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일본의 요시노 히로시라는 살마이 쓴 「생명은」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안에 “생명은 그 가운데 결여를 안고, 이것을 타자가 채워주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생명 곧 ‘낱생명’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것이어서 결여를 안고 있는데, 그것을 타자 곧 그 ‘보생명’이 채워준다는 저의 온생명이론을 아주 실감 있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같이 가야 한다고 봅니다. - P. 58(장회익)

현상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그래서 보는 위치 곧 기준좌표의 전환에 따라 사룸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를 분명히 구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좌표변환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으면 내게 보이는 것만 옳고 남이 다른 위치에서 달리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P. 59(장회익)

여기서 중요한 점은 좌표변환이라는 것이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늘 좌표변환을 통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가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좌표변환을 해보는데도 상대방의 태도가 납득되지 않을 때 상대방이 틀렸다고 판정하고 분쟁이 발생합니다. 여기서 상대성이론이 주는 교훈은 내가 하는 좌표변환 그 자체가 불완전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간단한 물리현상들조차 4차원의 좌표변환을 해야 제대로 이해가 되는데, 복잡한 사회현상들이 단순한 상식차원의 좌표변환만으로 처리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4차원 못지않은 고차원적 좌표변환이 요구될 것으로 보고 이 점에 대해 서로 간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P. 60(장회익)

이분법적 양극화현상들인 전통과 혁신, 한반도의 세계, 보수와 진보, 남과 북, 동과 서, 빈 부, 아니든 세대와 젊은 세대 갈등 등이 불가피해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포월(匍越)의 전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탈(脫/post-), 가로지르기(cross-), 사이(inter-), 횡단(trans-)의 전략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화는 학제적(interdisciplinary), 융합적(fusionist), 통섭적(consilient)이라는 말들이 가장 적합한 핵심어가 아닐는지요. - P. 76(정정호)

민주주의도 하나의 통치체제이기 때문에 권력이 민주주의를 통해 창출됐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권력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제도를 통해 견제되고, 민주적으로 통제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권력의 창출과 권력의 견제는 민주주의의 두 개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 118(최장집)

문학론에서도 문맥은 텍스트의 의미결정에 참여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콘텍스트가 텍스트의 의미를 좌우하는 수도 많지요. - P. 211(도정일)

인간의 사상, 생각, 아이디어가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죠. 그들의 ‘생각’이 아니었다면 근대 민주주의, 자유, 인권, 평등은 불가능했거나 한참 더 기다려서야 가능했을 겁니다. 사유와 행동, 지식과 실천을 결합하는 것이 인문학적 실천이고 이런 실천은 지금 이 시대에 절실한 요청이 되고 있습니다. - P. 231(도정일)

하나의 개념은 다른 여러 개념과의 연쇄 속에서만 진실에 가까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만으로는 진리의 왜곡이 일어나지요. 통일을 절대화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 P. 261(김우창)

“답은 문제에서 나오기 때문에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 P. 293(김우창)

종교의 문제 중 하나는 사람의 마음이나 존재를 열어주는 게 아니라, 어떤 도그마에 갇히게 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해서 유보를 가지게 하는 이유의 하나일 것입니다. … 말이나 도그마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거나, 포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겸허하게 삶의 사실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필요합니다. - P. 321(김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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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의 모색 -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장회익.최장집.도정일.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시대를 규정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역사에서 어느 시대를 이야기하든 사람을 떠나서 불가능하다. 역사가 인물 중심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빚어내는 결과물이 우리들의 역사라는 말이다. 역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낸다. 그 결과물들이 시대정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법과 제도는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수의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온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시대를 성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며 인간의 지적 토대위에 미래를 설계하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보편성과 일반성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특수한 계층에 기댈 수밖에 없는 모순된 상황을 꼬집었다. 결국 지식인의 기능과 역할은 이러한 자기 계급의 모순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실천적 지식인이 필요하고 그 지식과 실천의 방향이 누구를 향한 것이며 어디에 그 지식이 사용되어야 하는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늘 이 시대의 지식인이 아쉽다.

  존경할 만한 지식인을 가진다는 것은 그 사회의 축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회의 역량과 토대에서 길러지는 지식인의 수준은 단순한 주입식 교육이나 물적 토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다시 태어나는 새처럼, 비상하기 위해서는 젖은 날개를 파닥이며 잠을 깨어야 한다. 잠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또 절망적인가.

