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가르드 비타 악티바 : 개념사 5
노명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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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나를 격동시키는 것은 오직 자유라는 말뿐이다.”(초현실주의 선언, 앙드레 브르통, 1924) - P. 84

  어디에도 길은 없었다. 처음부터 만들어진 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 사람, 두 사람 걷다보면 길이 된다. 중요한 것은 길이 아닌 곳에 처음 발을 디디는 사람이다. 도전자, 개척자, 선구자로 명명되는 그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역사에서 영웅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어떤 사명감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수하게 내적인 욕망이 넘치거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을 것이라 믿는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이기적인 목적이라면 중간에 서 있으면 된다. 군대생활의 비법이라 전해지는 그것처럼.

  앞장 서는 사람은 외롭다. 때로는 혹독한 비난을 감수해야 하며 미쳤다는 소리도 들어야 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사람에게 항상 격려와 박수가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행동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행동하다 보면 몸은 편하고 정신도 고달프지 않다.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남들이 하던 대로. 그러면 최소한 중간은 가고 나에게 커다란 불이익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걸 철이 든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현실에 적응했다고 표현하기도 하며 나이가 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긍정적 의미이든 부정적 의미이든 철들지 않는 게 나의 인생 목표 중 하나다. 나이 값 못하고 싶은 게 작은 바람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얄팍한 이기심과 눈앞에 이익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귀찮아서 혹은 몰라서 그렇게 사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만 이기적인 목적이나 뻔히 들여다보이는 이유 때문이라면 오래가지 못한다. 자신을 물론 주변 사람들도 금방 안다. 모른 척 해도. 문제는 그런 사람들의 삶의 방법과 태도가 확고한 신념이 되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오르기도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불행이다. 그것을 깨뜨리기 위한 연대와 실천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혼자라도 나서 척후병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흔히 찾기 어렵다.

  시대를 앞서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 모두를 진정한 아방가르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근대 예술 분야에서 나타난 유일한 흐름만이 아방가르드는 아닐 것이다. 도도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현실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미래를 향한 흐름을 읽어낸 사람들을 우리는 진정한 아방가르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전투의 선봉에 선 척후병을 이르는 말이었다. 미래의 예언자이며 후위 전체를 책임져야 하는 첨단의 위치에 선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 아방가르드다. 예술사에서 전위부대가 등장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예술가들이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시기에 등장한 자연스런 흐름이다. 패트런이나 궁정소속으로 신분 자체가 독립적이지 못한 예술가에게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끝없는 도전과 도발을 통해 기성 예술의 권위를 공격했고,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예술을 시도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과거의 예술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예술을 시도하고 보여줬으며 온몸으로 실천했던 사람들이 아방가르드다. 회의적 시선과 비판적 관점이 아방가르드의 조건이다. 전통을 거부하고 민첩하고 용감하게 그리고 대범하게 행동으로 옮긴 예술 행위를 우리는 아방가르드라고 부른다.

  노명우의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흐름과 예술사의 과거를 추억하는 책이다. 예술사는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인류의 역사가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였듯이 말이다. 미술관과 박물관에 박제된 예술에 대한 도전과 반항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까? 궁정 예술과 후원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난 예술은 어떠했을까? 책세상의 개념사 시리즈는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참신한 기획으로 좋은 책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미래파 선언, 초현실주의 선언 등 아방가르드의 도발이 시작된 것은 사회, 역사적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회적 배경이나 문화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화장실 변기를 오브제로 사용하여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뒤샹을 누구 쳐다보기나 했겠는가? 이제 그 변기는 미술품 경매장에서 1700만 달러에 거래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지나간 역사의 추억이 아니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예술이다.

