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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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보다 하늘을 사랑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세상 혹은 사람들과의 유리벽을 절감하면서부터였을까? 나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혹시, 그때부터 책이 내게로 온 것은 아닐까?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람은 왜 먹어야만 살 수 있는거지? 난 왜 사는 걸까?

  아마도 이 많은 질문들이 생기기 시작한 건 사춘기가 겪는 자연스런 변화가 아니라 책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알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책을 읽지 않았어도 생겼을 의문들이지만 답을 찾을 방법을 알지 못했지도 모른다. 이 모든 질문의 답을 책을 통해 찾아낸 것은 물론 아니지만 적어도 막연한 의문과 불안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게 책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었다.

  단 한 권의 책을 통해 그 답을 찾으려 한 적도 없었지만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종횡무진 영역을 넘나들며 길을 찾아 헤매고 절망하고 때로 공감하며 마음을 빼앗겼다. 어느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가장 정확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면에 숨은 진실 찾기 게임은 나에게 주어진 몫이었지만 결코 두렵거나 힘겹지 않았다. 즐길만한 고통이었고 절망이었으며 현실에서 찾아야 할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살아가면서 경험으로 익힌 것은 작은 세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진짜 중요한 것들은 선생님에게 배울 수 없었고 깨달음의 즐거움은 책을 통해서 가능했다. 개인적인 불행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겐 그러했다. 책은 내게 참 스승이었고 무엇보다 숭고한 대상이었다. 그런 책도 어쩌면 하나의 세계에 불과할 것이고 책들이 모여 이룩한 거대한 왕국도 허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대체할 만한 인식의 수단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만한 즐거움을 주는 일도 아직 찾지 못했다.

  책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생각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에 목숨을 거는지. 도대체 책의 매력은 무엇인지.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앎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지. 집착에 가까운 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을 때마다 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내게 도대체 책은 무엇인가. 왜 읽는가, 무엇을 얻었는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김열규의 <독서>는 책을 통해 쓰여진 자서전이다. 열혈 독서가들의 모임에서 우수 회원이 될 법한 그의 삶을 독서의 이력으로 풀어냈다. 70이 넘은 노교수의 이야기는 어깨에 힘을 쫙 뺀 상태에서 바람이 나부끼듯 펜을 휘두른 느낌이다. 억지스러움이 없고 편안한 문장으로 책을 이야기 한다. 유년시절 할머니와 어머니의 듣기에서 출발한 그의 생은 문화 자본 자체가 풍부했다. 자연스럽게 말과 글에 눈을 뜨고 낭독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몰입의 즐거움을 일찌감치 경험한 소년은 책을 통해 또 하나의 세상을 얻는다.

  신체적으로 허약해서 놀림감이 되고 책 속에서 고독과 깨달음을 얻는 <토니오 크뢰거>를 자화상으로 삼는 저자는 병적으로 책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유년과 성장 과정에서 그 열등감은 책을 통해 자신감의 세계를 구축한다. 듣기에서 노년의 책 읽기까지 한 생애를 정리한 저자는 본격적으로 읽기의 방법론을 이야기한다.

  꼼꼼하게 읽기, 클로즈 리딩, 속독과 숙독, 삼단뛰기와 장애물 경주 등의 비유를 통해 다양한 읽기 방법을 소개한다. 필요와 목적에 따라, 글의 종류와 내용에 따라 읽는 방법과 태도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그 과정과 방법들을 설명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거침없고 막힘이 없다. 힘주어 강조하거나 대충 얼버무리는 법이 없다. 적당한 강약으로 편안하게 독서를 이야기한다.