  모든 시대는 혁명을 배태하고 있으며 그 선택은 다수에게 있지 않았다. 전환을 모색하는 것은 소수였으며 그것을 추동할 수 있는 저력은 성찰과 신념으로부터 비롯된다. 통찰력은 저절로 생성되지 않는다. 의식적인 노력과 고통이 필요하다. 희망을 이야기하려면 고통과 절망의 얼굴과 대면해야 하는 법이다.

  이 시대에 <전환의 모색>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모든 시대에 전환을 모색해 왔다. 문제는 시기가 아니라 방법과 태도가 아닐까. 전환해야 한다는 인식으로부터 전환은 시작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어불성설일 뿐이다. 아니, 이전시대로 전환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 전환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기준 자체가 흔들린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전환은 전환이니 말이다.

  인권은 축소되고 기업가는 살만하며 부자는 세금을 돌려받는다. 생각의 전환은 사물을 보는 방향과 목적부터 달라지게 한다. 과연 우리 시대는 전환인 필요 하느냐는 질문부터 마땅히 시작되어야 하는건 아닌가 싶다. 대담집 <전환의 모색>은 전제부터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한심한 투정부터 나온다. 그들(?)의 눈에 전환이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비춰질 것인지도 궁금하다는 말이다.

  ‘온생명’ 사상을 주장하는 장회익, 민주주의는 곧 부패할 것이라고 말하는 최장집, 시장 유일주의에 대해 경고하는 도정일, 인간 실존의 구체성과 보편성을 탐구하는 김우창 등 이 시대의 지식인이라 할 만한 분들의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혔다. 몰라서 실천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방법론과 실천적 의지가 부족한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아니 어쩌면 그것들을 합의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초등학교 때 이미 배운 것들에 대한 덧칠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학문적 관점에서 그들의 사상과 의식의 흐름들을 살펴보는 일은 즐겁다. 대담자로 나선 분들도 각 분야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충분한 학문적 성과를 일구어 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이 네 분을 이어갈 만한 지식인이라 불리워질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단순한 학력과 지식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통찰하는 눈과 그것을 만들어나가는 힘, 실천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쉽지 않겠으나 이 시대는 영웅보다 작더라도 주변을 바꾸어나가는 리더가 많이 필요한 시대라고 본다.

현상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그래서 보는 위치 곧 기준좌표의 전환에 따라 사룸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를 분명히 구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좌표변환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으면 내게 보이는 것만 옳고 남이 다른 위치에서 달리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P. 59(장회익)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고 나는 좌표변환에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상식 차원의 좌표변환만으로는 어림없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뜨끔했다. 아직 멀었다는 자괴감. 당연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지나친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을 해본다. 이 좌표변환의 힘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는 오랜 버릇이 내 안에 있다. 열린 사람과 닫힌 사람으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그 기준과 가능성에 대해 한참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실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상황뿐만 아니라 이 사회와 정치,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과 사유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지식인은 이것을 쉬운 말로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책무이다. 권력과 지위를 얻고 개인적인 이익과 특수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식인을 우리는 쓰레기라고 불러 마땅하다. 그 기준과 잣대를 분명히 하고, 실천적 지식인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태도가 정착된다면 함부로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권력의 부나비가 되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정치와 지식인의 관계, 권력에 복종하는 지식인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가장 효율적인 현실 개혁의 방법으로 선택한 선한 의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개혁의 목적과 방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네 사람의 대담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육성을 듣는 효과와 대담 형식의 자유로움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집중력이 흐려지고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지만 깊이 있게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다루지 못한다는 당연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회오리같은 대선 정국이었던 2007년에 이루어진 대담이라는 시기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전환을 모색했지만 현실은 눈뜨고 볼 수 없어진다.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부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우리’를 ‘나’로 바꿔놓고 읽으니 막막하기만 하다. 걷고 있지만 저 멀리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은 이 시대에도 기묘하게 적용된다.

“답은 문제에서 나오기 때문에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 P. 293(김우창)

  답을 구하고 싶은 시대가 아니라 문제를 설정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제를 들고 뛰어나와 서로 다른 목소리로 외치고 있으며 그 목소리를 외면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우리의 모습은 쨍한 겨울 하늘처럼 차갑기만 하다. 대담은 대담으로 끝났다. 아무도 답을 주지 않는다. 스스로 답을 구해 볼 밖에. 답을 구하기 전에 문제부터 만들어보자.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08121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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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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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부재를 통해 그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낸다. - P. 17

  흑백 사진처럼 선명한 기억은 부재를 증명한다. 현존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그리움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에게 지나간 시간은 다가 올 미래보다 찬란하다. 과거지향형 인간이 아니더라도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것들은 과거의 결과물이라는 것임을 절감한다. 이 모든 삶의 비극은 일회성에서 비롯된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혹은 간절함.

