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구광렬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대가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폴 발레리의 말은 단순한 금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한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 신념과 용기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며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념은 때때로 흔들리고 용기는 경우에 따라 만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인간의 이기적 속성과 사회적 관계는 한 사람이 살아가는 태도를 결정한다. 또한 뚜렷한 목표가 정해지면 과정과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당당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아가는가. 그렇게 살았다고 자부하더라도 세간의 평가는 달라지게 마련이고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사르트르가 ‘20세기의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평가했던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삶은 평범에서 한참 거리가 멀다. 그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과 열광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상업적 목적으로 그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고 혁명의 코드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아닐까 싶다. 왜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성공한 쿠바 혁명의 열매를 포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에 이어 확고부동한 2인자였던 그가 혁명의 축제도 끝나기 전에 또다시 콩고로 떠난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순수한 혁명 정신을 잃지 않고 콩고로 떠나는 체 게바라의 모습은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모습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이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는 순결한 인간이 바로 체가 아닐까 싶다.

  그는 독서광으로 유명하다. 전쟁터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항상 책 속에서 꿈을 꾸었던 몽상가는 아니었을까? 무모한 도전을 통해 민중의 해방을 꿈꾸었던 그는 이 시대 마지막 순결한 혁명가다.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은 총이 아니라 펜을 든 혁명가의 모습을 조망한다.

  1967년 10월 9일 죽음을 맞이할 때 마지막 유품이었던 그의 배낭 속엔 색연필로 덧칠된 지도 한 장과 두 권의 비망록 그리고 녹색 스프링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체 게바라의 일기>로 출판된 두 권의 비망록과 달리 녹색 노트에 필사된 69편의 시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멕시코 국립대학에서 중남미문학을 전공한 뒤 현지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구광렬은 바로 이 노트에 주목한다.

  체에 대한 평전들과 달리 최후 3년간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이 책은 오로지 녹색노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뻬 등 네 명의 시인이 쓴 시들이 필사된 노트는 혁명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고뇌했던 체의 마지막 모습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는 체와 이 시인들의 관계를 살핀다. 개인적인 친분과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한 시인들의 시는 단순히 애송시에 대한 체의 관심이 아니라 그의 영혼과 신념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배낭 속에 지니고 있던 이 노트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아프리카 시절(1965년 3월~1966년 3월), 쿠바 시절(1966년 4월~1966년 10월), 볼리비아 시절(1966년 11월~1967년 10월 초) 등 시간과 장소의 관계를 유추해 낼 수 있는 입체적 구성이다. 필사된 순서나 시인들의 특성을 통해 체의 사상을 연구한다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 영향을 미친 혹은 그의 신념을 다지게 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체가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그는 말년에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길을 찾고 책을 통해 세상을 인식했을 지도 모르는 혁명가의 생애는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아니다. 현실 속에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생활 속에서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길잡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민중들의 삶의 조건은 상황만 달라졌을 뿐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우매함은 오늘도 반복된다. 영원할 것이라 믿는 권력과 욕망의 노예들은 끝없이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실현은 멀기만 하다. 지구의 반대편 라틴 아메리카에서 벌어졌던 혁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체제를 전복하고 세상을 갈아엎자는 폭력과 혼란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소박한 희망은 혁명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은 책을 읽는 내내 한숨과 눈물처럼 부딪혔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체의 홀쭉한 배낭을 상상하는 일은 즐거운 일도 편안한 일도 아니었다. 안타까움을 넘어선 경외와 두려움이었다. 안개처럼 뿌연 창밖으로 펼쳐진 한 여름의 들판에도 선명한 길은 보이지 않는다. 없는 길을 걸었던 체의 발걸음과 힘겨웠을 그의 마지막 뒷모습이 환영처럼 잠시 눈앞을 스쳤다.


090720-0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