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 상처에서 치유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24가지 이야기
김준기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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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은 아주 천천히 형성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 페이스 볼드윈(P. 27)

  처용은 아내를 범한 역신을 용서한다. 이미 빼앗긴 것을 어쩌냐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체념과 관용으로 당황스런 상황에 대처한 처용과 그 아내의 후일담이 궁금하다. 살아가면서 예기치 않은 일들을 만날 때마다 사람들은 인생 매뉴얼을 뒤적거려 보지만 대략 난감일 뿐이다. 정해진 답도 없고 뚜렷한 해결책도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문학사에 등장하는 처용을 통해 생의 불가해함을 논하는 것은 가벼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각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길동,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던 임꺽정, 어머니의 부재와 눈먼 아버지 사이에서 목숨을 건 효성을 발휘하는 심청 등 비정상적인 판단력과 정신적 상처를 가진 몇몇 주인공들만 살펴보아도 그들의 고통이 만만치 않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고통과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고 심각성이나 깊이에 대해 주목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현실에서는 어떠할까. 몸에 난 상처는 금방 알지만 영혼이 아픈 것은 알기 어렵다. 아니, 정상에서 벗어난 것인지 성격인지 알 수 없고, 원인이 무엇인지도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직도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다.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는 1980년에야 미국 정신과 학회에서 질병으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이제 불과 30년 전에 ‘일반적인 인간 경험의 범주를 넘어서는’ 충격적인 외상 사건을 경험한 후 그 후유증으로 발생하는 장애를 말하는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적응 능력을 압도하는 특별한 사건’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강렬한 두려움과 무력감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는 외상 사건은 대개 폭력성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을 잃게 되는 상실감이 트라우마와 연관되는 경우도 많다.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은 ‘트라우마’와 영화의 만남을 주제로 하고 있다. 종합예술인 영화는 인간의 희노애락, 복잡한 사회현상, 역사의 재해석 등 무한한 상상력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장르가 되었다.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어떤 주제를 이끌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학이든 과학이든 철학이든 영화의 이면에는 다양한 삶과 학문이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 책은 영화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찾아낸다. 너무 많아 선별적으로 다루어야 할만큼 흔한 인물유형일 수도 있겠으나 ‘트라우마’라는 정신적 질병에 초점을 맞춘다면 범위가 좁혀지겠다. 영화를 통해 바라본 트라우마라고 하면 이 책에 대한 성격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 될 것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교육을 받고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문화를 습득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형성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변화할 수는 있지만 가족과 친구 그리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통해 형성된 정서와 인간에 대한 믿음은 제각기 달라질 수 있다. 성장과정과 사회적 환경, 개인적 체험과 특별한 경험에 따라 현재의 모습이 결정될 수 있다. 현재는 과거의 오래된 미래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한지도 모른다. 육체적 상처를 넘어 정신적 상처까지 돌볼 겨를이 없었을까? 정신분석학의 토대를 마련한 프로이드 이후에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대해 그리 깊고 넓게 알지 못한 것 같다. 최근에 와서야 인간의 영혼에 대해, 육체가 아닌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치유 가능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우선 단순한 정신적 고통, 스트레스와 질병 수준으로 다루어야 할 수준 사이에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것부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질병의 원인과 치료 방법이 병원에서만 다루어질 필요는 없다. 자신이 겪는 고통과 증상에 대해 스스로 진단해 보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 책은 24편의 영화를 통해 각기 다른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고 주변 사람을 생각하며 우리 사회를 반성하게 되었다.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 책은 질병으로서 ‘트라우마’의 원인과 증상 그리고 그 치유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중간에 ‘트라우마 공화국, 대한민국’이 주목할 만했다. 작은 하나의 파트로 끝났지만 사실 사회적 문제는 영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조망해볼 수 있는 문제다.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의 증상과 분석 그리고 치료에 대해서 또 하나의 책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 그만큼 심각하면서도 재미있는 주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인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대사, 행동, 증상들을 통해 ‘트라우마’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어 읽는 사람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각 장 뒤에 부록처럼 붙어 있는 의학적 지식과 소견은 정보 제공을 하면서 다른 영화에 적용해 볼 수 있는 가능성까지 열어두어 재미있게 읽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장소에서도 사람들은 제각기 반응하고 상처받고 표현한다. 그것의 원인이 무엇이든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만큼 심각하고 깊은 상처가 남았다면 불행한 사람이다. 환자가 되어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수없이 반복되는 일이지만 스스로 그 원인과 치료까지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긍정적인 경험과 긍정적인 사고, 네 잘못이 아니라는 외침, 가족 간의 소통, 친밀한 관계 속의 교감, 진정한 고백 등 영화의 장면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개연서 있는 허구라는 점에서 이 책은 영화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듯 느낌을 받으며 읽을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마도 없어 보인다. 지나친 해석일 수 있지만 잠재적 환자들이 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심각한 수준에 이른 개인적 불행과 사회적 현상에 따른 구조적 모순들은 점점 더 불행의 일반화에 기여하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영화들을 한 편씩 보면서 그들과 동일시한 감정을 느끼거나 공감과 동정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아주 작은 평안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090723-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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