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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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몇 장면. 서울역 앞에 전경 버스가 불타고 서울 시내는 온통 태극기와 손수건의 물결로 뒤덮였다. 광화문 근처의 빌딩이나 건물마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까지 거리마다 넘쳐났다. 버스 뒷좌석에 앉아 창밖의 비현실적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열정을 보았다. 대학생들의 외침도 토할 것 같은 최루탄도 사라졌지만 그때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았고 내 의식을 규정하는 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낯선 풍경은 버스가 마포대교를 넘어 자주 거닐던 한강 둔치를 지날 무렵 테니스장의 한가로운 사람들이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하던 아저씨들의 여유 또한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 때의 일을 쓴 ‘제 8요일의 일기’라는 글이 영등포 여고 교지에 실렸었다. 책장 한 구석에 먼지 묻고 빛바랜 교지 한 권이 그 때를 기억하며 꽂혀있다.

  학교에는 좋은 선생님들 계셨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존경하지는 않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페퍼포그나 지랄탄의 위력을 알아갈 무렵 87년을 이해하게 되었고 박종철이나 이한열의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게 되었다. 벌써 10년도 훌쩍 넘은 이야기니 6월 민주항쟁이나 6.29선언은 사람들의 먼 기억 속에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2009년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왜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십시일반>이나 <사이시옷>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즐겨 권하는 만화책이다. 창비에서 새로나온 <100℃>는 6월 민주항쟁의 뜨거운 기억을 만화로 엮었다. 평소 만화를 잘 보지 않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널리 알려진 만화도 잘 모른다. 하지만 만화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서는 공감과 응원을 보낸다. 이 만화책을 보면서 몇 번 울컥했고, 몇 번쯤 아련했으며, 몇 번은 한숨을 쉬었다.

  프롤로그로 시작되는 반공소년의 모습은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다. 웅변대회의 주제는 공산당을 때려잡고, 북괴를 무찌르자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는 북한도 아니고 북한 괴뢰군의 준말로 지칭했다. 경제적, 군사적 차이를 통해 체제 우월성이 판가름 난 이후에도 우리는 6.25의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직도 그 상처와 후유증은 서로의 생채기를 후벼파며 대립과 갈등을 조장한다. 그래서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과 모순의 일부는 아주 오래된 과거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치유되지 않고 극복하지 못한 일들은 해결이 아닌 외면으로 일관되어 왔다. 앞으로도 그것이 지속 가능한 사회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시골에서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올라온 대학생들의 내적 갈등, 애타는 부모의 심정은 이제 책 속에서나 만나게 되었다. 이념을 넘어 실용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취업과 생존 경쟁에 내몰려 있는 88만원 세대를 양산하고 있다. 이대로 좋은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사회적 모순을 깨닫고 지는 싸움이지만 도전하던 청년 정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이 더 중요한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공감하던 시대는 다시 올 것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지금은 99℃라고 생각하며 늘 100℃를 향해 조금만 더 실천하고 연대하고 배려할 수 있다면 좋겠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투표가 아니라 우리들의 생각과 실천에서 출발한다.

부록으로 실린 시민교육센터(http://www.civiledu.org)에서 강사로 활동중인 이한 선생님의 <청소년을 위한 민주주의 강의교안>을 바탕으로 각색하고 재구성한 ‘그래서 어쩌자고?’는 부록 이상의 의미를 전해준다.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것은 스스로 찾아서 배워야 한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 하는 이유는 상급학교 진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준비해야 하는 미래는 공부하는 사람들의 것이 된다.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수학 문제를 푸는 공부가 아니라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들의 권리와 다수결의 모순은 어떻게 극복되어야 하는가.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만화로 된 이 책은 만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87년 6월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며 항쟁의 중심에 서 있는 세대에게는 새로운 힘과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3%의 소금이 바다를 썩지 않게 한다. 전 국민이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저자의 말대로 옳다고 말할 순 없지만 더 마음에 드는 무언가가 소수가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증명될 수 없는 취향의 문제지만 가치란 매우 소중하다. 그것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가치인가에 따라서 말이다.

