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가르치는 기술
야스코치 테츠야 지음, 최대현 옮김 / 두리미디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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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위에서 내려다는 설경은 기막히다. 환경과 개발에 대한 저항감에도 불구하고 겨울만 되면 여전히 스키를 버릴 수가 없다. 신념과 다르게 행동하는 겨울 스포츠 스키. 벌써 10년이 넘어버린 ‘미친스키’ 때문에 겨울을 많이 기다리기도 했다. 스피드와 테크닉을 모두 극복해야 스키의 즐거움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이 단계별 훈련과 상위 기술 습득의 열망이 없으면 스키는 그저 경사면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따분한 운동이 된다. 스키의 즐거움은 기술 향상뿐만 아니라 정상에서 바라보는 장엄함이다. 인위적으로 기계의 힘을 빌려 리프트를 타고 올라 갈 수밖에 없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경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처음 스키를 가르쳐 준 분은 선수 출신이었고 카빙스키가 막 보급될 무렵이었지만 노말 스키와 카빙 스키의 차이점은 물론 기본자세와 원리를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다. 물론 쉽고 재미있게 말이다. 다른 분한테 스키를 처음 배웠어도 내가 스키에 몰입할 수 있었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그러다 이번에서 만난 분이 10년 전 그분처럼 티칭 테크닉이 뛰어난 분이었다.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그 원리와 문제점을 정확하게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겠지만 전문가는 아름답다. 자신의 분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은 쉽고 재미있게 배우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다르게 녹여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의 매년 스키 캠프에 참가한다. 조금 더 잘 타기 위해 강습을 목적으로 캠프에 참가한다. 어떤 연수든 강연이든 배움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가르치는 일은 배우는 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스키 강사를 예로 들면 먼저 방법을 설명하고 시범을 보인다. 스키를 잘 못 타는 강사는 없다. 하지만 배우는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설명은 책이나 다른 방법으로도 알 수 있고 시범은 지겹게 볼 수 있다. 시즌 전에 비디오 매체를 통해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기도 한다. 굳이 강사가 필요가 없는 부분들이다. 문제는 그것이 잘 안 되는 이유다. 잘 안될 때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다양한 개별적 문제들을 정확하게 지적해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어떤 운동이든 마찬가지지만 초보자가 아니라면 원 포인트 레슨으로 충분한 경우가 많다. 단 하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그것을 찾아주고 개선 방법을 가르쳐 주는 강사야말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은 얼마나 스키를 잘 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가르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은 그만큼 어렵다. 잘 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쉽게 가르치는 기술>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일상생활을 해나가면서 부모는 아이에게, 상사는 부하에게, 장교는 병사에게, 선배는 후배에게, 고수는 하수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가르치고 또 배운다. 가장 확실하게 공부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보다 쉽고 정확하게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있고 단시간 안에 알려줄 수 있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배우는 사람은 보다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 배우려고 한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이해시켜주고 재밌게 즐길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시간과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우선 배우는 사람을 잘 알아야 한다. 글을 쓸 때 예상 독자가 중요하듯이 말이다. 일본인 야스코치 테츠야는 이 책을 통해 20여년간 쌓아 온 티칭 테크닉을 말한다.

  누구나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일하다 보면 자신만의 노하우가 쌓이고 그것은 특별한 기술이 된다. 저자는 대학생부터 시작한 학원 강사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썼다. 영어를 가르치며 자신이 겪었던 시행착오와 노력의 결과물 그리고 유명강사가 되기까지의 과정들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그의 티칭 테크닉을 찬찬이 들여다보는 일은 단순히 테크닉을 배우는 일이 아니라 가르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 보고 누구든 무엇이든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일상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가르치는 사람은 다섯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학자, 배우, 예언자, 엔터네이너, 의사가 그것이다. 공부하기보다 가르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조건이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이 스타일이 있고 장점이 있겠지만 골고루 종합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배우는 사람은 고통스럽다. 내가 배웠던 수많은 선생님들을 돌이켜 보았다. 테니스, 탁구, 배드민턴 등 운동을 가르쳐 주었던 코치들을 포함해서 무언가 가르침을 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 올리며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잘 가르치는 사람일수록 쉽게 가르친다는 말에 가장 깊이 공감했다. 먼저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배우는 사람의 유형에 맞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가르치는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한 부분도 깊이 와 닿지는 않는다. 그것은 개인차가 존재하고 대상과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논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좀 더 쉽고 재밌게 가르치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경험담들이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무언가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야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생존을 위해 가장 본능적으로 필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닐까 싶다. 다만 이 책은 일반화시킬 수 없는 내용과 특수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는 내용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읽어야겠다. 나는 오늘 또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돌아본다.