  더더욱 독창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적 시도가 오히려 예술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드름을 피우거나 미술관 안에 박제된 예술에 대한 거부는 계속될 것이다. 다변화되는 사회에서 고정된 예술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자본에 포섭된다. 역설적으로 기존의 질서와 권위에 대한 파괴로 명성을 얻은 예술품들이 이제는 가장 상업적인 미술품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의 산업시스템은 모든 예술품을 화폐로 환산시키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방가르드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아니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언제나 아방가르드는 있다. 실패와 성공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감내하면서 우리는 그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며 동참할 준비를 해야한다. 한발 더 나아가 내가 아방가르드가 되어야 한다는 진취적인 생각과 행동이 세상을 조금 바꿀 수 있다. 나는, 아니 우리는 항상 그들이 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들이 전해주는 미래의 메시지를 기다린다. 아방가르드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0903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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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
지승호 인터뷰어, 김수행 대담 / 시대의창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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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책은 읽으면서 감정이 기복이 심해진다. 한 사람이 저자와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며 울고 웃는다. 때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고 때로는 파안대소하며 하늘을 보며 웃는다. 잔잔한 미소와 쓴 웃음이 교차하기도 하고 눈물이 차오를 정도로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겨우 참기도 한다. 한 인간에게 한 권의 책이 주는 영향은 지대하다. 영혼의 참된 스승은 종교가 아니라 책이라고 믿는다면 많은 종교인들에게 몰매를 맞을까?

  평생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확인할 수도 있는 한 권의 책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가. 앎의 세계는 끝이 없고 인식의 힘을 기르는 일은 내 존재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어렵고 난해한 철학책 한 권을 붙들고 평생 씨름할 수도 있고 재미있는 만화책을 하루에 수십 권씩 읽어낼 수도 있다. 문제는 내 영혼의 깨달음이다. 그 도구가 책이든 아니든 말이다. 가장 손쉽게 값싸게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도구는 여전히 책이 담당하고 있다.

  지승호는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인터뷰어다. 지금까지 지승호가 보여준 혹은 만난 사람들과 엮어낸 책들은 그것을 간단하게 증명한다. 전문 인터뷰어로서 한 우물을 파는 일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그 많은 어려움과 고통들을 즐길 줄 아는 인터뷰어가 지승호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읽어온 지승호의 인터뷰집은 앞서 말한 책이 주는 의미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만을 믿고 책을 사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지승호는 내게 그런 인터뷰어다.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 또한 기대에 부합하는 책이다. 인터뷰이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게 아니라 곤란한 질문도 하기 싫은 말도 해야 한다. 혼자서 잘 알거나 하고 싶은 말만 써 놓은 것을 읽어야 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색다른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독자의 입장을 대신하는 인터뷰어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지승호의 인터뷰집은 인터뷰이에 대해 샅샅이 훑어낼 수 있는 지독한 근성과 철저한 준비가 돋보인다.

하여간 당신한테 잡히면 끝장을 봐야 돼. 이제 정말 끝난거야?(웃음) - P. 338

  인터뷰이 김수행의 마지막 말이다. 난 이 말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인터뷰어 지승호에게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있을까 싶다. 믿을만한 인터뷰어 지승호가 김수행으로부터 끌어낸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경제’ 이야기다. 1987년 ‘서울의 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 김수행의 서울대 교수 임용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가 이제 정년 퇴임을 했고 그와 유사하거나 동일한 전공 교수는 아직 임용되지 않고 있고 임용될 가능성도 높지 않아 보인다. 주류 경제학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들만의 리그는 여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언제나 비주류와 소수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하고 그들과 공감할 수 있어야 세상은 조금씩 따뜻해진다고 믿는 나는 지승호의 인터뷰가 가슴 아팠다. 2009년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도 그가 던지는 질문의 깊이도 김수행의 대답도 모두 현실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며 새로운 사회에 대한 도전과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희망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살아가지만 모두가 공감할 만한 정책도 대안도 부재한 불행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로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간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이 21세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고 그의 이론들이 현재적 유용성을 가진 것인가부터 논란의 초점이 된다. 용도 폐기된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구소련이 붕괴했고 중국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용인함으로써 게임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자유주의 물결은 지구를 뒤덮었고 불평등한 게임인 시장의 논리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믿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면 알려야 하고 알고 있다면 연대와 행동으로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 책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 고민의 단초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은 21세기 한국 경제를 위한 대안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올 수 있다. 혁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넘어서는 상상력은 몽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야 한다. 분명한 문제들이 노출되고 민중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는데 손 놓고 앉아 마냥 하늘만 쳐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점진적 혁명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말자. 세계적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허리띠만 졸라매면 되는 게 아니다. 대졸 초임 임금을 깎아 고용을 늘리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없다.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고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우리들이 원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어쩌면 한 번도 상상해 본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어진 현실과 살아갈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거역할 수 없는 고정된 실체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마지막에 우석훈과 김수행이 함께 나눈 대화들은 참담한 현실에 대한 확인이며 미래의 희망을 촛불에 담아내려는 뒷담화에 불과하지만 읽는 사람들에게 알고 행동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는다. 언제나 지식의 종착역은 행동이므로.

