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0시 5분
황동규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로 시작되는 ‘즐거운 편지’를 버스에서 중얼거리며 등교하던 고등학교 시절이 까마득하다. 시에 처음 눈뜰 무렵부터 읽어 온 그의 시는 여전히 낯설지 않고 살갑다. 표지 사진이 세월을 말해주는 듯 노시인의 눈빛이 깊고 부드럽다.

  <겨울밤 0시 5분>을 통해 황동규의 근작들을 음미한다. 시인에 대한 믿음과 연륜이 어우러져 언어의 축제를 벌이는 듯하다. 화려하고 장엄한 풍경을 노래한다는 뜻이 아니라 정겹고 자연스러운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된다. 여전히 긴장감 넘치는 표현과 신선한 감각이 살아 있다. 이번 시집의 특징을 뭐라고 이야기하든 황동규의 시에 흐르는 따뜻한 서정과 생의 대한 감각적 통찰은 여전하다.

  자연에 묻혀 생을 이야기하고 순간순간 마주하는 인상들과 이미지들을 풀어놓는 솜씨는 거침이 없고 물 흐르듯 편안하다. 개인적 서정의 극한을 보여주려는 듯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대상들을 언어로 표현하여 한 편의 시가 완성된다. 그의 시는 환하고 따뜻하다. 하지만 때때로 외롭고 쓸쓸하다.

어느 초밤 화성시 궁평항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맘때가 정말 마음에 든다.
황혼도 저묾도 어스름도 아닌
발밑까지 캄캄, 그게 오기 직전,
바다 전부가 거대한 삼키는 호흡이 되고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원지로 가는 허연 시멘트 길이
검은 밀물에 창자처럼 여기저기 끊기고 있었다.
기다릴 게 따로 없으니
마음 놓고 무슨 색을 칠해도 좋을 하늘과 바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 냄새,
밤새 하나가 가까이서 끼룩댔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혼자 있어서 홀가분한 이 외로움,
외로움 아닌 것은 하나씩 마음 밖으로 내보낸다.
속에 봉해뒀던 사람들은 기색이 안 좋지만
하나씩 말없이 나간다.
쓰라리고 아픈 것은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비릿한 냄새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 비울 게 없으면 시간이 휘는지
방금 읽고 덮은 휴대폰 전광 숫자가 떠오르지 않는다.
선창에서 배 하나가 소리 없이
집어등을 환히 켰다.


  시간과 장소가 어우러져 낮과 밤의 경계를 건너는 순간을 보여준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이미지가 언어로 되살아난다. 시각과 후각으로 감지되는 저녁 어스름을 시인은 궁평항에서 온몸으로 맞았으리라. 하지만 그 속에 나는 없고 대상과 풍경만 존재한다.

  아득하게 모든 것이 무화되는지 시인은 집어등과 함께 사고의 흐름을 멈춰버린다. 혼자 있어 홀가분한 외로움이 아니라 환한 집어등에 대한 동경으로 읽혔다. 무엇엔가 마음을 빼앗기면 생의 감각은 벅차오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겨울밤 0시 5분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텨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 중 략 ……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했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 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사람냄새 나는 시다. 버스 종점에서 막차를 기다리며 별을 바라보는 시인과 낯선 사람들. 그들에게 시인은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그건 아마도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 게다. 무엇이 집 앞에서 종점으로 그를 이끌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독자라면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함이나 외로움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행동과 말들 저편에 생의 부조리와 허허로움이 서 있는 듯하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혹은 바닷가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다를까?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풀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주 작은 존재가 되었다가 무의미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삶의 의욕을 얻기도 하고 허무한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겨울밤은 그리고 0시 5분 그런 시간이다.

낯선 외로움

자기만의 길이와 폭과 분위기를 가지고 살면서 풀에겐들
왜 저만의 슬픔과 기쁨이 따로 없으랴.
마주 앉아 찻잔 비울 때까지
속으로 삭이고 삭여야 할 생각 왜 없으랴.
삭이고 일어설 때 사방에 썰물 빠지는 적막, 속의 황홀!