  방법 뿐만 아니라 내용에 따라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요령도 적고 있다. 게임을 하듯이, 물고기를 잡듯이, 이를 잡듯이,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이, 사금을 캐듯이. 비유는 어떤 이론보다 쉽게 스며든다. 특별한 법칙을 세우거나 번호를 붙이거나 단계를 말하지 않고 편안하게 풀어간다는 말은 상대에게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 시와 소설 그리고 논설문을 읽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영향을 미친 작품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 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저자의 독서 이력을 수필처럼 편안하게 펼쳐놓은 1부와 책읽는 방법을 풀어쓰고 있는 2부로 나누어져 있다. 인생의 황혼녘에 자신의 독서 이력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있고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것이 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의 문제는 독자에게 있는 듯하다. 강요하거나 설득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쉽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건네듯이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독서에 관한 읽을 만한 책 목록에 올려도 좋을 만하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저자를 이렇게 다시 만나는 일은 새롭기만 하다. 책과 함께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야 어디 한 둘일까마는 유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독서>가 취미가 되고 일이 되고 삶이 되는 과정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지독한 책벌레들과 함께 해 온 인류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하지만 책을 던져 버리고 총을 든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책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또 하나의 무기가 될 것이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삶이 달라진다. 사회와 역사는 그렇게 조금씩 진보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더딘 발걸음이더라도 말이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연말이지만, 사람들의 삶이 팍팍해지고 있지만, 정치와 역사는 거꾸로 가고 있지만 손놓고 앉아 망연자실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war of position)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은 개인적인 판단이다. 책을 통해 현실 개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찌보면 황당할 수 있겠으나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하고 행동을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책의 역할이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책타령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도 있으나 저자의 이런 종류의 책들은 일단 사람들을 <독서>의 세계까지 끌어들이는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나치게 주관적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풍찬노숙을 견디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안온한 온실 속의 평화가 아니라 혹독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강철같은 정신을 단련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때론 힘겹고 고통스럽겠지만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아야 작은 길을 만들고 물줄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것이 책의 역할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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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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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누구나 안정적이고 확실한 미래를 욕망한다.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알 수 없는 미래는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예측 가능성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열정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학과 과학의 발달은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0년 전에 비해 100만 배 복잡해진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200년 전보다 훨씬 더 예측하기 힘든 현재를 살고 있다. 그래서 경험론적 회의주의자는 말보다 행동을 중시한다. 각종 데이터와 통계를 프로그래밍한 이론과 시뮬레이션과 정교한 법칙들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허무주의와 회의론에 빠지게 된다. 9.11 테러를 예견한 사회학자나 경제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의심과 황당함은 우리를 여전히 불안하게 한다. 나아진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이성이 발달하고 시스템이 정교해지면서 보다 안정적이고 확실성이 높은 사회 구조를 만들어간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 이전보다 불안정성만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역사는 기어가는 것이 아니라 비약한다는 작은 제목들에 주목하며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 스완>을 꼼꼼이 읽었다. 심리학과 경제학과 철학과 수학과 통계학과 사회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탁월한 저서라고 평가한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이 책은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개인적으로 통찰의 힘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게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통찰력은 철학적 사유에 의해서 혹은 통계적 분석에 의해 또는 경제적 지표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통찰력은 어떻게 길러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순히 인간들의 ‘확인 편향의 오류’로부터 출발해서 사고의 맹점들을 살펴보는 것은 다른 책에서도 수없이 반복했던 이야기들이다.

  이 책은 ‘검은 백조’라는 선명한 상징을 통해 예측 불가능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고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검은 백조가 발견된 순간 우리의 상식과 믿음과 경험적 지식은 모두 전복된다. 이러한 사건은 사회 곳곳에서, 경제 현상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된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연구와 실험을 거쳤다고 자부하는 이론과 시스템도 마찬가지 오류를 범한다. 결국 미래는 알 수 없다는 것인가? 극단적 회의주의와 허무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범하고 있는 오류들에 대한 솔직하고 직설적인 비판이고 자기반성이다.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문제라면 이 책은 정확하게 문제를 찾아내고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과학자의 시선이 아니라 현장의 허슬러만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감각과 다양한 이론과 예시들을 통해 저자는 이 모든 허약한 예견 시스템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인식의 귀족으로 극찬하는 몽테뉴와 끝까지 경의를 표하는 칼 포퍼를 제외하고는 저자에게 비판받지 않는 경제학자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냉정한 시선은 예외없이 정상분포곡선을 창안한 가우스에게 겨누어진다. 그 수학적 진실과 현실의 적용 불가능성에 대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른 저자는 칼끝을 철학자들에게 돌린다.

우리는 입증이 아니라 부정적인 사례들을 통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관찰된 사실들로부터 보편적 규칙을 확립하려는 시도는 틀렸다. - P. 121

  지금까지 믿었던 사회와 경제에 대한 관점을 모두 폐기처분하라는 극단적이고 혁명적인 선언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의 의도는 분명히 지나치게 복잡한 경제, 사회 분석 시스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보인다. 책 곳곳에서 비춰지고 있지만 수학자나 경제학자들로부터 통렬한 비판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논리적이며 우리가 반복했던 실수들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고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저자의 논의는 단순하게 이론적이거나 책상머리에 앉아 잔머리를 굴리는 종류와 거리가 멀다. 실전에서 익힌 감각을 바탕으로 경험적 회의주의가 단단한 기초를 이룬다. 그 위에 이론적 토대와 실명 비판이 더해지는 실제 사례들은 예상 반론까지도 차단하는 논리 구조를 갖추게 된다. 물론 저자의 수학과 경제학에 대한 이론들이 정교화되어 현실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연구와 합리적인 설명이 조금 더 필요할 듯 싶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 대해 쉽게 반론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이 책이 주장하는 이야기의 오류들은 사실일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나에게는 진지한 성찰과 비판의 시간을 전해 주었음에 틀림없다.