  민중들의 외침을 외면한 어떤 정권도 살아남지 못했으며 역사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 걸음씩 이 사회를 이끌고 나아왔다. 그것은 권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이 땅의 참 주인인 민중들의 힘이었다. 노동자, 농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땀흘려 이루어낸 작은 결실들이 자본의 논리로 어처구니없는 힘의 논리로 사라져버리는 일이 없도록 고민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이 우리들 모두의 몫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아버지가 노동자, 농민이었고 우리들이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지승호는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긴 인터뷰를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090308-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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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4 17: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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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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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작은 이야기다. 거창하고 대단한 이야기를 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고 사소한 이야기를 소설이라고 한다. 우리는 소설에게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저 낄낄거리거나 작은 미소를 띠울 수 있을 정도면 된다. 대다수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호기심과 두근거림이다. 무슨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얼마나 많은 한숨과 눈물이 기다리고 있을까, 포복절도 할 만큼 재밌는 이야기일까.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는 소설은 그렇게 쓰이고 그렇게 읽힌다. 독자를 배려하는 작가도 있고 그저 자신의 표현 욕구에 충실한 작가도 있다. 한과 그리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작가도 있고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능력이 있는 작가도 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작가도 있고 숨겨진 역사의 이면을 상상하는 작가도 있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아픔과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애정을 가진 작가도 있다.

  소설은 그렇게 다양하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듯하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과 가족의 이야기는 가장 흔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재미있는 소재다. 가장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보편적 정서에 기댈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풀어낸다면 실패할 확률 또한 가장 높다. 진부하고 지루한 이야기만큼 독자들을 못견디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주목받는 젊은 작가 중의 하나인 김애란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달려라, 아비>를 읽었다. 그녀의 첫 소설집으로 2005년에 출판되어 2008년에 15쇄를 찍었으니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때 이 책을 읽지 않은 개인적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칙릿(chick+literature)이라는 이름으로 유행처럼 번져가던 가벼움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서유미, 정이현 등의 소설은 2, 30대 여성들의 생활과 고민들을 감각적 필치로 그려내고 있어 쉽게 읽히고 흥미롭다는 특징을 지닌다. 섬세한 심리묘사나 여성 특유의 감각적 문장들은 재미를 더했지만 개인적으로 취향에 맞지 않았다. 이후 등장하는 소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애란의 이 소설집은 그것과 조금 구별된다. 20대의 젊은 여성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가볍고 작위적이지 않았다. 각각의 단편들 속에는 실존적 고민에 대한 깊이가 느껴졌다. 물론 개인적인 판단이다. 이 시대에 20대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도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행간에서 읽었다. 그 대척점에 있는 ‘아버지’의 존재는 크고 무거운 느낌이 아니라 희화되고 가벼운 대상으로 치환되어 그녀의 소설 속에 등장한다. 표제작이 된 ‘달려라, 아비’는 아버지를 재미있는 방식으로 극복(?)한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젊은 작가는 직접 체험으로부터 소설에 진정성을 더하고 간접체험으로 상상력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단편은 탁월하게 현대 사회의 단면을 들춰내며 우리들의 일상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누구나 감시당하며 살 수밖에 없는 판옵티콘의 세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노크하지 않는 집’은 고시원이라는 주거형태에 대한 냉정한 통찰을 담고 있다. 그것이 확대되면 아파트의 삶이고 통조림처럼 확대 재생산되는 기계적인 욕망과 현대적 삶이 된다. 슬프고 섬뜩하다.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를 살펴보고, 아버지의 삶을 추측하며 나의 이야기 속에서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흔적들이 신선하게 읽혔다. 소설은 그렇게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거대한 탑을 쌓는 법이다. 당당하고 경쾌한 문장과 감각적이고 진지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그녀의 문체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재미있는 만큼 많은 독자들이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즐겁고 아름다운, 슬프고 눈물나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소설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090306-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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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진보의 정신분석 살림지식총서 344
김용신 지음 / 살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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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래디컬radical이라는 말을 좋아하다는 강유원의 말을 좋아한다.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과감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것을 용기라고 한다. 때와 장소를 가리고 사람과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래디컬과 거리가 멀다. 신념이나 가치관도 한 사회의 결과물이고 보면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올곧은 정신은 높고 푸르다.

