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 한국경제 (이준구) - 이준구 교수의, 이념이 아닌 합리성의 경제를 향하여
이준구 지음 / 푸른숲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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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눈은 두 개다. 한쪽 눈을 감아보면 다른 한 쪽 눈의 중요성을 금방 알게 된다. 시야가 좁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거리 측정이 잘 안 된다. 정확하게 사물의 윤곽을 유추하기도 힘들뿐더러 입체적인 느낌이 사라지고 평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끔 윙크하듯 한쪽 눈을 번갈아 감고 두리번거리는 장난을 한다. 그러고 나면 두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은 건강하지 못하다. 그것을 진보와 보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좌익과 우익이라고도 한다. 새는 한 쪽 날개만으로 날지 못하니 좌익과 우익이 균형을 이루고 서로 견제하며 문제점을 보완하고 서로 경쟁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거리가 멀다. 진흙탕에서 뒹구는 개처럼 서로 물어뜯고 죽도록 싸우며 공멸의 길을 걷는다. 양비론과 양시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나쁜 평가도 없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마음도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이념과 무관하게 작은 행복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상식과 행복이라는 것도 기준이 다르고 방법이 천차만별이다. 부자의 이기주의와 가진 자의 욕망은 절제되지 않는다. 없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권력과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만들어간다. 과연 그것이 지속 가능한 행복을 약속해 줄 것인가? 역사는 그렇게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고 믿는 것일까?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눈과 타인을 배려하고 ‘더불어 함께’ 걷는 길을 택하는 것은 개인의 인성으로만 돌릴 문제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바라지도 않는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돌아보고 근대화 과정을 되짚어보면 높은 사회적 신분을 획득했거나 많은 돈을 축적한 사람들을 정당한 노력과 땀의 결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생존 경쟁과 승자 독식의 잔인한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승리자가 되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동원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체로 돈이 많은 경우 승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우는 그 정도가 상식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인과 관계도 없고 합리적인 생각도 아닌 그들만의 요구와 이기적 욕망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사회를 디자인하고 있다. 기존의 외국어 고등학교나 과학고는 물론이고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의 확대 실시는 무엇을 말하는가. 심지어 국제중학교의 신설은 평준화의 문제점을 보완하겠다는 선의를 말하기조차 부끄럽다. 3불 정책의 근간을 뒤흔들던 바람몰이가 조금 잠잠해진 듯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는 계속된다.

  쉰이 조금 넘은 나이에 자선사업에 올인하며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직을 은퇴하는 빌 게이츠, 전재산의 85%에 달하는 수선 수십조에 이르는 재산을 빌게이츠 재단에 기부하는 워렌 버핏을 우리는 길러낼 수 없는가. 상속세 감세안에 진심으로 반대하는 그들을 보며 최소한 그 정도 폼나는 부자를 우리 사회는 길러낼 수 없냐고 우리 교육에게 묻는다.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이준구는 왜 사회비평을 시작했을까? <쿠오 바디스 한국 경제>를 읽으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경제학자의 사회비평은 넓이과 깊이 면에서 색다르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다. 문장과 비유가 탁월한 설득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위치가 이미 하나의 메시지다. 그가 이명박 정부를 비판한다면 무언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쉽다. 그것이 바로 지식인의 책무이다. 사회적 발언이 가져올 파장과 의미를 고려하여 상식에 부합하고 미래를 위한 제언들이 필요하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다’는 프롤로그를 읽기 시작했다.