가치란 것은 증명될 수 없고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서, “내가 옳다고 말할 순 없지만 난 이게 더 마음에 들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상대주의적 태도밖에 취할 수가 없다면 민주주의란 그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의 엉거주춤한 동거를 견디며 끝없이 제 편을 늘려가는 머릿수 싸움의 반복일 수밖에 없다. - P. 210 ‘작가의 말’ 중에서


090616-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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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6
돌프 페르로엔 지음, 이옥용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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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정무역 커피 ‘안데스의 선물’을 마시기까지 과정을 생각해 본다. 남미의 커피 농장에서 땀 흘려 일한 노동자들에게 조금 더 보답할 수 있다는 말을 믿을 뿐이다. 커피의 진한 맛과 향을 음미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또한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자본의 횡포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에 무감각하게 지내기도 어렵다. 공정무역 커피 몇 잔을 마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생각하고 행동하는 작은 실천들이 모여, 배려하고 연대하는 움직임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200여 년 전 노예들의 생활이나 커피 농장의 생산 방식을 알게 되면 커피라는 음료수를 마시기 어렵다. 다국적 기업 나이키 등 스포츠 브랜드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아동들의 노동력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200여 년 전 커피농장의 농장주와 다를 바 없다. 그들에게 작은 기회와 임금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그것조차 막는다면 그들의 생계는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엎드려 침묵하는 것은 악의 편이라는 말은 옳다.

  <200년 전 악녀 일기가 발견되다>는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다. 형식과 내용이 쉽고 간단하지만 내용은 무겁고 진지하다. 열 네 살 소녀 ‘마리아’의 생일에 아버지는 쟁반에 ‘꼬꼬’라는 흑인노예를 선물한다. 200여 년 전 네덜란드의 식민지 수리남의 커피농장 주인의 외동딸 마리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직 가슴이 봉긋 올라오지 않아 걱정이고 이웃집 오빠 루카스를 좋아하는 소녀의 눈에 비친 노예의 모습은 일상 속에 마주하는 ‘악의 평범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마리아에게 인종차별이나 계급의 문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일상이 된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선택했다. 인권이나 인종차별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소설이나 이론서적은 감동의 깊이가 조금 다르다. 같은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태도도 달라진다. 더구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그 형식과 내용을 조금 더 신경쓰고 내용의 깊이를 잘 조절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케익을 핥아먹는 꼬꼬는 누구인가?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힘이 세다고 해서, 돈이 많다고 해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은 그대로 자신의 가치관이 된다. 사물과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틀은 자연스럽게 형성되며 반성하지 않은 한 그것이 옳다고 굳게 믿는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마리아라는 소녀의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소설은 짧은 분량, 쉽고 단순한 문장, 일상적인 표현으로 누구나 읽고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 어린이, 청소년, 성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한번쯤 조금만 시간을 내면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감동과 여운은 오래간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실제로 가르치고 익혀야 하는 것들이 영어단어와 수학공식에만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밖에 것들에 대해서는 매우 소홀하다. 우리가 가르치지 않는 동안 아이들은 무관심해지고 마리아처럼 어느 순간 그 방식에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고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으며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아이들은 사회시간에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고 익히게 될까? 그것이 내면화되고 일상생활에서 피부색이 다르거나 장애를 가졌거나 직업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게 되는 것은 시간이 가르쳐줄까?