  니체가 꼬집었던 ‘교양속물(buildingsphilister)’과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저자는 아랍인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 고향집이 어찌되었는지 모르는 저자의 개인사와 그의 생각이 완벽하게 분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국외자의 시선으로, 제 3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현실 밖에서 현실을 들여다 보려는 노력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역사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은 대한민국의 2008년이지만 검은 백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극단의 힘과 마이크로 트렌드가 미래 사회를 바꿀 것이라는 미래 예측을 모두 비웃는 검은 백조를 만났다.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이 책의 부제가 현실에서 마주할 때 얼마나 큰 공포로 다가오는지 우리는 매일 매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어쩌면 저자의 말대로 그가 아니라 바로 내가 검은 백조는 아닐까, 하는 우울한 상상!

기억할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검은 백조라는 사실이다. - P.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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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과 관련된 글에서 흔히 사용되는 NED라는 단어는 ‘질병의 증거 없음(No Evidence of Disease)'의 약어다. END, 즉 ‘질병 없음의 증거 (Evidence of No Disease)'라는 용어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의사들과 얘기를 나눠 보았는데, 상당수의 의사들이 이 같은 왕복 여행의 오류에 빠졌다. - P. 118


니체가 교양속물(buildingsphilister)이라고 꼬집었던 사람들, 학식 있는 속물들, 정신노동 분야의 블루칼라들은 당신이 박식하다고 부러워한다. 그러나 당신은 오히려 박식이라는 것이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개념이라고 대답한다. 그래도 상대가 말뜻을 모르면 당신은 자신이 리무진 운전사라고 말해 준다. - P. 230

그러므로 동물보다 좀 더 고상한 삶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이야기 짓기의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 텔레비전을 끄고, 신문 읽는 시간을 줄이고, 인터넷을 무시하라. 경정을 내리는 이성적 능력을 훈련하라. 감각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구분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해악에서 벗어나면 보답을 얻게 될 것이니, 삶이 그만큼 풍요로워질 것이다. 덧붙여, 모든 추상적 개념의 어머니, 즉 확률에 관한 한 우리 인간이 천박한 존재임을 명심할 일이다. 우리는 주변의 사물과 사건을 더 잘 이해해 보겠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땅굴 파기’를 멈추는 일이다. - P. 233

예견의 문제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즉 인간의 본성과는 관련이 없으되 정보 자체의 속성에 기인하는 고유의 한계가 그것이다. 앞서 나는 검은 백조 현상에 세 가지 속성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예견 불가능성, 파급의 막대함, 사후 합리화 등이 그것이다. - P. 280

발명이란 골방에서 계획표에 따라 이것저것 조합한 끝에 얻어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발견과 발명의 대부분은 우연의 산물(serendipity)이다. - P. 283

정규분포곡선에 기초하여 불확실성을 평가하는 것은 불연속이고 급격한 비약이 일어날 가능성과 그 충격을 무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극단의 왕국에서는 적용할 수도 없는 방법이다. 이런 식의 평가 방법을 채택하는 것은 풀밭만 들여다보다(거대한) 나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과 같다. 비록 예견하지 못할 만큼의 대규모 편차가 발생하는 것은 희귀한 일이지만 그충격이 누적되리 경우 엄청난 결과가 나타날 것이므로, 극단점이라고 무시해 버려서는 안 된다. - P. 381

운명을 무시하라. 그 이후 나는 시간표에 맞춰 살겠다고 달음박질하지 않으려 애썼다. 테데스코의 충고는 사소한 것이지만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떠나는 기차를 쫓아가지 않게 되면서 나는 우아하고 미학적인 행동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았고, 자기의 시간표와 시간, 자기 인생의 주인됨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놓친 기차가 아쉬운 것은 애써 쫓아가려 했기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남들의 생각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 P. 463

인생의 기준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면 이미 자기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 P. 463

선물로 받은 말의 입을 열어 흠을 찾으려 애쓰지 말라. 기억할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검은 백조라는 사실이다. - P.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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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도 이브도 없는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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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람에게 어린 시절이 있듯이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아련하다. 그 사람을 누구인가로 규정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애틋함이나 간절함은 홍역처럼 앓게 된다. 사랑의 방식도 다양하고 그 향기와 빛깔도 다르겠지만 소중한 기억으로 신화화하려는 노력은 비슷할 것이다. 의도적인 노력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헌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아득한 꽃잎처럼 흩어져 내리는 법이다.