  흡인력 있는 문장도 아니고 기막힌 비유나 감각적인 표현도 없지만 이준구의 사회비평은 학자다운 면모를 고루 갖추고 있다. 우선 차분하고 냉정한 사유 방식이다. 흥분해서 외치는 비명은 옳은 말이라도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관련 분야의 정책이나 사회 현상을 설명할 때 상식을 넘지 않는 분석과 비판의 날을 세운다. 스스로는 과격하다고 표현했지만 난장에 가까운 싸움판에서 보자면 양반의 말투다. 깊은 학문적 토대나 이론적 잣대를 들이밀지 않아도 사람들은 상식을 이야기하면 쉽게 알아듣는다. 이준구의 한국 경제를 위한 제언들은 그래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운하로 촉발된 토목공화국 논란은 이미 우석훈에 의해서 신랄하게 비판 과정을 거쳤다. 좌우를 넘어 건강하고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고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필독서로 꼽아주고 싶다. 주택시장 문제와 종부세에 관한 오해와 진실은 슬픔에 가깝다. 언론이라고 볼 수도 없는 조중동의 거짓말과 위선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연민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진짜 ‘아마추어’ 정부의 모든 면을 보여주는 이명박 정부에는 영혼이 없다. 교육과 시장 모두 실패한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의 가혹함을 넘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암울해진다. 복지부동하고 정권의 눈치를 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서울대 교수들의 ‘민주주의 후퇴’ 시국선언 준비 뉴스는 우리 사회의 상식이 살아있음을 반증한다. 이 책을 통해 이준구 교수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거창한 경제 이론이나 국민들을 위한 학문의 대중화가 아니다. 건강한 상식을 가지고 보다 많은 국민들을 위한 사회로 나아가야 할 대한민국의 지표에 관한 이야기다. 도대체 한국 경제는 어디로 가고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 들어선 한국 경제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이자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미래 사회에 대한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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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서울 - 미래를 잃어버린 젊은 세대에게 건네는 스무살의 사회학
아마미야 카린, 우석훈 지음, 송태욱 옮김 / 꾸리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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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삶은 비루하다. 끝없는 욕망과 도덕의 싸움. 이드와 에고는 오늘도 전쟁중이다. 자신을 속이고 타인에게 속고 거짓 희망을 노래한다. 일요일 아침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과 어미의 마음과 한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보았다. 기억과 망각 시스템의 절묘한 조화가 없다면 인간은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다.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려거든 현재를 돌아보아야 한다. 과거 속에 현재가 있고 현재는 미래를 말해주는 법이니. 앞선 세대는 다음 세대의 거울이 되기도 하지만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같은 세대의 문화를 전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 경제적 여건이나 정치적 상황, 문화적 토대가 달라지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데 앞선 세대는 젊은 세대가 살아갈 세상의 미래를 만든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기성세대는 젊은 시대의 책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시장 우선주의, 경쟁과 효율의 제고를 우선적 가치로 내세운 한국 경제 혹은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결과는 젊은 세대에게 미래를 빼앗았다. 이탈리아의 ‘1000유로 세대’는 한국의 ‘88만원 세대’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한국의 ‘백수’는 일본의 ‘다메렌’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전 지구적 현상으로 확산되는 위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에게는 더 이상 미래가 없는 것일까?

  일본의 아마미야 카린이 한국을 찾았다. 그녀의 이력은 특이하다. 작가이자 에세이스트이며 <주간 금요일> 편집위원이고 ‘반反 빈곤네트워크’ 부대표이다. 일본에서 신사회 운동의 기수로 알려져 있으며 극우파 펑크록 밴드의 보컬에서 빈곤과 생존을 요구하는 젊은 세대 운동에 뛰어든 활동가가 되었다. 레즈비언, 자살, 대학입시 실패 등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좌절과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있으며 머리보다 가슴과 발로 현장을 찾아가고 실천적 운동가로 활약하는 그녀의 현재다.

  ‘88만원 세대’ 일본판의 추천사를 쓴 인연으로 두 사람은 시대를 함께 고민한다. 국경을 넘어 문제를 공유하고 카린이 한국을 방문하고 취재한 결과물이 <성난 서울>이라는 책으로 묶였다. 비정규직의 삶으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의 현재를 살펴보면 그들에게 ‘미래’는 없다.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구조적 모순 때문에 일자리가 없거나 비정규직으로 일해야 하는 상황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빈곤과 불안은 계속되고 그들의 삶은 고통스럽게 이어진다. 기성세대가 책임져야할 부분도 있고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할 부분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완고하다. 기득권은 강화되고 양극화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자본과 교육은 불공평한 경쟁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한 곳에 집중된다. 전체 사회로 볼 때 매우 심각하며 불행한 일이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없이 서로가 경쟁에 몰입하고 승자가 되기 위한 제로섬 게임은 지속된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러한 현상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가 더 심각한 문제이다.