09012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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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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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예술이다. 논쟁은 끝났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수없이 인용되며 끊임없이 논의되었지만 영화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위상과 역할이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와 기능은 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예술과 영화의 관계를 벤야민은 ‘아우라Aura’를 통해 설명했지만 사진과 영화의 복제 가능성 때문에 예술의 범위를 논하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대중문화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말이다.

  그것이 오락이든 예술이든 장르의 문제가 아니가 아니라 변화, 발전의 양상과 미래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화는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에게 더 큰 즐거움과 충격과 미적 쾌감을 전해주리라고 굳게 믿는다.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단 한 순간도 정체되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며 진화하는 영화는 여전히 21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 매체로 거듭나고 있다.

  영화를 즐기는 방식과 태도가 달라지고 있지만 스크린을 통해 전해지는 이미지와 메시지는 여전히 장르의 특성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 프레임 안에 한 장면을 보여주던 방식은 한 장면에 여러 장면을 중첩시키거나 화면을 분할하여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등 영화의 기본적인 전제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형식과 내용이 파괴가 영화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는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역동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형식보다는 내용에 관심을 갖게 된다. 형식을 벗어나서 논의될 수 없는 분야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읽기는 내용에 집중된다. 이런 관심은 최근 철학자 김영민의 ‘영화와 인문’ 칼럼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영화도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고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관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둘러싼 수많은 존재들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히 증폭된다. 영화는 늘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 소설과 달리 비루하고 속된 일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영화는 일탈된 상황을 보여준다. 100분 내외의 시간동안 관객들을 집중시키기 위한 영화의 서사는 소설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보여주기로 시선을 끄는 데는 한계가 있다. 최근 CG의 현란한 기술들은 실사와의 구별을 모하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영화가 완성될 수는 없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영화의 오래된 숙제이기도 하다.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부터 <300>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역사는 시대의 흐름과 기술의 발전을 반영해 왔다.

  영화 이야기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또 다르게 이야기될 수 있다. <진중권의 이매진>은 ‘씨네 21’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연재물이다. 책으로 묶이는 순서는 당연해 보인다. 신문이든 잡지든 좋은 칼럼을 읽게 되면 언제 책으로 나오게 될지 기다리게 된다. 아직도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매체가 책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어쨌든 이 책은 영화 잡지에 1년간 실렸던 칼럼을 모은 책이다.

  저자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영화에 대한 비평이라기 보다는 영화를 가지고 노는 이야기이다. ‘담론의 놀이’라는 말이 적절해 보인다. 영화가 좋다 나쁘다는 평가도 아니고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문제 삼지도 않는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당연히 언급하게 되지만 미학적 혹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영화의 코드를 뽑아내는 식이다. 가령 친숙한 영화 <슈렉>은 ‘쿨미디어의 뜨거운 하이퍼리얼 효과’로 읽어내거나 ‘과거를 현재화하는 문화적 기억’으로 <화려한 휴가>를 읽어내는 등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영화를 통해 다양한 상상력과 시대와 상황들을 읽어내는 담론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 자체에 대한 깊은 논의와 몰입의 즐거움은 얻을 수가 없다. 이것은 영화비평의 몫으로 남겨두는 저자의 방법은 타당해 보인다. 전문가 수준 이상의 영화리뷰와 다양한 매체를 통한 영화 분석에 진중권이 굳이 뛰어들 까닭이 없지 않은가. 누구든 자신의 영역과 전문 영역이 있고 그 특징을 가장 잘 살려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측면에서 진중권의 색깔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또 다른 영화의 재미를 읽어낼 수 있게 하는 영화이야기 책이다.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부터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이르기까지 영화 장르와 접속할 수 있는 수많은 담론들이 난무하여 영화를 읽어내는 재미를 더해준다. 한 편의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그것에서 무엇을 얻었는가와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적 상상력과 재미라는 것은 서사의 즐거움과 시각적 효과만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는 아닐까 싶다.

