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은 작은 이야기다. 거창하고 대단한 이야기를 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고 사소한 이야기를 소설이라고 한다. 우리는 소설에게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저 낄낄거리거나 작은 미소를 띠울 수 있을 정도면 된다. 대다수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호기심과 두근거림이다. 무슨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얼마나 많은 한숨과 눈물이 기다리고 있을까, 포복절도 할 만큼 재밌는 이야기일까.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는 소설은 그렇게 쓰이고 그렇게 읽힌다. 독자를 배려하는 작가도 있고 그저 자신의 표현 욕구에 충실한 작가도 있다. 한과 그리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작가도 있고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작가도 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작가도 있고 숨겨진 역사의 이면을 상상하는 작가도 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아픔과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애정을 가진 작가도 있다.

  소설은 그렇게 다양하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듯하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과 가족의 이야기는 가장 흔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재미있는 소재다. 가장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보편적 정서에 기댈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풀어낸다면 실패할 확률 또한 가장 높다. 진부하고 지루한 이야기만큼 독자들을 못견디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주목받는 젊은 작가 중의 하나인 김애란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달려라, 아비>를 읽었다. 그녀의 첫 소설집으로 2005년에 출판되어 2008년에 15쇄를 찍었으니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때 이 책을 읽지 않은 개인적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칙릿(chick+literature)이라는 이름으로 유행처럼 번져가던 가벼움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서유미, 정이현 등의 소설은 2, 30대 여성들의 생활과 고민들을 감각적 필치로 그려내고 있어 쉽게 읽히고 흥미롭다는 특징을 지닌다. 섬세한 심리묘사나 여성 특유의 감각적 문장들은 재미를 더했지만 개인적으로 취향에 맞지 않았다. 이후 등장하는 소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애란의 이 소설집은 그것과 조금 구별된다. 20대의 젊은 여성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가볍고 작위적이지 않았다. 각각의 단편들 속에는 실존적 고민에 대한 깊이가 느껴졌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다. 이 시대에 20대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행간에서 읽었다. 그 대척점에 있는 ‘아버지’의 존재는 크고 무거운 느낌이 아니라 희화되고 가벼운 대상으로 치환되어 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한다. 표제작이 된 ‘달려라, 아비’는 아버지를 재미있는 방식으로 극복(?)한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젊은 작가는 직접 체험으로부터 소설에 진정성을 더하고 간접체험으로 상상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단편은 탁월하게 현대 사회의 단면을 들춰내며 우리들의 일상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누구나 감시당하며 살 수밖에 없는 판옵티콘의 세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노크하지 않는 집’은 고시원이라는 주거형태에 대한 냉정한 통찰을 담고 있다. 그것이 확대되면 아파트의 삶이고 통조림처럼 확대 재생산되는 기계적인 욕망과 현대적 삶이 된다. 슬프고 섬뜩하다.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를 살펴보고, 아버지의 삶을 추측하며 나의 이야기 속에서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흔적들이 신선하게 읽혔다. 소설은 그렇게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거대한 탑을 쌓는 법이다. 당당하고 경쾌한 문장과 감각적이고 진지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그녀의 문체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재미있는 만큼 많은 독자들이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즐겁고 아름다운, 슬프고 눈물나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소설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090306-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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