국을 알고 군대를 알고 있다면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별 볼일 없다는 말이 아니라, 공감하기 위해 읽는 책이다. 고개를 주억거려 주고 때때로 한숨을 쉬고 씁쓸한 미소를 지어주는 것이 전부다. 미처 생각하지 않은 새로움이나 특별한 정보는 거의 얻을 수 없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판단이다. 왜냐하면 나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었으므로.

  청소년을 위해,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군대에 아직 가지 않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 있는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스펀지>에 나올만한 질문이다. 짐작한대로 답은 아니올시다. 저자 하승우는 책세상의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로 만난 적이 있다. 탁월한 솜씨에 감탄한 기억 때문에 저자에 대한 믿음과 제목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과연 군대란 무엇인가? 우스개 소리로 술자리에서 회자되는 군대에서 축구 한 얘기는 단군신화보다 유명하다. 간혹 확대 재생산되며 신화가 되기도 하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전설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풍자와 해학의 결정판이며 어떤 훌륭한 문학보다도 그로테스크하다. 웃어넘길 수 없는 군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차라리 공상 소설 시리즈를 읽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그것이 내 경험이든 타인의 간접 경험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런 군대가 우리에게 무엇인지 실질적이고 친밀하게 접근한다. 왜 군대에 가기 싫어하는지, 남자들의 진짜 속마음은 어떤지를 말하다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심드렁 할 정도이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함께 흥분하지 않는 내용이다. ‘병역 거부’와 ‘병역기피’에 대한 사람들의 이중적 태도가 그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마음 속으로 모두 병역을 기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나타내며 심지어는 심한 비난을 퍼붓는다. 환장할 노릇이다. 나만 손해 볼 수 없다는 이기적 태도의 반영이거나 노예근성에 대한 다른 방식의 표현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그들이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와 그것이 공시적, 통시적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고 있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비난해야 하는 걸까? 국적을 포기하고 돈을 처발라가며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병역을 기피하는 ‘그들’보다 양심적 거부자들이 더 나쁜(?) 사람들인가?

  강한 군대가 평화를 지키고, 군복무는 시민의 절대적인 의무이며, 대체복무를 인정하면 군대가 약해지고, 먼저 총을 내리는 건 바보짓이라는 생각에 대한 오해 혹은 진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땅의 예비역 혹은 미래의 군인들이여 이 책을 읽어보라. 아니 군대에 보낼 아들이 있거나 애인을 두었거나 형이나 오빠가 있는 사람은 한 번쯤 읽어보자. 그들의 눈물젖은 편지를 읽고 공감하고 위로하기 전에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군대’에 대해 다시 고민하자.

  남북 분단 상황에서 군대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전쟁에 이기면 우리는 행복해지는 것인가. 국라라는 이름의 괴물을 짝사랑하게 세뇌시키는 ‘애국심’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평화의 길은 그렇게 멀고도 험난하기만 한가. 끝이 없는 질문 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조금씩 자라고 세상은 조금 더 행복하게 변화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맺는말을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을 직선으로만 바라보면 시선에 잡히지 않는 다른 부분들을 보지 못한다. 지구도 둥글고 세상도 둥글고 사람의 삶도 둥글어서 우리는 유연한 곡선의 시선을 가져야 사물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 - P. 176

  인식의 힘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과 알고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상식과 진실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사실들이 과연 그러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순간 달라질 수 있다. 그때-거기가 아니라 지금-여기의 문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우리들의 현실이다.

  자, 여러분 대한민국 군대에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오신 분들과 함께 살고 계십니까? 혹은 군대에 가야하는 사람입니까? 애인이 군인이거나 친구에게 위문 편지를 쓰는 중이십니까? 약장수처럼 외쳐 봅니다. 현실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여러분에게 나옵니다.


080829-0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 이성에 눈 뜬 때가 초등학교 3, 4학년 쯤 될까? 긴 머리에 갸름한 얼굴, 웃을 때 초승달처럼 얇고 처지던 눈이 기억난다. 선영이였던가? 계몽사 세계 문학 전집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을까? <흰고래 모비 딕>, <플루타아크 영웅전>, <비밀의 화원>, <모히컨족의 최후> 등이 떠오른다. 처음 야구 글러브를 사서 품에 안고 잔 기억이 선명하고 축구화를 신고 그물망에 축구공을 차며 등교하던 모습도 생각난다.