  단 하나의 문장으로 사유의 실타래가 자연스럽게 풀어지고 상황과 맥락에서 벗어나 몽환적 상상의 세계를 주유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다 창밖을 내다보며 하늘을 쳐다보고 길게 한숨을 쉬기도 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낄낄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소설은 사건 전개의 흥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승우의 소설집 <오래된 일기>는 빛바랜 누런 일기장의 표지를 들추는 것처럼 아득하다. 타인의 삶이 보여주는 진정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그의 소설은 아름답진 않지만 독자를 사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과연 우리들 삶의 결에 배어있는 무늬들은 어떠한가. 수많은 빗금들과 켜켜이 내려앉은 먼지들 사이로 오래된 일기장을 넘기는 마음으로 그의 소설들이 읽혔다.

  소설집을 읽고 나서 다시 차례를 보면 단편의 제목들과 내용이 뒤섞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단편들은 선명하게 떠오르며 각 단편들이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충격적이고 특이한 사건들이 모여 독자에게 각인되는 소설들은 아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평범하고 전형적인 인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 평범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찬찬히 들여다보면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서로 부대끼며 상처받고 아파하며 서로 위로 받기도 한다.

  이 책에는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불행’의 친구들이다. 하지만 그 불행이 낯설지도 이물스럽지도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건 아마도 우리들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잘도 들춰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는 부조리하다. 인생은 불편하며 삶은 신산스럽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우리들의 마음과 근원적인 외로움에 대해 불편한 심사를 드러낸다. 그 목소리는 불협화음이다. 행복을 가장한 생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행의 그림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모두 행복을 기원하지만 아무도 불행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려 하지는 않는다. 그 원인과 과정을 정면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이승우는 그 마음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을 보여준다. 나는 그들이 불편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애련하다. ‘오래된 일기’의 규가 그렇고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의 상규가 그러하다.

  ‘타인의 집’의 그녀는 ‘나’를 볼 수 없다. 세상은 거미줄처럼 얽혀있고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인식할 수 없다. 공감이라는 심리적 배려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유추를 통해 그 마음을 짐작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나는 너가 될 수 없고 너는 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기본전제를 부정할 때 불행이 시작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전기수 이야기’와 ‘실종 사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회 구조적 모순 속에 불행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외로움과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타인과 사회 속에서 겪게 되는 불행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물론 작가는 그 불행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주목한다.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자세로 그것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어쩔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으로 나뉜다. 인간의 의지로 감당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혹은 불가해한 불행에 대해 성찰하기도 하는 것이 ‘방’의 할머니일 것이다.

  이 책의 말미를 장식하는 ‘정남진행’과 ‘풍장-정남진행2’는 만남과 떠남이라는 아주 오래된 주제를 변주하고 있다. 정동진이 아니라 정남진이라는 다소 생경한 공간을 통해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곳에 가고 싶은, 그러나 가지 못하고 죽은 여자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가슴앓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섬의 일부가 되어 버린 남자는 과거와 현재 속에서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한다. 그것은 내게 운명과 우연의 차이로 읽혔다. 숙명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인생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고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재미없는 연극일 뿐!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떳떳한 일일까. - P. 34

  그래서 문득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이라는 깨달음. 한없이 겸손해지고 한없이 작아지고 한없이 주위를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단 한 사람도 떳떳한 사람이 없다는 비극의 확인. 오늘도 우리는 세계의 불행과 직면했으며 하루를 살아냈다. 소설가는 운명적으로 그 불행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이승우는 그 역할에 충실했다. 독자는 <오래된 일기>를 통해 작가의 일기를, 아니 우리가 차마 쓰지 못한 일기의 행간을 읽어내야 한다. 그것이 작가가 보여주려 했지만 우리가 읽지 못한 이 책의 나머지가 될 것이다.


08121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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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은 어쩌면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오래된 저장 장치일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누구나 아득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 기억들이 고스란히 내 것인 경우는 없다. 편집되고 채색되며 과장되거나 축소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답게 혹은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된다. 사실, 객관적 기억이란 건 없다. 심리적인 기재가 작동하기도 하고 왜곡된 감정이 개입되기도 해서 비틀어지고 희미하며 모호하다.