  누구나 설레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아멜리 노통브의 신작 <아담도 이브도 없는>는 그 사랑 이야기를 쓰고 있다. 소설인지 일기인지 알 수 없는 사적인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결코 지루하거나 심심하지 않은 것은 작가 특유의 패러디와 유머의 힘이다. 발랄하고 간결하며 깔끔하고 소박한 맛을 보여준다. 군더더기 없는 상큼한 문장은 의식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다. 개성적인 문체로 드러나는 이 방식은 아멜리 노통브만의 분명한 목소리로 들린다. 선명한 자기 색깔을 가진 작가는 하나의 영역을 구축한 것이다.

  그것이 한계가 될 수 있는 우려는 그 다음 단계의 문제다. 개성도 없고 재미도 없는 소설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누가 두 번 다시 그런 소설을 읽겠는가. 함부로 작가의 노력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 수고로움을 예의로 참아줄 수 있는 독자도 흔한 것은 아니다. 아멜리 노통브의 성공에는 몇 가지 요소가 엿보인다.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이 가벼움과 흥미라는 데는 이견을 달 수 없다. 일단 재밌고 쉽게 다가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정확하게 포지션을 잡고 있다.

  현실을 비틀고 요리하는 솜씨가 만만치 않다. 문장들은 톡톡 튀며 웃음을 던져주고 다양하게 상황을 변주한다. 비유가 탁월하면서도 진부하지 않다. 매력적인 작가임에 틀림없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매년 보졸레 누보가 나오듯 1년에 한 권씩 소설을 써내는 그녀의 고정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열혈 독자는 아니다. <살인자의 건강법>을 비롯해서 몇 권을 읽었지만 기억이 가물거린다. 스무 살 언저리에 만났던 밀란 쿤데라 만큼 깊이 빠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하기사 지금 누구에게 깊이 빠질 수 있겠는가. 참 애매한 나이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객관적으로 매력적이지만 주관적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줄 수는 없다.

  그녀의 열여섯 번째 소설 <아담도 이브도 없다>는 작가의 이력과 실제 삶의 궤적을 알고 있는 독자가 읽기에는 픽션과 넌픽션을 오간다는 느낌을 가질 만하다. 소설의 형식이 파괴된지 오래지만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보듯 난감한 기분일 때가 많다. 마치 누군가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듯싶다.

  하지만 스무 살 남자와 스물 한 살 여자가 엮어내는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감동적으로 읽어낼 재주가 이젠 내게 없어졌나보다. 아련한 환상과 추억들을 동원해 보아도 유추된 감정의 이입일 뿐 소설 속에 몰입할 수는 없었다. 사랑은, 특히 첫사랑은 소중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감정일 뿐 일반화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가가 그걸 원한 건 아니겠지만 지극히 사적이고 특수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프랑스 여자와 부유한 일본 남자의 사랑. 그리고 이별. 작가가 된 여자의 일본 방문. 공교롭게도 프랑스 여자와 결혼한 일본 남자. 오랜만의 해후.

  가장 진부하고 대책 없는 재료를 가지고 이만한 요리를 만들어 낸 것은 작가의 역량이라고 보아야 하나? 이제 좀 천천히 쓰라고 충고라도 해야 하나? 아름답긴 하지만 감동적이지는 않는 소설이라고 말하면 가혹할까?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말이다.

  상황이나 인물과 무관하게 첫사랑을 만나는 과정이나 그 혹은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 그 시간 속에 녹아 있는 떨림, 두려움, 애틋함 - 그 달콤 쌉싸름한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면 이 소설은 성공이다. 개인적인 감정과 환상을 환기하거나 대리만족하고 싶은 사람에게 딱 어울릴 만한 소설이다.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사랑 얘기를 싫어할 만한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이 전부인 소설 또한 받아들일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평가가 엇갈릴 수 있는 소설은 개인적인 취향에 맡길 뿐이다. 그녀의 전작들을 믿고 읽든가 각자의 후각에 맡기든가.