  여러 가지 선택적 기억과 자기 암시에 의해 사람들은 저마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 살아온 생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은 없으며, 망각은 삶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인간이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상이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 볼 시간이 누구에게나 오는 걸까? 그때 어떻게 살았는지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한가? 아니 정당성의 문제가 아니지만 객관적인 재구성 또한 불가능하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소설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 하>는 자전적 소설이다. 아무리 감추어도 표현과 묘사 사진과 기억들이 완벽한 허구로 읽히지 않는다. 작가가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독자인 나는 이 짧은 생을 돌아보았다. 노년에나 해야 하는 짓을 미리 해보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지 싶다. 심각한 반성과 지나친 자만이 아니라면 재미있는 놀이가 되겠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은 매순간 모든 공간에서 뒤를 돌아보는 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아쉬운 미련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고칠 수 없는 단 한 번 뿐인 연극 무대의 주인공으로 어떤 연기를 선보일 것인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인공이 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또한 자기자신 단 한 사람인 경우가 있다. 지나간 드라마를 다시 보듯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쓸쓸하기도 하고 때로는 따뜻하기도 하다.

1. 기억과 망각

과거를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복용하는 바보들이 있다는 게 놀랍다. 아,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잊고 싶어, 하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망각이란 잔인한 것이다. 기억을 도와주는 마약은 없는 걸까? - P. 102

  주인공 얌보는 어느 날 사고로 모든 기억을 잊는다. 안개처럼 모호한 현실과 과거의 기억들이 혼재하지만 어떤 것도 분명한 것은 없다. 자신의 이름과 직업, 나이 그리고 아내와 딸, 손녀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고서적 전문가. 그의 시간 여행은 안개처럼 불투명하다. 친구와 가족,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이 노인은 누구인가?

  고향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게 된다. 오래된 책과 사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들이 스스로를 재구성하게 한다. 실존적 고민에 빠진 이 노인에게 정답은 없다. 어쩌면 모든 기억들이 퍼즐처럼 어지럽고 교묘하게 짜맞춰진 그림처럼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먼지 구덩이에서 발견해 낸 만화와 그림책은 그대로 얌보가 살아온 유년이며 이탈리아의 과거이고 인류의 역사이다. 기억은 현실의 조각들 속에서 발견된다. 흔적은 빛바랜 사진처럼 흑백으로 저장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지거나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얌보에게 주어진 삶은 과거의 현재의 연결 고리를 잇는 것만으로도 벅차기만 하다. 아련한 기억과 켜켜이 쌓인 세월의 먼지 속에서 퍼 올리는 추억들은 우리들의 그것과 같은 방식으로 재현된다. 파편화된 현대인의 삶은 이제 더 이상 50년 된 다락방을 허락하지 않지만 인간의 기억을 뛰어넘는 사물들이 간직한 기억은 확고부동하기만 하다.

인간에게 기억은 임시방편의 해결책일 뿐이다. 인생은 물처럼 흐르고, 한 번 지나간 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나는 기억이 없는 대신, 인생 초년의 경이를 처음부터 즐기고 있었다. - P. 364

2. 소년과 사랑

  검은 교복을 입은 릴라는 얌보의 첫사랑이다. 어둠 속에서도 변치 않는 한 줄기 빛과 같이 그녀에 대한 환상은 집요하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놓지 못하는 소년의 사랑. 그는 더 이상 노년의 얌보가 아니라 순수와 열정을 무기로 뜨거운 가슴을 식히지 못하는 소년이다. 안개처럼 사라진 그녀,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알게 된 그녀의 죽음은 허망한 인생보다 더욱 더 그를 절망에 빠뜨린다.

세상일을 나 몰라라 할 때면,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역사란 피로 얼룩진 수수께끼이고, 세계란 하나의 오류라고 말이에요. - P. 121

  그것은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녀를 기억했던 시간에 대한 절망이다. 과거와 현재를 잇지 못하는 망각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스러지는 찰나이기도 하다. 얌보의 사랑은 우리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체적인 개인의 기억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일반적인 패턴으로 전용된다. 누구나 그런 사랑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은 소년이기 때문에 사랑은 사랑이기 때문에 서로 뜨겁게 껴안을 수 없다. 그것은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 아니라 순수와 열정의 모순된 만남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그렇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남겨진다. 다만 추억만이 가슴에 남아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고 일렁이는 가슴에 돌을 던진다.