  우리 사회는 참혹한 근대사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레드 콤플렉스는 여전히 유효하며 정치는 여전히 민감한 주제다. 일상생활에서 친구나 동료지간에도 정치적 지향점이 다르고 선호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제각각이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정당의 정강이나 정책, 정치인의 품성과 정치적 성과보다 감정에 우선하고 보수와 진보라는 자신의 성향과 일치한다.

  당연하게도 보수적 정당이나 진보적 정당이나 선명한 색깔을 드러내지 못하고 유권자의 눈치만 보거나 유권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한나라당이라는 수구보수 정당과 그보다는 조금 더 개혁적이라고 스스로 외치는 민주당과 현실의 적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진보적인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있다.

  최근에 들어 보수와 진보의 개념이 중요해진 것은 아니다. 오래된 이념 논쟁이지만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정권 교체 이후 현실 정치와 사회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권력과 정권 유지 수단으로 내세운 경제는 파탄 지경이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서민들은 더욱 힘겨운 생활이 보장되었다. 앞날은 보이지 않고 그들만의 리그는 성황리에 치러지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정신분석>은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과 사람들의 이념에 대해 점검을 시도하는 책이다.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극도로 언급을 회피하고 있으며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거론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이 한번쯤은 반드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들에 대해 꼼꼼히 짚어나가고 있다.

  특히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사람들의 의식에 내재한 정치적 성향들은 나이와 계층과 성별과 학력과 지역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교육에 의한 것이거나 주변의 상황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환경과 인식의 전환점에 따라 보수와 진보는 결정되기도 한다. 모든 외적 조건이 진보적일 것 같은 사람도 보수적인 부분이 있고 대단히 보수적인 사람도 진보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지니는 이념적 성향은 개인의 이익과 결부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사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리사욕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대상은 보수와 진보의 의미와 정신분석적 의미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특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퇴행적 정치 행태를 보이며 단 한 번도 국민들에게 감동을 준 적이 없는 정치인들 보며 정치에 대한 철저한 냉소와 혐오감만 늘어가는 일은 슬픈 일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을 살펴 보수와 진보의 병리 현상의 원인을 파헤치고 있다. 이념의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는 건전한 갈등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목숨을 걸고 죽거나 죽이거나! 최소한의 신의나 배려가 없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곳이 바로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그 원인을 아는 것도 한국인으로 태어난 우리의 숙명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의미도 결국에는 보수와 진보 너머의 길을 찾아보자는 것을 게다. 대결과 갈등이 아니라 화합과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해가며 이 책을 끝내는 저자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당분간 어떤 대안도 한국의 정치 현실을 의회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무의식에 내재한 한국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진보와 보수의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고민해 보는 것은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퇴행적 민주주의가 판을 치는 현실을 바라보면 한숨만 절로 나온다. 법무부 장관이 국회의원을 조폭 다루듯이 하겠다고 공언하고 공권력은 서민들을 태워죽이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며 보수 신문재벌에게 방송을 내주고 국민들을 길들이기 위한 작업은 강도높게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사회적 통합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념을 떠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하다 보면 우리에게도 ‘똘레랑스’가 생길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대상으로 보지 말고 서로의 주장을 단 한 번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줄 준비만 되어 있다고 하면 겁 없이 날뛰는 정부도 없었을 것이고 국민을 볼모로 내세우는 정당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래디컬하지만 표현 양상이나 현실에 대한 대응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낯선 시간과 생경한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현실 속의 유리벽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진보든 보수든, 혁명이든 개혁이든 어떤 이념과 규정으로도 견고한 현실의 벽을 허물기가 너무 벅찰 때가 있다. 힘겨운 싸움이지만 평생 지속되어야 할 것 같다. 어차피 그러하겠지만 모든 보수여, 이대로! 모든 진보여, 혁명의 그날까지!