  대한민국의 상황이나 일본의 90년대 장기 불황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카린은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래서 카린은 “만국의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precarious 프롤레타리아트)여, 공모하라!”고 외친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던 프로파간다의 패러디지만 역사는 순환하고 반복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상황이 달라졌고 계급을 가르는 기준이 조금 변했을 뿐이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고, 소유도 행복도 동일하다면 사람들은 그곳을 천국이나 유토피아라 부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다만 카린이나 우석훈의 비판과 고민은 불공정한 경쟁과 경쟁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서 비롯된다. 이대로 지속가능한 사회가 가능하지 않다는 위기의식이 우리에겐 없단 말인가.

  계급과 일치하지 않는 투표결과, 나는 비정규적이 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 빈곤과 차별에 대한 왜곡된 시선 등이 모여 한 사회를 이룬다. 우리는 그 사회에 살고 있으며 때때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여유가 없어지고 행복하지 않으며 웃음이 사라지고 비관적이고 우울한 날들이 계속될 것 같은 상황은 계속된다. ‘희망고문’에 속지 말아야한다. 기업 광고를 통해 대한민국을 믿는다고 외치는 그들은 대다수 서민들의 고통을 먹고산다.

  작은 당근과 커다란 채찍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무조건 열심히 노력하고 허리띠를 졸라맨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냉철한 상황판단 능력과 부정적 현실에 댛나 비판 능력이 필요하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방송과 언론의 내용은 모두 옳은 것인지, 그것들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의 위치에서 행동하고 반격을 시도해야 한다.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삶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수도를 <성난 서울>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적절한 비유다. 공교롭게도 제목처럼 달아오르고 있는 대한민국과 ‘성난 서울’의 미래는 대통령이나 위정자들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만들어가야 한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주위를 돌아보고 타인을 배려하고 여럿이 함께 걸어갈 준비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길 위에서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고 우리들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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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김희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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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삶은 계속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이 모여 한 생애를 이루고 그것들이 미래를 만들어 간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애매하게 행동한다. 산다는 것은 과정을 즐기는 일이라고 하지만 종교적 믿음이나 확고한 신념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한 경지이다.

  삶을 여행에 곧잘 비유한다. 마라톤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조금씩 나아간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시간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겸손해지고 죽음 앞에서 경건해지게 마련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뒤돌아 볼 때 미소 지으며 행복했노라고 그리고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혼자 있는 시간이면 가끔씩 명상에 잠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또 죽어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으며 어떤 길을 따라 걷고 있는지, 서로 다른 길을 걷다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로나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더욱 난감하기만 하다. 편견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길이 옳다고 주장한다. 중립이 있을 리 없건만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한쪽만 바라보며 격렬하게 증오한다. 삶이 길에는 정답이 없지만 모두 같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흔적들이 남아있고 그 발자국과 땀방울들은 우리에게 훌륭한 이정표가 된다. 먼저 간 사람들에게 배우고 익히지만 사람은 여전히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용서받고 또 상처를 주고받으며 함께 걸어간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는 쉽게 알지 못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어렴풋이, 조금씩 깨닫기 마련이다. 그래서 항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게 된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귀가를 전제로 한다. 여행은 분명한 출발과 도착이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물론 떠나기 전과 돌아온 후에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기대하기도 하고 여행 자체의 즐거움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렇게 유목과 정착을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여행은 어디로 떠나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결국 인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정의하는 사람이 있다.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관계 맺음의 연속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정해진 관계와 굳건한 틀 속에서 지내는 안정감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모든 사람이 거기에 만족하는 것도 아니다. 새로움과 낯설음에 대한 동경, 설레임과 기다림이 주는 두근거림은 여행을 떠나는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여행의 목적에 따라 장소와 방법과 일행이 결정되겠지만 그 모든 여행은 항상 떠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김희경의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은 낭만적이지도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 여행 이야기다. 저자는 프랑스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km를 걷는 순례코스를 걷는다. 카미노라고 불리우는 그 길은 한쪽 방향으로만 걷는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는 순례자 혹은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게 펼쳐진다.