3. 죽음 혹은 그리움

  죽음의 순간은 내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가끔 흥미진진하기만 하다. 그것은 생의 종착역에서 느껴야하는 두려움이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연민이다. 누구나 걷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길에 호기심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임사체험>이나 <죽음, 또 하나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사후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그 찰나에 대한 혹은 그것을 맞이하기 위한 과정을 즐길 수는 없을까?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겸손해진다고 하는 데 이런 생각은 오만일까?

  얌보는 환상을 본다. 그것은 현실과 다른 세계에 대한 꿈과 희망이 아니라 스스로 재창조해 낸 세계에 대한 기억과 추억들이다. 과거의 증거들이고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낸 시간들이다. 그 속에 릴라가 있다. 죽음을 맞이하는 얌보의 모습은 슬프지 않다. 다만 현실 속의 에코와 오버랩되는 상상만 하지 않는다면 이 소설은 그저 한 생에 대한 진실한 보고서이며 삶의 과정과 순간에 대한 기억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모든 기억들을 쫓아낼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든 한 생애를 살아온 사람에게는 소중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의 결과가 현재이므로. 오래된 미래를 확인하기 위한 얌보의 노력은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노년 혹은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비슷한 패턴과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별한 죽음은 없다. 숭고함에 대해 논할 필요도 없다. 다만, 얌보의 말대로, 태양이 검게 변하는 순간까지 살아 있음을 확인할 뿐.

나는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건듯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올려다본다.
왜 태양이 검게 변하고 있지? - P. 723



080827-096, 0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미학이라는 학문이 있는 줄도 모르고 20년 쯤 살았고, 알게 된 후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 채 지금도 살고 있다. 미학은 그렇게 우리들 삶과는 무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생존과 직접 관련된 학문과 지식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대중들에게 친숙하고 즐겁게 다가설 수 있는 예술은 항상 친구처럼 곁에 머물러야 한다. 전문가 집단만을 위한 고급 예술이나 이론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과 문화는 쉽게 내면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의 개념을 통해 문화적 상징 자본의 중요성을 주장했겠지만 도대체 미학이라는 것의 실체는 아직도 내게 모호하기만 하다.

  고전에 해당하는 책들을 탐독하고 그것을 해설했거나 실제 적용 사례들을 살펴보아도 내가 ‘이것이다’라고 설명할 수 있을 만큼은 되지 않는다. 독학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공부하거나 이론적 토대를 체계적으로 쌓아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단하지만 즐길만하고 모호하지만 흥미로운 예술의 세계를 떠날 마음은 없다. 다만 명확한 실체가 포착되는 다른 분야의 무엇과는 구별되는 애매함이 늘 미진함으로 남는다는 말이다. 철학의 한 분파로 볼 수밖에 없는 미학의 특징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자위해 보기도 한다.

  <미학오딧세이 1~3>는 내게 진지한 마음으로 그림을 통해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고민하게 했다. 비록 남의 눈을 빌려 살펴보았지만 마그리트와 에셔의 그림에 매혹되었고 진중권의 감칠맛 나는 문장에 중독되었다. 그의 정치적 논객으로서 진중권의 포지션이 어디에 위치해 있고 어떤 식으로 열광적 지지 혹은 폭력적 비난을 받든 그의 목소리는 분명하고 논리 정연하며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다시 돌아와서 진중권의 책들은 정치와 미학으로 양분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떤 것도 놓치고 싶지 않다. 두 분야 모두 탁월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으며 날선 촉수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책을 읽을 것이다. 오래전에 나온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는 그야말로 현대적 의미에서 미학을 풀어낼 수 있는 이론가들과 예술을 접목시키고 있다.

  벤야민의 ‘산만함’에서 출발해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에 이르기까지 ‘숭고’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예술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분석하고 있다. 현대인의 관점이 아니라 다분히 철학적 함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분하고 지루하며 그 의미는 안개 속에 숨어버리기도 하지만 원전의 인용이나 개념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어 그나마 읽을 만하다. 출판사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처럼 진중권이 들려주면 미학도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조금 더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거나 이론적 깊이를 포기해야 한다.