  영화의 죽음, 복제에서 생성으로, 서사의 파괴, 기술과 신체, 시각에서 촉각으로, 미디어와 권력, 이성과 광기, 해석에 반대한다. 영원한 소년, 기억으로서 역사 등 열 개의 장으로 나누어 서너편의 영화를 묶었지만 주제별로 묶였다기 보다 하나의 관점으로 엮였기 때문에 그 영화들의 공통점을 살피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저자가 이미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보여주었듯이 영화 또한 예술적 상상력이 동원한 놀이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서 즐겨야 한다. 얼마나 깊고 다양하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는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요소가 된다. 책 한 권에서 얻을 수 있는 효용과 즐거움이 영화 한 편으로 환산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일단 재미있는 영화를 봐야 얘기가 된다. 저자는 우연에 기대고 있다고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영화 리스트가 일단 반갑다.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에서부터 빔 벤데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 이르기까지.


090127-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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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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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은 외친다. ‘껍데기는 가라’고! 언제 어디서든 본능에 충실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직설 화법이 김어준의 트레이드 마크다. 에둘러 표현하거나 복문으로 길게 빼지 않는다. 쨉과 스트레이트 전문이다. 기교파가 아니라 파이터다.

  한겨레를 보다가 김어준이 ‘충고’하는 코너라는 사실을 알고 일단 웃었다. 이후에 여러명이 돌아가며 인생상담을 해 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딴지일보와 인생상담과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상담이나 충고는 일단 진지하기 때문이다. 김어준과 진지함을 연결시키기 어려웠다. 그만큼 내게 김어준에 대한 인상은 강렬했다. 철저한 아웃사이더로만 보였다.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고 깊은 공감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던 딴지일보와의 만남을 잊을 수가 없다. 카타르시스였고 유쾌, 통쾌, 상쾌함의 극치를 맛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첫 만남이 강렬했던 만큼 자주 찾지는 않았지만 이후에도 김어준과의 간접적인 만남은 계속됐다.

  신문에서 몇 번 읽다가 나중에 책으로 나오면 읽어야겠다 싶던 코너가 책으로 묶여 나왔다. <건투를 빈다>가 그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김어준이 쓴 책이 아니라 상담을 의뢰한 사람들이 쓴 책이기도 하다. 물론 김어준의 판단과 충고가 들을만한 것인지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면 그들도 그러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 밖에.

  상담 사례를 묶어 놓은 책이 대게 일반화 시킬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특별하고 예외적인 상황이나 감정들도 다루어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처할 수 있는 상황들이 대부분이다. 유사한 사례들이 주변에 허다하기 때문에 우리는 눈여겨보게 된다. 우리는 언제든 그런 감정이나 상황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내담자의 편에서 상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김어준의 불친절한 상담자다. 하지만 솔직하고 편안하다. 상담의 기본이 래포(rapport)형성이지만 김어준은 상대를 다독여 줄 마음이 없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입장에서 상황을 풀어나가는 일반적인 방식의 상담이었다면 5분만에 졸거나 책을 집어 던졌을 것이다. 김어준은 가장 삐딱한 상담자다. 내담자가 아니라 상담자가 판단과 기준으로 충고한다.

  한마디로 냉정하고 객관적이며 직설적이고 강렬하다. 간결하고 명확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든지 대충 타협하라는 말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지언정 돌려 말하거나 예쁘게 다듬지 않는다. 복문이 없을 만큼 짧고 명쾌한 문장들은 속이 시원하다. 적절한 비유와 예화들은 김어준식 상담의 꽃이다. 스스로의 경험들을 드러내고 진심으로 충고하기 때문에 내담자는 쉽게 그 진정성에 동화될 수밖에 없다.