  혼자서 먼 길을 여행하면서 저자가 만난 것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걷는 목적은 저마다 달랐겠지만 걸으면서 만난 것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자신을 풀어놓고 가슴속에 돌덩이 하나씩을 내려놓는다. 저자는 동생을 잃었다. 특별한 상황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떠난 혼자만의 여행이다. 카미노를 걷는 여정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선하기 보다는 그 길 자체가 가진 힘이 놀랍다. 종교적 믿음과 무관하게 걷는 무슬림도 있었고 일행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자처럼 혼자 걷는 사람도 물론 많았다. 그들은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과연 그 길에서 수많은 깨달음을 얻고 내면의 변화를 겪었을까.

  중요한 것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걷는 행위 자체가 여행이고 길이며 목적이다. 한 달이 넘도록 마냥 걸으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길가에 나무와 풀과 하늘과 바람이 저자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저자는 이 책에 다 적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직접 걸어보지 않는다면 그 말들을 어찌 전해들을 수 있을까. 여행에 관한 책이 가진 태생적인 한계이다. 가이드 북이나 참고 도서는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

  그래도 이 책의 저자는 담담하고 편안한 문장으로 여정과 감상을 상세하게 전달하고 있다. 세심하게 메모한 듯 만남과 이별, 대화 내용,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적절하게 삽입된 사진과 이정표가 여행의 기록으로 손색이 없다. 읽는 사람에게 그곳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면 성공한 책이 아닐까 싶다.

두려움(Fear)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의 약자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가짜 증거’ 때문에 마비된 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두려움이 진화 과정에서 인간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한 신호기제로 신경에 장착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의심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내 미천한 경험으론, 정말 두려운 일은 아무런 전조 없이 찾아왔다. 멀쩡하고 평온했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동생을 잃었던 경험이 그런 경우였다. - P. 251

  유사한 경험을 했던 내겐 그냥 흘려버릴 수 없는 문장이었다. 여행은 결국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은 아닐는지. 복병처럼 숨어있는 불행, 감당할 수 없는 공포, 체험을 통한 고통. 여행은 그 모든 것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누구나 여행을 떠나야 하는 건가. 책 몇 권 짊어지고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자유만 허락된다면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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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7
김두식 지음 / 창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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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직 대통령의 자살. TV를 보지 않는 내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에 장난질처럼 누군가의 문자로 전해졌다. 희망돼지 노무현의 파란만장한 삶과 정치 역정이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스쳤다. 가난했지만 그리웠던 고향땅, 권양숙 여사와 함께 자란 봉하 마을로 돌아왔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바위아래 낭떠러지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그렇게 전직 대통령을 보냈다.

  주말 아침에 대한민국은 쇼크를 받았다. 9.11 테러가 미국인에게 준 충격보다 훨씬 심각한 충격이었다. 할 말은 많지만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주고 그는 떠났다. 남겨진 사람들을 비웃듯 그렇게 자유를 찾아 허공에 몸을 던질 것일까? 이제 모든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우리의 삶은 어쨌든 계속될 테니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않았다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했던 수재가 현실을 극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판검사가 되는 것이다. 7개월만에 판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가 되었지만 노무현의 인생에서 사법시험은 인생역전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법패밀리의 일원이 되어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법은 새로운 인생을 주었으며 종국에는 생을 마감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의 책장을 덮은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살을 했다.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슬픔과 애통함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노무현이라는 자연인이 느껴야 했던 불만과 고통, 압박과 자괴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누구나 유사한 심리 상태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이고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과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신념이 무너진 후의 참담함이다.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아니 왜 견뎌내지 못했을까. 누구를 탓하기 앞서 인간적인 연민과 안타까움에 목이 멘다.

  대부분 사람들은 법과 무관하게 살지만 일평생 무관할 수는 없다. 어떤 형태로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법과 마주하게 된다. 반응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상처받고 좌절한다. 법앞에 만인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법은 그 적용에 있어 절대 평등하지 않다. 그것은 법을 지켜야 하는 국민들도 잘 알고 있고 법을 적용하는 법조인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아는 사람을 찾고 청탁을 한다. 그것이 말이든 돈이든 그 무엇이든.