  발터 벤야민, 마르틴 하이데거, 테오도르 아도르노,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장 보드리야르 등 8명의 철학자는 이름만으로도 현기증이 난다. 그드르이 책 한 두권씩을 건드려 보았지만 내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기만 하다. 쉽게 하나의 축으로 꿰어지지도 않고 어설프게 그들의 이론이 적용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두둔함의 증거일 뿐이겠지만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저자는 핵심 개념들을 선택해서 집중수렴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각 장마다 조금씩 연결되고 전체가 또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살아 숨쉬기를 바라는 저자의 노골적인 요구처럼 훌륭한 텍스트인지는 증거할 수 없으나 시간과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긴 여정으로 생각한다면 또 다른 텍스트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로는 충분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회이다.

  한 권의 책을 읽어나가는데 저자의 머리말은 항구의 등대와 같다. 글을 쓴 목적이나 핵심 개념을 밝혀 놓고 있으니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주변 경치를 제대로 즐기지는 못해도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여행이었으나 또 다시 떠날 채비는 갖추었나 보다. 희미한 풍경들 속에서 안개를 걷어내고 눈꺼풀의 이슬 방울을 털어내는 일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예술은 모든 현실에 대한 반영이며 결과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나 스스로에 대한 관심과 반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틈틈이 정리하고 확인하고 또 연결고리들을 찾아내는 연습은 계속되겠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속에서 그 의미를 확인하고 의도를 찾아내고 상징을 풀어내는 일은 하나의 놀이 일수도 있다. 즐거운 게임을 그만 둘 일은 없을 것 같다.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를 무한 증폭시켜 물신화하는 자본의 패턴은 이제 누구나 쉽게 적응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폭력과 그늘에 대한 시선을 거둘 수는 없다. 예술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눈과 그것에 대한 고민들이 어쩌면 현대미학의 역할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미학은 단순히 예술에 대한 숭고한 이데올로기가 아닐 것이므로.


080822-0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시대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아도르노의 말은 역사와 시대현실과 詩의 거리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지금은 서정시를 쓸 수 있는 시대인가? 그 기준은 시인마다 다르겠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서정시는 시의 본령으로 자리매김한 채 사람들에게 언어의 쾌감과 감정의 순수성에 기대왔다. 일제 식민지 지배가 극에 달한 시절에도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을 볼 수 있는 눈은 시인의 몫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서정시를 무엇이라 명명할 수 있을지는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태준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나가면서 서정시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늘의 발달>은 <가재미>로 촉발된 문태준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그의 시는 다른 시인이 접근하기 힘든, 아니 걷지 않는 길에 대한 ‘경외’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말의 의미망을 확장시키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나가는 힘은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시의 특징은 말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기막힌 의성어와 의태어의 배열이나 느린 템포로 사물의 동작을 집어내고 마음의 흐름을 짚어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시를 쓰는 사람은 무릇 다른 세계를 바라볼 줄 아는 눈과 특별한 감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부단한 노력이나 탁월한 감성이 어우러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무엇이든 그렇게 사랑하면 잘 알게 된다. 문태준의 눈에 비친 사물들과 사람들, 혹은 그늘들이 맑고 투명하게 비친다.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오늘은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말이 있어

길을 가다 우연히 갈대숲 사이 개개비의 둥지를 보았네

그대여, 나의 못다 한 말은

이 외곽의 둥지처럼 천둥과 바람과 눈보라를 홀로 맞고 있으리

둥지에는 두어 개 부드럽고 말갛고 따뜻한 새알이 있으리

나의 가슴을 열어젖히면

당신에게 미루어놓은 나의 말은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

작디작은 심장으로 뛰고 있으리

작디작은 심장이 두근거리며 막 껍질을 깨치고 나올 듯한 ‘나의 말’은 무엇일까? 시어의 다의성은 이렇게 읽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가능하도록 의미가 풍부하다. 누구에게나 그럴듯하게 적용되지만 아무에게나 비유될 수 없는 말들의 잔치가 흥성스럽다.

그물

수풀을 지나간다

가을벌레들이 운다

몇 겹의 그물

완만하고 탄력이 있다

촘촘하다가 헐렁하다

발이 폭폭 빠지지는 않는다

내 심장보다는 크게 얽어놓아

멈추어 서게 한다

잠시 끌었다가 살짝 다시 놓아준다

당신과 내가

언제부터 이곳서 살았던가,

바람을 타고 날아 흩어지는

  가린 것도 보이는 것도 아닌, 막힌 듯 뚫려있는 그물에 대한 반응은 새롭다. 자연과 교감하거나 함께 호흡하는 사람의 모습만큼 평화로운 것은 없다. 당신과 내가 언제부터 이곳서 살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모든 것은 무화無化된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모든 것은 그물 사이로 달아났다.