  인생은 선택이다. 누구나 걸어보지 않은 길에서 망설인다. 멘토는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선택과 결정은 스스로의 몫이다.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있단 말인가. 내담자들은 어쩌면 답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심약한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자신감을 얻고 격려 받고 싶은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매일 매일 경험한다. 그러한 순간들을.

  대한민국 고민의 최소공배수가 이 책에 모여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21세기형 질문들이 모여있다. 이 책은 시대를 읽어내는 또 하나의 생활의 역사가 되겠다. 먼 훗날 이 책을 뒤적이며 이 시대에는 이런 고민들을 했구나 하는 풍속사적 자료가 될 만도 하다. 여하튼 지루하지 않게 타인의 고민을 나의 그것들과 결부시켜 보기도 하고 걱정과 한숨을 나누기도 했으며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이 책은 크게 다섯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삶에 대한 기본 태도를 고민하는 수많은 ‘나’에 대해,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가족’에 대해, 선택의 순간에 고민하게 되는 ‘친구’에 대해, 개인과 조직의 갈등인 ‘직장’에 관해 그리고 영원한 고민과 갈등의 주제인 ‘연인’에 대해서.

  각각의 장들은 물론 편의상 주제별로 묶였다. 상담 내용과 관련하여 김어준의 짧은 글들이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는데 내담자의 요구 없이 이 글만으로도 충분히 개인적인 문제들에 대한 시원한 답이 되기도 하겠다. 연재했던 내용을 묶어내면서 전체가 하나로 엮이지 못하는 단점이 보이기 마련이지만 이 책의 경우 특별히 문제없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상담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지만 편들어주기가 좋은 상담은 아니다. 그래서 친구와 가족은 좋은 상담자가 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판단해줄 수 있는 사람이 때론 필요한 것이다. 사람이 바른 길로만 해서는 안 되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그래서 갈등과 고민의 순간을 만난다. 후회할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게 사람이다. 그것이 인생의 딜레마다.

  가끔 김어준 같은 사람에게 따끔한 질책과 충고를 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과 상관없이 살더라도 말이다. 살아가면서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든 그렇지 못하든 멘토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물론 성격과 상황에 따라 멘토의 필요성도 달라진다.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와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가족, 연인, 소울메이트, 멘토 -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기 전에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누구인가?

다들, 건투를 빈다. 졸라. - 김어준.


090126-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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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
최현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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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생득적 권리를 우리는 인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권력에 의해 이 권리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억압과 순종을 내면화한다. 근대 이후 국가나 사회 차원이 아니라 개인 중심적인 가치관이나 철학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여전히 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와 먼 추상적 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학교에서는 여전히 신체의 자유를 구속받는다. 자신의 머리카락 길이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며 체벌과 폭력이 질서와 규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국가차원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인권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는 일은 특정 단체의 몫으로 돌릴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단일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인종이나 민족 문제로 확산되지는 않지만 민주주의가 절차적으로 발전해 오지 않은 까닭으로 여전히 진보적 가치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나의 권리만큼 타인의 권리도 소중하고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리 보편적인 것 같지 않다.

  앞서 말한 대로 나이, 소속, 상황에 따라 고유하고 기본적인 권리가 얼마든지 제한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단순히 고유한 문화적 차원이 아니라 인권에 대한 생각과 고민 자체가 일천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개인주의보다 충과 효를 앞세운 공동체나 국가주의가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 보인다.

  그러나 이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문제에 대해 누구든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권은 보편적 가치이며 당위적 가치라는 사실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시민권 차원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모두가 인정하는 천부적 권리라도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의한 것이다. 인권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 생활의 방법론으로 자리잡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책세상’에서 Viva Activa(‘실천하는 삶’이라는 뜻의 라틴어) 시리즈 개념사 1권으로 최현의 <인권>을 펴냈다. 기존의 책세상 문고의 분량이지만 판형을 바꾸고 사진을 삽입해서 편집을 새롭게 한 정도의 책이다. 주요 개념이나 사건들에 대한 주석을 달고 분량에 대한 부담을 덜어 쉽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권의 역사를 조망하고 있다.