  한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경우, 우리는 그 삶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개인의 삶에 앞서 공적인 기록이며 기억할만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은 온몸에 불을 지른 채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며 죽어갔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직도 살아있다. 그녀의 구술을 기록한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읽다가 여러 번 목이 메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이 시대 어른의 기억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간직한 기록이고 역사이다. 신산스런 시대의 아픔이고, 피눈물로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들이다. 굴곡진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녀를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가진 상징성 때문이다. 한 순간 불꽃처럼 살다 가버린 아들에 대한 부채감으로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견디기 힘들어 보인다. 어떻게 살아도 한 세상이었겠지만 그녀가 감당했던 모진 시간들 앞에서 저절로 경건하고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다.

  “엄마, 배가 고프다…….”는 전태일의 마지막 말에 엄마 이소선은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을까. 이땅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가져야했던 당연한 권리와 당연한 임금을 우리는 경제발전이라는 말과 맞바꾸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배가 고팠고 고통스러웠으며 말하지 못했고 잠들지 못했던 시간들을 견뎌왔다. 그 중심에서 우리들의 어머니 이소선은 묵묵히 그들에게 밥을 먹이고 혹독한 시간들을 살아냈으며 이제는 여든의 노인이 되어 지나간 시간들을 말하고 있다.

  구술한 내용을 정리해서 이 책을 쓴 오도엽은 ‘인간의 역사란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의 투쟁’이라는 말로 이 책의 의미를 갈음한다. 우리들의 기억에 한계가 있다면, 그것이 언젠가 망각의 강을 건너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기록한다. 이 책은 이소선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역사이며 잊어서는 안 되는 이 시대를 살아 낸 노동자들의 기억이다.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찾아갔다가 이소선의 마지막이 아니겠냐는 인사가 인연이 되어 이 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책의 앞부분에는 이소선의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가 그대로 구술되어 있다. 너무나 정감있고 친근한 그 목소리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의 말투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온 시간이나 지나온 흔적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남자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고통과 시련들을 견뎌낼 수 있었던 그녀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었다.

  가난한 날의 질긴 인연으로 결혼하고 전태일을 낳고 쌍문동에서 살다가 아들에게 근로 기준법을 배우고 그 아들을 먼저 보낸다. 그 이후 이소선의 삶은 많이 달라진다. 생활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라 태일이 대신 아들들이 더 많아졌다. 가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넉넉해졌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고 이 땅의 노동현실을 바로 보게 되었다.

  2008년에 이소선의 기억들을 더듬어 가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서 받아주지도 않는 현실이 되었다. 노동자들 사이에도 계급이 생긴 것이다. 국민 총생산은 늘었고 굶어 죽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부의 분배 문제와 노동 문제는 여전히 폭력적이다. 기륭전자, KTX 여승무원 문제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현재 진행형으로 이소선의 기억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 전 하종강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악수를 하다가 울컥했다. 몸이 약해지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하지만 멀리서만 바라보던, 일당백의 역할을 해 오신 그분들의 모습은 이제 우리 시대가 기록해야 한다. 그분들이 떠나고 난 빈자리를 또 다시 이 땅의 후배들이 채워나가야 한다. 아니 어쩌면 그 자리를 더 이상 채울 필요가 없는 시대가 와야한다.

  그러나 이 시대를 돌아보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끝을 알 수 없는 무한경쟁 시대, 신자유주의 물결과 세계화는 양극화만 심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발 빠른 종부세 환급 등의 정책은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누가 뽑은 대통령이며 누가 만들어준 정부인지 국민들은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영화 <월․E>에서 이브가 고장난 월․E의 부품을 갈아 끼우자 잠시 기억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살아온 삶의 무늬가 우리의 정체성이고 역사의 흔적이다. 그 딱딱하고 거친 숨결이 우리들의 기억이며 과거이다. 현재는 과거의 꿈이었고 미래의 흔적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 시대의 삶은 수많은 이소선에게 빚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소선의 여든이 기억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가 아니라 오로지 과거였다고 믿고 싶은 것은 순진한 꿈에 불과하다. 현실은 혹독하다. 다만 ‘희망’이라는 환각제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리들의 어머니 이소선의 기억을 통해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꿈 꾸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우리에겐.