장님

찔레나무에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그 곁에
오금이 저리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의 의혹이 생겨났습니다
그대의 가슴은 어디에 있습니까
찔레 덤불 속 같은 곳
헝클어진 곳보다 보다 안쪽
막 눈물이 돌기 시작하는 곳
그곳으로
날아오는 새와 날아오는 구름
그곳으로부터
날아가는 새와 날아가는 구름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막 눈물이 돌기 시작하는 곳이 가슴일까? 세상의 모든 사랑은 가슴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그곳이 새와 구름의 둥지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그곳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영원회귀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

흔들리다

나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다
나는 중심
코스모스는 주변
바람이 오고 코스모스가
흔들린다, 나는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고 있다
코스모스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때
중심이 흔들린다
욕조의 물이 빠지며 줄어들듯
중심은
나로부터 코스모스에게
서서히 넘어간다
나는 주변
코스모스는 중심
나는 코스모스를
코스모스는 나를
흔들리며 바라보고 있다


  기막히다. 나의 주변이 코스모스였다가 내가 코스모스의 주변이 된다. ‘흔들리며’ 바라보는 나와 너의 모습이 다를 리 없다. 하나가 되기 싶어도 중심조차 흔들린다. 가끔 바람이 불어오지만 그것은 핑계일 뿐이다.

  그러나, 결국 내가 코스모스가 되고 코스모스가 내가 되는 일은 없다.

살얼음 아래 같은 데 1

가는, 조촘조촘 가다 가만히 한자리서 멈추는 물고기처럼

가라앉은 물돌 곁에서, 썩은 나뭇잎 밑에서 조으는 물고기처럼

추운 저녁만 있으나 야위고 맑은 얼굴로

마음아, 너 갈 데라도 있니?

살얼음 아래 같은 데

흰 매화 핀 살얼음 아래 같은 데


  살얼음 아래 같은 데 조으는 물고기처럼 사는 게 마음이 아니라면 그렇게 시리고 맑고 투명하게 빛날 수 없다. 갈 데 없는 마음은 고여 있고, 고인 마음은 어디 흐를 데를 찾아 헤매게 마련이다. ‘조촘조촘’ 가다가 혹은 얼어버리기도 하지만 살얼음은 언젠가 녹아 흐른다.

이별이 오면

이별이 오면 누구든 나에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후련하게 들려주었으면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면서
바지락과 바지락을 맞비벼 치대듯이 우악스럽게 바지락 씻는 소리를 들려주었으면
그러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틀어막고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겠지
가장 아픈 데가 깔깔하고 깔깔한 그 바지락 씻는 소리를 마지막까지 듣겠지
오늘은 누가 나에게 이별이 되고 나는 또 개흙눈이 되어서


  그렇게 사람 사는 세상과 이별의 순간이 오겠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물들과 이별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시인은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별의 고통이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우악스럽게 바지락을 씻을 때처럼 온 힘을 다해도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생채기를 내도 결국은 제자리 걸음이다. 어디 떠나 본 적도 없고 한 걸음 다가서지도 못했을 뿐!

  <그늘의 발달>은 문태준의 지금과 우리시의 내일을 함께 보여주는 것같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신호탄을 쏘아올리지만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제각각이다. 문태준 시의 진경을 이제부터 가만 기다려 볼 참이다.

  엉뚱한 상상 하나. 동갑내기 동향출신인 김연수와 문태준은 친구일까?

080820-0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낭만아파트 - 바보, 문제는 아파트야! 우리 시대의 위험한 문화코드 읽기
허의도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장면 1. 1980년대

  “아파트로 이사갈래?”
  저녁 식사 자리로 기억하는데, 어머니의 말에 모든 식구가 반대한다. 그게 사람 사는 집이냐, 닭장에서 어떻게 사느냐, 성냥갑처럼 갑갑하다……
  “싫으면 혼자 간다.”
  그렇게 아파트 생활이 시작되었다.