  이 책의 초점은 인권과 시민권의 상관 관계에 맞추어져 있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주창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출발한 시민권은 근대적 의미의 인권을 확립했다. 자연법에서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사회적 상황과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이야기지만 보편적 개념으로 확립될 만큼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고대의 시민권은 노예와 여성을 배제한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것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바로 근대 인권 사상의 역사이다. 시민권 제도의 발전은 근대 국민 국가와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또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이 책에서는 홉스와 로크, 루소를 중심으로 근대적 의미의 인간관에 대해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작은 차이와 주장들이 결국 근대 시민권 제도를 발전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논의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인내천 사상 등 자생적인 개념들이 없진 않지만 그것이 충분히 논의되고 발전되지 못해 결국 유럽 중심의 사상사를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현대 인권은 시민권 이론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 한다. 영국의 시민권을 중심으로 그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여성의 인권과 시민권에 대해 살펴본다.

  특히 소수자의 인권이나 장애인의 인권, 다문화 시민권 등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현실에서도 중요하게 고민해 볼 부분이다. 외국인과의 결혼, 다문화 가정의 사회적 문제, 장애인과 성적 소수자, 신념에 의한 병역 거부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지구 공동체의 지구 시민권은 ‘꿈’이라고만 할 수 없다. 세계화는 경제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인권’ 측면에서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적 의미의 시민권이 확산되고 지구 공동체 차원에서 공감할 수 있는 그리고 지켜질 수 있는 개념들이 확산되는 것은 우리가 함께 꾸어야 할 꿈이 아닐까 싶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살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인권의 기준과 대상도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제도와 질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교묘하게 숨겨진 ‘인권’을 찾아보는 일이 우선이다. 나는 인간이며 내가 가진 최소한의 권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우리는 흔히 개념 없다는 말을 사용한다. 책 한 권으로 개념을 가질 수는 없지만, 이 책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개념 있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나만큼 소중한 타인을 위해서도, 타인만큼 소중한 나를 위해서도.


09012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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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353
강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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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연히 모든 것이 완벽해지길 꿈꾼다
  ― 장뤼크 고다르


  프랑스 누벨바그(Nouvelle Vague)의 선두 주자였던 고다르의 말이 심상치 않다. <네 멋대로 해라>를 떠올리며 책장을 열게 하는 것은 다분히 시인의 의도된 장치일 것이다. 영화의 이미지와 시의 이미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선명한 시각적 효과는 장면 이외에도 전달 방식에 따라 감독의 의도가 전달될 수 있으나 시에서는 철저하게 언어에 의해서만 독자들의 빈약한 상상력을 자극할 뿐이다. 의도된 오류는 고사하고 제대로 전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시는 어쩌면 더 이상 이미지의 생경한 전달에 그치는 장르의 시대를 끝냈는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할 때 우연에 기대어 김경주의 <기담>에 이어 강정의 <키스>를 읽었다. 두 시인은 따로 또 같이 시를 쓴 것처럼 보인다. 내게 그렇게 읽혔겠지만 재밌는 비교가 가능하다. 기묘하게도 두 사람의 공통점은 현재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특별한 연결고리나 교묘한 퍼즐로 엮어질 수는 없지만 언어를 가지고 논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문학을, 시를 더 이상 진지하고 깊은 고민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는 듯하다. 가볍고 기괴한 말놀음에 그친다는 것이 아니라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시의 언어는 일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문학언어와 일상언어 사이를 오가며 의미를 포착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독자는 보수적인 관점에서 더 이상 시에 기대하는 것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철저하게 기존의 문법대로 시가 주는 안락한 감성을 주문하는 것일까.

  두 시인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길을 간다. 강정의 <키스>는 낯선 이미지와의 접촉이며 일상을 비틀어보는 것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촉각적, 시각적 이미지의 범람이 아니라 온 생의 감각 세포들을 되살려내어 미세한 떨림까지도 포착하지 못한다면 금방 길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그가 무엇을 의도했든지 말이다. 이 시집의 서시를 보자.

