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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김희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5월
평점 :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삶은 계속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이 모여 한 생애를 이루고 그것들이 미래를 만들어 간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애매하게 행동한다. 산다는 것은 과정을 즐기는 일이라고 하지만 종교적 믿음이나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한 경지이다.
삶을 여행에 곧잘 비유한다. 마라톤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조금씩 나아간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시간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겸손해지고 죽음 앞에서 경건해지게 마련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뒤돌아 볼 때 미소 지으며 행복했노라고 그리고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혼자 있는 시간이면 가끔씩 명상에 잠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또 죽어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으며 어떤 길을 따라 걷고 있는지, 서로 다른 길을 걷다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로나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더욱 난감하기만 하다. 편견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길이 옳다고 주장한다. 중립이 있을 리 없건만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한쪽만 바라보며 격렬하게 증오한다. 삶이 길에는 정답이 없지만 모두 같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흔적들이 남아있고 그 발자국과 땀방울들은 우리에게 훌륭한 이정표가 된다. 먼저 간 사람들에게 배우고 익히지만 사람은 여전히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용서받고 또 상처를 주고받으며 함께 걸어간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쉽게 알지 못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어렴풋이, 조금씩 깨닫기 마련이다. 그래서 항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게 된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귀가를 전제로 한다. 여행은 분명한 출발과 도착이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물론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에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기대하기도 하고 여행 자체의 즐거움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렇게 유목과 정착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어디로 떠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결국 인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정의하는 사람이 있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관계 맺음의 연속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해진 관계와 굳건한 틀 속에서 지내는 안정감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모든 사람이 거기에 만족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움과 낯설음에 대한 동경, 설레임과 기다림이 주는 두근거림은 여행을 떠나는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여행의 목적에 따라 장소와 방법과 일행이 결정되겠지만 그 모든 여행은 항상 떠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김희경의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은 낭만적이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 여행 이야기다. 저자는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km를 걷는 순례코스를 걷는다. 카미노라고 불리우는 그 길은 한쪽 방향으로만 걷는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는 순례자 혹은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게 펼쳐진다.
혼자서 먼 길을 여행하면서 저자가 만난 것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걷는 목적은 저마다 달랐겠지만 걸으면서 만난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자신을 풀어놓고 가슴속에 돌덩이 하나씩을 내려놓는다. 저자는 동생을 잃었다. 특별한 상황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떠난 혼자만의 여행이다. 카미노를 걷는 여정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선하기 보다는 그 길 자체가 가진 힘이 놀랍다. 종교적 믿음과 무관하게 걷는 무슬림도 있었고 일행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자처럼 혼자 걷는 사람도 물론 많았다. 그들은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과연 그 길에서 수많은 깨달음을 얻고 내면의 변화를 겪었을까.
중요한 것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걷는 행위 자체가 여행이고 길이며 목적이다. 한 달이 넘도록 마냥 걸으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길가에 나무와 풀과 하늘과 바람이 저자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저자는 이 책에 다 적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걸어보지 않는다면 그 말들을 어찌 전해들을 수 있을까. 여행에 관한 책이 가진 태생적인 한계이다. 가이드 북이나 참고 도서는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
그래도 이 책의 저자는 담담하고 편안한 문장으로 여정과 감상을 상세하게 전달하고 있다. 세심하게 메모한 듯 만남과 이별, 대화 내용,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적절하게 삽입된 사진과 이정표가 여행의 기록으로 손색이 없다. 읽는 사람에게 그곳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면 성공한 책이 아닐까 싶다.
두려움(Fear)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의 약자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가짜 증거’ 때문에 마비된 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두려움이 진화 과정에서 인간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한 신호기제로 신경에 장착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의심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내 미천한 경험으론, 정말 두려운 일은 아무런 전조 없이 찾아왔다. 멀쩡하고 평온했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동생을 잃었던 경험이 그런 경우였다. - P. 251
유사한 경험을 했던 내겐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문장이었다. 여행은 결국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아닐는지. 복병처럼 숨어있는 불행, 감당할 수 없는 공포, 체험을 통한 고통. 여행은 그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누구나 여행을 떠나야 하는 건가. 책 몇 권 짊어지고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자유만 허락된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090526-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