  희망제작소의 ‘우리시대 희망찾기’ 연구 프로젝트의 하나로 발간된 이 책은 시의적절하다. 우리 사회의 희망을 찾기 위한 연구 프로젝트가 이렇게 시의성까지 출판된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법의 문제는 항상 초미의 관심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촛불 집회 당신 서울지방법원 법원장이었던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배당 문제와 이메일의 내용은 제5의 사법파동이라고까지 이야기될 정도로 전체 판사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더불어 언론플레이로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며 수위를 조절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태도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여론의 역풍을 맞고 있다.

  법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공평한 법 집행도 상상하기 어렵다. 왜 그런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정확한 상황을 설명해 주는 책이 바로 <불멸의 신성가족>이다. 김두식은 <헌법의 풍경>을 통해 널리 알려진 법조인이다. 거꾸로 이 책이 보고 싶어졌다. 스물 세 명의 인터뷰라는 질적 연구 방법을 통해 얻은 결과물인 이 책은 가장 적나라하게 대한민국의 법조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사건과 인터뷰 등 현재까지 진행됐던 재판이나 개인 사례들을 모아 분석해도 좋은 책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도 스스로 이류 법학자로 말하는 김두식의 이야기는 인터뷰이들의 내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나름의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현실을 보여주며 희망을 제시한다.

  판사, 검사, 변호사는 물론이고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여직원, 법원 공무원, 브로커, 기자, 경찰, 마담뚜까지 법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생생한 고발이며 고뇌에 찬 자기 성찰이고 대한민국 법조계에 대한 경고이고 비난이며 변명이고 자아반성이다. 생동감 넘치는 그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대한민국의 사법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일반인들이 법조인들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순전히 추체험에서 비롯되며 실제 자신의 경험이 바탕이 된다. 책의 제목이 된 ‘불멸의 신성 가족’들은 대한민국에서 ‘사법 패밀리’가 되어 살아간다. ‘우리가 남이가?’로 통용될 만한 그들의 문법과 규칙과 시스템이 있는 것이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이겠으나 저자는 그 안에서 ‘원만함’이 갖는 위험성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조직 문화를 형성하고 그 파장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가에 대해 실증적인 사례와 인터뷰를 통해 면밀히 분석하고 있다. 돈과 청탁, 평판을 둘러싼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살펴보고 신성가족의 제사장으로 불리는 ‘브로커’에 대해 이야기한다.

  법조인이 이겨내야 하는 여덟 가지 유혹과 그 대안이 이 책이 핵심이 될 것이다. 새로운 언어, 결혼시장, 서열경쟁과 관료제, 판사양성 시스템, ‘원만함’의 한계와 권위주의, 변호사 개업, 법조기자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조직적이고 기민하게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실로 통탄할 일이지만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궁색하지만 저자는 ‘시민이 희망이다’는 한 마디로 억지로 희망을 찾는다. 내부적 시스템의 변화와 사법 개혁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법조인 출신인 저자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이쯤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로 상징되는, 대통령도 끝내 이루지 못한 사법 개혁은 ‘불멸의 신성가족’에겐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래, 시민만이 희망이다. 더디고 고통스럽더라도 나를 믿고 우리의 힘을 믿을 수밖에. 역사는 그렇게 발전할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변호사 출신의 전직 대통령도 자살하게 만드는 ‘사법 패밀리’의 힘이 가히 두렵지 않은가? 이 책은 모든 국민들이 읽어둘 필요가 있는 책이다.


090524-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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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의 경제학
폴 크루그먼 지음, 안진환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이 경제의 중심이 된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는 명성만으로도 최근 각광받는 폴 크루그먼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 학자는 앞으로 불황이 L자형으로 4~5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 놓았다. 그의 전망이 적중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이 지속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그간 그가 보여준 냉정한 판단과 분석 그리고 정확한 미래 예측 때문이다.

  급변하는 경제 환경이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원숭이와 펀드매니저의 수익률 분석처럼 아무리 정교한 이론으로도 예측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 세계 경제의 흐름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지만 그것을 읽어내는 눈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렵다. 폴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은 그 눈을 대신 할 수 있는 좋은 안내서이다.