死後의 바람

오래전 한 편의 詩가 끝나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민둥산의 태양을 끌어내렸다

불타는 시간들은 그대로 숲이 된다
인간이 인간 바깥으로 떠돌아 짐승의 마음을 허공에 쓴다


  불확실성 시대에 시는 더욱 불안하고 인간의 마음들은 허공을 헤맨다. 시인은 서시에서 불타는 시간의 숲에서 인간이 짐승의 마음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써나갈 것임을 암시한다. 시집 전체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타인에 대한 사랑, 그 매혹의 깊이에 대해 시인은 끊임없이 고뇌한다. 애무는 접촉이다. 관심이며 열정이고 몰입이며 안타까움이다. 나 혹은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견디고 인생을 살아가며 삶을 가꾸어 나간다.

  너는 문을 닫고 키스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 너의 문으로 들어간 나는 너의 심장을 만지고 내 혀가 닿은 문 안의 세상은 뱀의 노정처럼 굴곡진 그림들을 낳는다 내가 인류의 다음 체형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비는 점점 푸른빛과 노란빛을 섞는다 - ‘키스’ 중에서

  아스라이 멀어지는 감각. ‘부드러움과 달콤함’이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말해질 수 없는 느낌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감각적 이미지의 전달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전할 수 있는 이야기는 생경한 풍경과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세계로 표현된다. ‘문은 작지만 문 안의 세상은 넓다’고.

  시집 중간 중간 시인의 그림이 삽입되어 있다. 인간의 신체를 극단적으로 표현하여 부분이 극대화되고 생략된 신체는 기괴해 보인다. 온전한 모습으로 타인을 대하는 사람은 없다. 전면적인 접촉과 만남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 우리들의 관계가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고 언어가 만들어내는 불가능한 세계와 불편한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독자들은 그 안에서 어리둥절할 것이고 나름의 방법으로 현실과 이미지와 연결 작업을 시도할 것이다. 그것은 독자들의 몫일 뿐!

그렇지 않겠소?
어찌해도 당신은 내게 속아 넘어갈 뿐,
대체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용서하지 마시오 - ‘자멸의 사랑’ 중에서


  추상과 상징의 세계는 결국 현실의 메트릭스일 뿐일지도 모른다. 왜 아니겠는가. 현실의 행복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불가해한 현실 밖의 세계를 꿈꾸는 상상계의 일원이 되고 싶은 욕망을 어쩌겠는가. 어느 시인의 말대로 인생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늘 그 너머에 눈길을 던져본다.

  그저 한 몸 등 따시고 배부른 인생을 위해 질주하는 저 수많은 인간 군상들 뒤로 피어 오르는 먼지구름 너머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것은 통속적인 사랑의 결실도 아니고 즐거운 인생이라고 믿었던 신기루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단 한 번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너머에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걸 종교라는 이름으로만 포장하지 않는다면 용서할 수 있겠다. 또 그렇지 않으면 어떤가?

  이 시집에서 시인은 끊임없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이라 무어라고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말란다. 서로를 속이는 감정의 게임에서 정답도 없고 정해진 길 따위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터.

무엇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 보아도 보이는 건 안개처럼 희미할 뿐이다. 절대적인 것과 확실한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다.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애무일 뿐! 애무하라 그리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라! 고 시인은 외친다. 이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시집 해설에 간만에 밑줄 긋는다! 애무하기 좋은 밤이다.

애무를 넘어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의 접촉에는 고민도 순서도 있을 리 없다. 애인의 부드러운 살갗에 매혹되고 혀의 촉감에 넋 나간 사람이 다음 순간의 손놀림이나 자세 따위를 걱정할 틈이 있겠는가. 생각하고 준비할 겨를도 없이, 순간순간의 느낌에 몰두하며 사랑하는 이의 몸을 더듬고 또 더듬을 뿐이다. 애무는 최종의 완벽한 만족을 위해 거쳐야 할 단계는 아니다. 애무는 그 자체로 목적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결코 자기 수중에 거머쥘 수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 감지했지만 쉽사리 그 불가능을 수용할 수 없는 자의 절절한 몸짓이다. - [해설] ‘애무의 윤리(조연정)’ 중에서


090119-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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