081219-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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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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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민한 철학자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서정시인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준다. 서정시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이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여전히 서정시는 건재하다. 아니 더 이상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하지만 시는 계속 팔리고 읽히고 있다. 그것이 지적 허영과 자기 충족에 기인하든 흘러간 혹은 철지난 유행가처럼 소비되든 무관하게 시는 여전히 쓰여지고 있으며 팔리고 있고 읽히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니겠는가.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매력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슬픔이 없다니? 그것도 십오 초? 저절로 손이 간다. 책장을 더듬고 어루만지다가 한 편씩 읽어 나간다. 음미하듯 천천히. 때론 빠른 호흡으로 넘기기도 하고, 때론 중간에 멈춰 긴 숨을 내뱉기도 한다. 어느 시집이든 그러하겠으나 여유와 안정이 없다면 시는 읽히지 않는다.

  심보선의 시는 익수하지만 생경하다. 인간의 감정이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법이니 시에 담아낸 정서가 익숙하다는 말은 하나마나 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 진부해지기 쉬운 법. 조심할 것은 시인뿐이 아니다. 편안한 감상과 한 방울의 눈물을 원한다면 멜로드라마를 찾아 볼 일이다. 시를 통해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비극과 절망이다. 희망과 기쁨은 그것을 둘러싼 후광처럼 자연스럽게 빛을 발한다.

  그러 면에서 심보선의 시는 메마름과 극단적인 슬픔이 주는 간절함이 없다. 그래야 좋은 시라는 말과는 다르지만 개인적인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정호승의 <새벽편지>나 <서울의 예수>는 이제 더 이상 울림을 전하지는 않는다. 오래 전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전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 ‘슬픔의 진화’ 중에서

  서시에 해당하는 ‘슬픔의 진화’ 중 일부다. 낯설게 하기와 새로운 시야의 확보는 시인의 전매특허이리라. 밤새 고심한 결과가 독자에게 닿지 않는 것에 대해 고심해야 한다. 독자를 위해 시를 쓰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야 할 말이 없어지겠지만 생경한 시선 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시절이 벌써 당도해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 ‘오늘 나는’ 중에서


  차라리, 철저하게 진부한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는 말은 무겁고 끈적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다. 누구나 하루치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내지만 그 안에 담긴 문법들은 제각각이다. 상대적인 시간의 양과 담아내지 못한 슬픔들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하루의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비극과 증오는 무기가 될 수 없다.

  오늘 나는 누구의 얼굴을 노려보았나? 오늘 나는 누구를 사랑했나?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중에서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중에서

  순간을, 아주 잠깐에 대해 말하는 시를 우리는 자주 발견한다. 그것은 찰나의 인상이 주는 기쁨이자 행복이다. 순간을 영원으로 기억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과 그만큼 짙은 향기를 담보하기도 한다. 생에 대한 미련도 없고 슬픔도 없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천국이라고 말하는 곳에는 미련도 슬픔도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존재하다가 사라지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 사라진 자리에는 흔적조차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말이다. 비어가는,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응시해 보자. 과연 누가 생의 슬픔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를.

구름이 내게 모호함을 가르치고 떠났다
가난과 허기가 정말 그런 뜻이었나?
- ‘착각’ 중에서

이제껏 도약을 꿈꿔본 적 없다
다만 사각형의 문들이 나를
공허에서 공허로
평면에서 평면으로 옮겼다
- ‘전락’ 중에서

  끊임없이 욕망을 부정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도약을 꿈꿔본 적 없는 인간이 있을까. 평면에서 옮겨지든 입체에서 평면으로 옮겨지든 그것은 크기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그것을 ‘전락’이라고 말하지만 시에서는 ‘공허’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법이다. 가난과 허기라니. 사랑과 슬픔처럼 동어반복으로 들리는 말이다.

  피와 눈물에 대해 그리고 생활과 심연에 대해, 그 바닥에 대해 한참 들여다 보고 있는 시인의 시들은 커다란 울림보다 작은 메아리에 머물고 있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현실 밖에 존재하는 우리들의 영원한 꿈일지도 모른다. 도약을 꿈꾸어도 현실을 부정해도 흔들림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구름처럼 모호하게. 그 소리는 이명처럼 들리다가 들리지 않다가,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 그렇게 사라진다. 모든 것이.


081216-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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