# 장면 2. 2000년대

  “그 집이 국회의원이 나온 집입니다. 터가 좋은가 봐요.”
부동산 중계업자의 말을 듣고 입맛이 떨어졌다. 정치인이 살던 집이면 정말 재수 없는 집이라고 생각하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누군데요?
  “단병호라고, 왜 있잖아요, ……”
  민노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전 민노총 위원장 단병호. 순간 나는 멈칫했다. 그 분이 아파트에 사셨다니……. 농담이 아닌가 했고 사실이라면 기막힌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노동운동의 대부 전 민노총 위원장의 이름을 듣는 순간 고민은 사라졌다. 전 전주인이긴 하지만 존경하는 분이 살았던 집이라니……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중계업자에게 계약하자고 말해 버렸고 그 곳에서 밤마다 책을 읽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참 대책 없는 인간이다. 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배곯아보지 않은 먹물의 배부른 푸념일 수도 있겠지만 돈의 위력과 힘에 압도되어 본 적도 그것을 부러워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생활은 생활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의 아파트 생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농촌 생활을 해 본적도 없으면서 늘 마음은 산에 가 있다. 단순한 동경과 낭만이 아니라 최소한 땅과 호흡하고 나무를 볼 수 있는 공간들이 필요하다. 언제 그 도서관 같은 주택으로 이사할 수 있을 지 기약할 수 없으나 누구에게나 소박은 희망은 있는 법이다. 사방팔방 아파트 콘크리트 덩어리로 둘러싸인 이곳은 수용소나 군사시설을 연상시킨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소통하는 공간으로 생활의 터전이 되지 못한다. 이곳은 신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욕망의 블랙홀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과연 ‘아파트’란 무엇인가? 그 의미를 묻는 것은 실존적인 고민해 해당된다. 삶의 뿌리와 기반의 문제이기도 하고 사회적 계층과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면 미래와 희망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나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허의도의 <낭만 아파트>를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치적 입장과 사회경제적 위치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반칙은 아니지만 이 책의 저자 허의도의 입장은 매순간 삐걱거린다. 책을 쓴 목적도 입장도 모호하고 구석구석에 드러나는 모순은 읽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중앙 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월간중앙’ 편집장이면서 ‘이코노미스트’ 편집인인 그는 아파트가 없다. 나의 경험을 본문에 소개한 것을 보면 대한민국 아파트 투기 광풍의 피해자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산업은행에 다니던 시절 아파트를 분양받고 퇴사하면서 팔아버린 사연이나 그 후 최근에 구입 기회를 놓쳐 버린 경험은 책의 성격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저자는  우리나라 아파트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그것이 어떤 사회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탄생했는지 설명한다. 먼저 아파트를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는 1부는 박정희와 건설 공화국의 의미를 고찰하는 데서 출발해서 IMF를 거쳐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이르기까지 경제 문제와 아파트의 상관관계를 짚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 논의는 대단히 주관적 판단에 의지하고 있으며 감상에 기대고 있는 면이 많다.

  아파트를 키워드로 우리 경제의 발전과정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일관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아니면 2부에서처럼 문화사회학이라는 측면에서 아파트의 의미와 역할을 집중적으로 풀어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두 다양한 관점이 하모니를 이루는 게 아니라 이성과 감성의 어설픈 만남으로 읽혀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나만의 감상일 수 있으나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과 분석을 전제로 하는 기획이거나 사람들의 삶을 중심으로 아파트를 들여다보는 문화적 관점에 철저했다면 훨씬 읽을 만 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는 시인으로 등단해 한 권의 시집도 펴내지 못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문장들은 읽을 만하고 인용된 내용이나 적절한 비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충분한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 낸다.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니고 나와 무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아파는 건설 공화국, 아파트 공화국으로 명명될 만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아프게 그려낸다. 개발 독재 시절의 고통과 아픔은 이 시대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으며 그 시절을 추억하고 향수에 젖은 사람들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물론 노무현의 ‘아파트’는 한 두 마디로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는 어느 아파트 광고의 카피를 기억한다. 역겨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슬픈 천민 자본주의의 단면을 드러내는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아파트는 오늘도 안녕한가? 아니 내일도 모레도 영원히 안녕할 것인가 궁금한 사람들은 이 책을 뒤적여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옹호론자든 반대론자든, 강남 공화국 시민이든 아니든 입장은 다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한 손은 뜨거운 물에 한 손은 얼음물에 담근 사람처럼 묘한 표정을 짓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울을 보면 된다.


080818-09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licia 2008-08-1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찜했는데.
벌써 93권. ^^
잘 지내시죠, 건강하신거죠?


sceptic 2008-08-20 18:26   좋아요 0 | URL
잘 지내고 있습니다...^^

2008-08-20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22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