  이 책은 현상을 표현하는데 치중하지 않고 그 현상의 분석을 위한 책이다. 분석은 대안을 위해 필요하다. 책머리에 밝히고 있듯이 지금까지 벌어졌던 위기들은 왜 벌어졌는지, 피해를 입은 나라들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지 않지 위해서는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례연구의 이론을 개발하는 것, 다시 말해 이 문제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분석을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과정을 설명해야 하고 현상을 보여줘야 한다. 책을 쓰는 목적이 뚜렷하고 방법도 명확하다. 내용은 차치하고도 글쓰기의 방법에 있어서도 배울 점이 많은 책이다.

소위 전문가들이 심각한 주제는 반드시 심각하게 접근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다. 어려운 이야기일수록 이에 걸맞은 어려운 언어로 표현해야 하며, 가벼운 말이나 쉬운 설명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새롭고 생소한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들을 ‘갖고 놀’(play)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내가 ‘갖고 논다’는 표현을 쓴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경제학이든 다른 분야에서든 별난 기질이 없는 엄숙한 사람이 신선한 통찰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 P. 15

  누구나(?) 한 번 쯤은 고민해 보았을 문제다. 폴 크루그먼은 어쩌면 천재가 아니라 즐기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천재는 즐기는 사람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물리학자였던 리처드 파인만처럼 저자는 어려운 경제문제를 알기 쉽게 분석하고 그 분석을 통해 자연스럽게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경제의 핵심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정치와 경제는 복잡해지고 예측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이 정치로부터 분리된 후 오히려 정치를 이끌고 있다. 항상 문제의 핵심에는 ‘경제’가 놓여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경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구소련의 붕괴는 단순한 정치 체제의 붕괴나 한 국가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될 구소련의 붕괴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승리한 자본주의가 완벽한 제도이거나 훌륭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경제 시스템을 붕괴시킨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내의 산적한 문제는 1930년의 대공황을 포함해서 라틴 아메리카의 위기, 일본의 장기 침체, 아시아의 IMF 구제금융으로 이어지면서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저자는 부적절한 정책과 헤지펀드의 실체를 파헤치며 이러한 결과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 향후 대책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 미국, 아니 세계의 경제 대통령으로 일컫던 그린스펀을 거품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근거는 경제에 관한 역사적 관점에서 가장 정확하고 타당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림자 금융, 공포의 총합에서 보여주는 비판적 관점은 지나온 과거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며 날카로운 지적이다. 돌아온 ‘불황 경제학’을 설파하는 저자가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부정적 전망을 내놓았다면 미네르바처럼 허위사실 유포로 구속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최근 개성공단을 놓고 이명박과 김대중, 박지원과 정몽준이 보여주는 관점의 차이는 옳고 그름을 떠나 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 관점의 차이이다. 경제대통령을 표방하고 나선 대통령의 이념과 태도는 훨씬 급진적이다. 그간의 상식과 합리를 뒤엎는 발언들과 가진자들을 위해 노동자들을 법으로 다스리겠다는 발상을 어떻게 보아 넘겨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문제는 경제가 되겠지만 정치와 뗄 수 없는 관계인만큼 불황의 경제학을 정치로 풀어내야한다는 압박은 당연하다. 불황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자세와 태도는 중요하지 않다. 시스템의 문제이며 금융 정책과 제도의 문제이고 정책의 문제로 귀결된다. 개인은 방관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장이 경제를 주도하고 개인의 경제적 활동과 행동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게 아니라 개인은 전체 시스템의 구성원일 뿐이다.

  우리가 맞고 있는 ‘불황의 경제’ 시대에는 공급이 아닌 수요중심 경제학이 전개된다. 그 분석과 대안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 맞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의 경제학자가 던지는 한국 경제의 화두는 성장과 분배의 문제가 아니라 불황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를 외치며 부시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빌 클린턴이 있지만 이명박도 오바마도 비슷한 말을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경제를 대하는 방식도 해법도 각기 다를 것이다.

  손 놓고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겠지만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같지도 않은 말을 주워섬길 수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문제는 경제지만 그것을 어떻게 풀어 낼 것인가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다. 우리는 폴 크루그먼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누구의 의견이든 상관없지만 우리의 방향과 태도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09052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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