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낯이 많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낯선 낯익음에 당황하여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내가 누구인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 ‘그와 눈이 마주쳤다’ 중에서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이다. 가장 일반적이고 익숙한 상황을 시로 엮어내는 것이 시인의 능력일 것이다. 김기택의 <껌>은 <소>에 이어 탁월한 성취를 보여준다. 언어들 사이의 긴장감이나 생동감이 아니라 오히려 느슨한 관계들로 묶여 있다. 이 시는 ‘그는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었다. 그는 고양이 가죽 안에 들어가 있었다.’로 이어진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익숙한 그를 만난다. 그는 나일 수도 있고 너일 수도 있다. 그 모든 독자들에게 혹은 자신에게 묻는다. 고양이 가죽 안의 당신은 누구인가. 김기택의 시는 고뇌의 흔적이나 내면의 통증을 우려내기보다 낯선 시각과 진지한 관찰에서 비롯된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문법이겠지만 김기택의 시는 김광규의 시처럼 일상에서 묻어나는 생활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비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고매한 정신을 노래하거나 생경한 언어의 세계에 천착하는 시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으나 김기택처럼 가장 익숙하고 가까운 곳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는 시도 있다. 단순하고 일상적인 무색무취의 시가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인은 낯선 상상력과 독특한 관점을 유지한다. 늘 그러하듯이 문제는 대상이 아니라 창조적 상상력과 표현이다.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 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는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 ‘껌’ 중에서 문학과지성사에서 <소>를 펴내고 창비에서 <껌>을 펴내는 시인의 선택도 재미있지만 한 글자로 된 시집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시의 내용이나 관심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그 안에서 낯선 질문들을 길어 오르는 모습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이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울과 죽음이다. 전체적으로 음산하거나 비극적 정서를 담아내고 있지는 않지만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화상이나 대상에 대한 관심이 기쁨과 명랑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생명이 없으나 ‘껌’의 일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 것들이 어디 한 둘 일까마는 수동적이며 피동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껌에 대해 생각한다. 그게 누구이든 껌의 운명은 비극적이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슬픔은 운명처럼 철저하게 대상에 각인되어 나타난다. 그 대상은 껌일 수도 있고 얼굴일 수도 있다. 이윽고 슬픔은 그의 얼굴을 다 차지했다. 수염이 자라는 속도로 차오르던 슬픔이 어느새 얼굴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었다. 혈관과 신경망처럼 몸 구석구석에 정교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 ‘슬픈 얼굴’ 중에서 가장 내성이 강한 바이러스는 슬픔이다. 면역이 생기지도 않고 특효약도 없으며 원인도 치료도 없을 때가 많다.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고 찾아오는 속도와 방법이 다르다. 혈관과 신경망처럼 구석구석 정교하게 퍼져 있으며 웃음이라는 극약 처방에도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뻔뻔스럽게도. 그러나 속수무책일 뿐이다. 전작 ‘소’에서 보여준 소에 대한 관심은 이번 시집에서도 간간이 드러난다. 영화 ‘워낭소리’로 전국이 냄비처럼 들끓는다. 독립영화라서가 아니라 주인공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5년만에 찾아낸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서 그랬을 것이다. 40년을 넘도록 슬픔조차 무심하게 견뎌낸 늙은 소의 모습은 그대로 인간의 모습이다. 임종 직전 할아버지가 코뚜레를 잘라 바닥에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유를 찾은 소는 도대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죽음이 두 콧구멍을 영원히 갈라놓을 때까지’ 늙은 소는 코뚜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코뚜레를 하고 다니는 우리들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시인이 본 것은 소의 코뚜레가 아니라 나의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는 깨달음!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찌프스보다는 우리의 삶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안도감! 두 콧구멍 사이에 수갑처럼 둥근 자물통이 채워져 있네. 두 콧구멍이 괜히 둘로 갈라질 리도 없고 콧구멍을 열어 그 안에 은밀히 감춰둘 것도 없으니 콧구멍 금고에서 꺼낼 특별한 보물도 없을 터인데 이상하다, 죽음이 두 콧구멍을 영원히 갈라놓을 때까지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자물통에서 열쇠구멍을 완벽하게 없애버렸으니! - ‘코뚜레’ 중에서 09030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