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를 꿈꾸며’중에서

  프랙탈 구조는 전체 구조가 부분 속에 나타나고, 부분의 자기 증식이 전체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무한 반복의 구조 속에서 순환의 논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증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본다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물론 개인적인 감동과 사색이겠지만 한 번 날개 짓으로 구만리를 날아간다는 붕새보다 길가의 핀 풀꽃의 흔들림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다운 소리를 정의할 수는 없다. 객관적일 수 없는 일에 기준을 마련하는 일만큼 무모한 일은 없다. 사람마다 다른 소리의 즐거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침묵은 소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음의 반대편, 잡음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침묵이다.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분명한 하나의 소리이며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있다.

  물론 그 침묵은 무언의 말과 보이지 않는 메시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 평화의 경지이며 무소음의 세계이고 정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뜻한다. 소리가 없다는 것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니 모든 사물이 그 자리에 정지화면으로 멈추어 선 상태를 말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한 소리 없음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를 가로지르는 침묵에 대해 깊은 사색과 다양한 관점을 소개한다.

  침묵의 모습은 어떠한지에 대해 시작해서 인간을 둘러싼 말과 침묵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시 이야기하고 침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말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소통과 의미의 전달이 사실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발성 기관을 통해 언어로 표현되는 입말만이 소리라고 정의한다면 범위가 너무 좁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침묵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나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소리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바람소리를 통해 우리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소리가 만들어내는 생의 감각을 절감한다. 우리에게 소리는 삶의 조건이며 이유이고 확인이다.

  하지만 영원히, 끊임없이 소리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수는 없다. 만약 침묵이 없다면 소리도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침묵은 휴식이고 안정이다. 놀라운 것은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침묵’에 대한 집중력과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이다.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수많은 작가들을 보아왔지만 <침묵의 세계>의 저자는 집요하다. 깊은 사색과 오랜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면 쉽게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갸웃거리며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침묵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자아, 사물, 역사, 형상, 사랑을 주제로 침묵을 이야기하던 저자는 자연과 농부로 시야를 넓히고 ‘詩’와 침묵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조형 예술은 물론이고 잡음어로 표현된 소리와 침묵의 관계는 마치 살아 있는 대상과의 한 판 승부를 보는 듯하다. 라디오는 침묵의 절대악이 아닌가! 저자는 주제에 걸맞게 ‘라디오’가 지닌 속성을 통해 침묵을 돌아본다. 침묵이 없는 세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마지막으로 신앙과 침묵의 관계는 제목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하고 있다. logos와 pathos의 세계를 넘나드는 하느님의 말씀은 신앙의 전부가 아니지만 저자에게 신앙은 곧 하느님과 일치한다. 어쨌든 이 세상을 구성하는 본질은 말에서, 즉 소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침묵은 더 큰 세계를 감싸고 말과 소리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훨씬 더 큰 의미로 여겨진다. 한계를 말할 수 없는 침묵의 세계에 대해 저자 막스 피카르트는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침묵은 단순하게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둠은 침묵과 닮아있다. 하루에 두 마디만 하고 살았던 학창 시절도 있었지만 침묵하고 싶을 때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히기도 한다. 창밖에 내린 어둠은 대체로 말이 없고 소리를 흡수하며 휴식과 안정을 준다. 침묵에 대해 한번쯤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면 이 책은 충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아니 우리 주변의 모든 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면, 내가 뱉어내는 말들의 의미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면 이 책은 책 이상이 된다. 소리없는 세상은 침묵조차 소음일까?


0810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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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레꽃 2009-03-17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보고 갑니다. 친구의 추천으로 이 책을 찾게 되었는데 '인식의 힘'님의 글을 읽으니 책이 확 당겨지네요. 군더더기 없는 문장, 참 인상적입이다.

sceptic 2009-03-24 23:02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하는 책입니다. 즐거움으로 가득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