090304-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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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시선 298
김기택 지음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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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낯이 많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낯선 낯익음에 당황하여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내가 누구인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 ‘그와 눈이 마주쳤다’ 중에서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상황이다. 가장 일반적이고 익숙한 상황을 시로 엮어내는 것이 시인의 능력일 것이다. 김기택의 <껌>은 <소>에 이어 탁월한 성취를 보여준다. 언어들 사이의 긴장감이나 생동감이 아니라 오히려 느슨한 관계들로 묶여 있다. 이 시는 ‘그는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었다. 그는 고양이 가죽 안에 들어가 있었다.’로 이어진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익숙한 그를 만난다. 그는 나일 수도 있고 너일 수도 있다. 그 모든 독자들에게 혹은 자신에게 묻는다. 고양이 가죽 안의 당신은 누구인가. 김기택의 시는 고뇌의 흔적이나 내면의 통증을 우려내기보다 낯선 시각과 진지한 관찰에서 비롯된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문법이겠지만 김기택의 시는 김광규의 시처럼 일상에서 묻어나는 생활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비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고매한 정신을 노래하거나 생경한 언어의 세계에 천착하는 시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으나 김기택처럼 가장 익숙하고 가까운 곳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되는 시도 있다. 단순하고 일상적인 무색무취의 시가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인은 낯선 상상력과 독특한 관점을 유지한다. 늘 그러하듯이 문제는 대상이 아니라 창조적 상상력과 표현이다.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 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는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 ‘껌’ 중에서

  문학과지성사에서 <소>를 펴내고 창비에서 <껌>을 펴내는 시인의 선택도 재미있지만 한 글자로 된 시집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시의 내용이나 관심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그 안에서 낯선 질문들을 길어 오르는 모습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이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울과 죽음이다. 전체적으로 음산하거나 비극적 정서를 담아내고 있지는 않지만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화상이나 대상에 대한 관심이 기쁨과 명랑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생명이 없으나 ‘껌’의 일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 것들이 어디 한 둘 일까마는 수동적이며 피동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껌에 대해 생각한다. 그게 누구이든 껌의 운명은 비극적이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슬픔은 운명처럼 철저하게 대상에 각인되어 나타난다. 그 대상은 껌일 수도 있고 얼굴일 수도 있다.

이윽고 슬픔은 그의 얼굴을 다 차지했다.
수염이 자라는 속도로 차오르던 슬픔이
어느새 얼굴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었다.
혈관과 신경망처럼 몸 구석구석에 정교하게 퍼져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 ‘슬픈 얼굴’ 중에서

  가장 내성이 강한 바이러스는 슬픔이다. 면역이 생기지도 않고 특효약도 없으며 원인도 치료도 없을 때가 많다.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고 찾아오는 속도와 방법이 다르다. 혈관과 신경망처럼 구석구석 정교하게 퍼져 있으며 웃음이라는 극약 처방에도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뻔뻔스럽게도. 그러나 속수무책일 뿐이다.

  전작 ‘소’에서 보여준 소에 대한 관심은 이번 시집에서도 간간이 드러난다. 영화 ‘워낭소리’로 전국이 냄비처럼 들끓는다. 독립영화라서가 아니라 주인공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5년만에 찾아낸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이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서 그랬을 것이다. 40년을 넘도록 슬픔조차 무심하게 견뎌낸 늙은 소의 모습은 그대로 인간의 모습이다. 임종 직전 할아버지가 코뚜레를 잘라 바닥에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유를 찾은 소는 도대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죽음이 두 콧구멍을 영원히 갈라놓을 때까지’ 늙은 소는 코뚜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코뚜레를 하고 다니는 우리들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시인이 본 것은 소의 코뚜레가 아니라 나의 모습일 지도 모르겠다는 깨달음!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찌프스보다는 우리의 삶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안도감!

두 콧구멍 사이에
수갑처럼 둥근 자물통이 채워져 있네.
두 콧구멍이 괜히 둘로 갈라질 리도 없고
콧구멍을 열어 그 안에 은밀히 감춰둘 것도 없으니
콧구멍 금고에서 꺼낼 특별한 보물도 없을 터인데
이상하다,
죽음이 두 콧구멍을 영원히 갈라놓을 때까지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자물통에서 열쇠구멍을 완벽하게 없애버렸으니!

- ‘코뚜레’ 중에서


09030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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