  언제가 떠나게 될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또 하나의 역사가 되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 개인의 미시적인 관점이 모여 역사가 된다. 대통령의 행적과 외교 문서가 아니라 바로 이소선의 삶의 흔적, 시대에 대한 기억이 역사와 기록의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다. 우리는 더 많은 이소선들을 읽으며 현재를 확인해야 한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 낸 작은 진보의 발자국일 뿐이다. 그 흔적들을 돌아보고 발자국의 방향을 따라 걷는 것조차도 힘든 시대가 슬픔으로 다가온다.


08120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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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 -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정상적인 사람들, 그들을 갑자기 돌변하게 만드는 마음 속의 숨겨진 욕구 5가지
데이비드 와이너.길버트 헤프터 지음, 김경숙.민승남 옮김 / 사이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들의 가슴 속엔 아이히만이 숨어산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보면서 나는 ‘악의 평범성’이란 말에 동의하고 말았다. 숨 쉬는 공기처럼 보편적인 이드는 에고를 지배한다. 끊임없이 길들여지고 교육받고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지만 단 한 순간도 우리는 ‘비정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평생 동안 실수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순간순간 질서와 규칙에서 벗어나고 상식에 어긋난 생각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히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을까?

  기준이 모호하지만 우리가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사회적 합의나 다수가 정해놓은 기준을 벗어났다는 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적 판단이나 신념에 의해 행동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한 사람이 평소에 보이던 행동이나 생각에서 벗어나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저지르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본다. 지나고 나면 본인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 모르는 행동의 원인에 대해 궁금한 적이 있다면 <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는 몇 가지 예시 답안을 제공해 줄 것이다.

  사람들은 환경과 유전으로 나누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아직도 논쟁중이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 줄 수가 없다. 여전히 교육과 환경에 따라 인간은 만들어지는 존재이기도 하고, 유전적인 특성과 본능을 어쩌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본래 태어나는 부분과 만들어지는 부분이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인간이란 존재, 특히 그 존재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행동을 지배하는 뇌에 대한 관심은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그 영역의 특성들에 대해 더 많이 알려지고 있다. 빠른 속도로 비밀이 밝혀지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살펴보는 일은 <털없는 원숭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다.

 성선설과 성악설 그리고 백지설 사이에서 헤매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 우리는 사회화 과정이나 교육을 통해 본능적 자아의 욕망들을 억압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질서와 규칙들을 내면화한다. 이 과정에서 성격과 삶의 가치가 내면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드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때때로 에고의 통제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다. 파충류의 뇌에서 변연계가 발달하고 다시 신피질이 둘러싸는 과정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 변연계의 욕구는 쉽게 억제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말도 안되는 생각과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누가 보아도 겉으론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돌변하는 이유를 찾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즉 ‘원시적인 뇌’인 변연계와 ‘이성적인 뇌’인 신피질의 치열한 접전은 생존 기간 내내 인간의 뇌를 지배하는 싸움을 벌인다. 고집스럽고, 완고하고 원시적인 ‘이너 더미inner dummy'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이너 더미의 존재를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 숨겨진 다섯 가지 욕구는 권력, 영역, 성, 애착, 생존에 대한 것이다. 각각의 욕구가 어떻게 발현되며 이것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각 단계별로 1단계에서 10단계까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단계를 측정할 수 있는 설문지를 제공하는 것도 흥미롭다. 직접 사이트에 들어가 자신의 욕구 단계별 특성을 확인할 수 있어 어느 욕구가 어느 정도의 단계인지 알 수 있다. 단순한 심리 테스트와 달리 변연계에서 벌어지는 전쟁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그 욕구들이 어떻게 실생활에서 드러나는지 어떻게 충돌하는지 살펴보고 욕구의 형성 과정을 돌아보며 분노와 복수, 정신적 벌에 대해서 알아본다. 문제는 우리 안의 이너 더미를 치유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저자는 이 방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비이성적인 관점과 행동을 변화시키고 치료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실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들을 보여준다. 환경을 변화시키고 자아를 방어하고 관점을 바꾸는 방법은 단순한 흥미 위주의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심리학자와 정신의학자의 공동 집필이 시너지 효과를 얻고 있다. 실제 생활에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들을 정확한 분석과 이론을 토대로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의 원제목은 ‘Battling the Inner Dummy: The Craziness of Apparently Normal People'이다. 주목받기 위해 흥미로운 제목을 달았지만 원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다양한 심리학 서적 속에서 진지하게 성찰할 만하다.

  순간순간 변연계의 본능적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사람들, 단 한 번의 믿지 못할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사람들, 마음속의 숨겨진 욕구들 때문에 괴로운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그 치유 방법까지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08120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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