학교 식당 건물과 땅 틈새에 배죽 나온 저 풀,
오늘은 노란 꽃대 하나 조그맣게 내밀었다.
손가락 끝으로 얼굴 들어보니
쬐끄만 꽃잎과 꽃술들이 오밀조밀 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조금 싸한 냄새까지 한 모양을.
왜 한 뼘쯤 앞으로 기어 나와 좀 편히 살지 않을까,
거기도 인간의 발길 채 닿지 않는 곳인데.
풀에게도 끼가 있는가?
기차게 고달파도 제 본때로 살아보겠다는?
말이 없어서 그렇지
몸을 온통 졸이는 황홀한 낯선 외로움이?

  누구에게나 그리움이 있듯이 풀에게도 황홀한 낯선 외로움이 있다. 사람도 저마다 제 자리가 있듯 풀이 돋아난 자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운명을 거부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산다는 일이 어쩌면 잘못 삐져나온 꽃대처럼 신산스럽기만 하다. 한 뼘만 벗어났다면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을, 사람도 그리 하지 못한다.

  내 것을 다른 대상에게 발견할 때 우리는 낯설어한다. 외로움도 그렇다. 실체없는 감정이나 존재의 상태를 이르는 말이지만 타인이나 사물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생경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외로운가?

잠깐동안

잠깐!
삶이 잠깐 동안이라는 말이 위안을 준다.
잠깐이 몇 섬광(섬광)인가?


  외로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슬픔도 잠깐 동안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견딜 만하다. 삶이 섬광처럼 지나가버린 듯 노년을 맞은 시인은 잠깐이 몇 섬광이냐고 되묻고 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깨달음일 것이다. 현재를 살지만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일까 안타까움일까.

  창밖에 당도해 버린 어둠처럼 죽음도 그렇게 우리에게 어김없이 찾아온다. 단 한 번은. 살아있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매일매일이 안타깝게 느껴질 수 있도록 치열하게(?) 혹은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편지

얼굴이 많이 까칠해졌습니다.
허나 감기 타듯 암벽 타듯 해온 삶
손보지 않겠습니다.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
딸인가 눈 지그시 감은 아이 옆에 세워놓고
손 벌린 눈먼 사내에게 천 원으로 알고 내민 만 원
깡통에 떨어트리고
천 원짜리로 알았겠지? 아쉬워할 만큼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

기억의 화면에는 온갖 것들이 무작위로 뜹니다.
산책길에 굴러 내리다 간신히 자리 잡았던 돌이
또다시 구릅니다.
싸락눈 흩날리는 뜰에 혼자 핀 꼿이
겁 없이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왜들 그러는지 모를 만큼 멍청합니다.

오늘은 마을 공터에서 아이들이 날리는 배드민턴 콕을
재치 있게 피했지요.
언젠가 이런 편지 쓰는 일마저 싫증나면
마음 한가운데 생짜 공터가 생기리라는 생각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생각나시면, 지난해 새끼줄로 칭칭 동여맨 나무들
두 번째 봄비 내릴 때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얻은 결론이 삶은 아직 멍청한 하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고 노래하던 ‘조그만 사랑 노래’의 시인이 이제는 ‘삶은 아직 멍청합니다’고 말한다. 생의 보편적 진리를 깨달을 것일까 아니면 생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이제 그 모든 순간의 연속이 삶이며 미리 알고 정할 수 없다는 생각쯤은 어렴풋이 할 만하다.

  황동규의 시를 읽으며 욕심이 사라지고 생의 감각이 살아나고 깨달음을 얻을 만큼 마음이 맑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고개 숙이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멍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듯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의 시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람이다. 메마른 가슴도 아니고 감각이 무딘 것도 아니지만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거나 힘겨워 고통스런 사람은 없고 시인 홀로 외롭고 쓸쓸하다. 대상에 부딪치는 모든 감각들은 싱싱하게 살아있는 촉수를 뻗고 있으나 그 촉수가 사람에게 가 닿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육화되어 뿜어져 나오는 정제된 언어임에는 틀림없다. 정갈하고 깨끗한 신새벽의 맑은 정한수처럼.


090517-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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