  악녀일기라고 명명된 이 책은 어쩌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편견과 선입견들에 대한 부끄러운 반성문일지도 모른다.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 장애인, 성적소수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마리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200여 년 전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치부하고 아주 먼 역사속의 에피소드라고 하기엔 이 책의 주제가 너무 무겁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무지는 용서될 수 없는 죄악일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불평등의 역사 속에 놓여있다. 아이들에게 그것을 깨우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인권이나 사회적 평등, 노동자의 권리, 나눔과 배려, 평화와 행복에 대해 고민하도록 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가르쳐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소설은 절대로 필요하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박사는 추천사를 통해 “악녀일기는 노예주의 폭력과 위선, 광기에 대한 해맑은 고백이자 어른들 마음 속 인종주의의 추악함의 천진난만한 외양”이라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체 일부를 사고 팔고, 피부색이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등 노예제와 인종주의의 온갖 변형들이 우리 옆에 있다.”고 말한다. 짤막한 소설 한 권을 통해 너무 무겁고 진지한 태도로 교훈을 주려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200년 쯤 후에 누군가 이 시대를 기록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소설을 쓴다면 어떤 악녀가 등장할까? 과연 우리는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것을 알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현재의 과거의 거울이며 미래의 토대가 된다. 오래된 미래는 지금-여기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09061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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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를 잡는 아버지 창비청소년문학 18
현덕 지음, 원종찬 엮음 / 창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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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생이나 이오덕 선생님을 진짜 선생님이라고 상찬하는 이유는 뜻과 삶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선생님들이다. 잘 가르치는 교사는 많지만 훌륭한 선생님은 많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 스승을 만나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이 선생님과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참 스승은 만들어진다. 모든 학생에게 좋은 선생님은 없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듯이. 그래서 사제지간도 결국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부모와 친구다. 그 다음이 선생님이 아닐까? 보고 듣는 대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사회화 과정은 가정에서 끝난다. 2차적인 사회화가 친구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양보와 배려를 배우고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기도 하며 세상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기도 한다. 학교에서 만나는 교사는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교무실에 놀러오는 학생들이 있고 친구처럼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여전히 지적 토대를 형성하는 기초 과정에는 선생님의 역할이 중요하다.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배우고 개인과 사회를 경험하며 간접 체험을 통해 세상을 알아간다.

  다매체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소설의 의미는 예전에 전래동화와 많이 다르다. 세계 형성의 기초 역할을 했던 이야기가 이제는 지루하고 따분한 충고에 불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재미있는 책 한 권이 가치관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특별한 경험으로 추억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풍부한 정보와 자료가 제공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이야기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독서를 통해 형성된 세계와 상상력의 공간은 어떤 매체보다도 중요하다.

  1909년에 태어나 1950년에 작고한 월북 작가 현덕의 이야기는 특별한 맛과 즐거움을 지닌다. 1930~40년대가 주로 소설 창작의 시대적 배경이 되기 때문에 시대의 기록물로도 손색이 없다. 이번에 창비에서 발간된 소설집 <나비를 잡는 아버지>는 현덕 소설집은 특별한 청소년문학 시리즈의 하나가 되었다.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작가의 작품들이나 외국작가의 작품들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 책은 시원한 샘물처럼 맑고 깨끗하다.

  유아, 아동, 청소년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출판시장에서 중학생에게 적당하게 읽힐 만한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현장의 목소리들이 많다. 지적 발달 수준이 다르고 배경 지식에 따라 독서 수준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에게 적합한 책이 나오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사춘기를 전후한 질풍노도의 시기에 알맞은 책들이 많지 않다. 일명 성장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청소년 문학이 존재하지만 현덕의 소설처럼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막 입학한 남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이 책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단편소설들을 묶어 놓았다. 소설의 배경이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대다.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친구 이야기는 지금 아이들이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하다. 소년들 사이의 우정, 가난한 농촌 현실 등이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는 ‘나비를 잡는 아버지’, ‘군밤장수’, ‘고구마’, ‘월사금과 스케이트’, ‘집을 나간 소년’, ‘모자’ 등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70~80대가 되신 분들이 읽는다면 아련한 향수에 젖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의 결들이 잘 묘사되어 있고 현실감 있는 이야기들이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어 재미있다.

  지금 사용하지 않는 어휘들이 그대로 살아있어 가독성을 떨어뜨리지만 당시의 풍속이나 색다른 문체를 통해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현실감은 더해진다. 어휘 문제는 아래에 주석을 달아놓아 해결했기 때문에 의미를 몰라 책을 읽기 어렵지는 않다. 아이들의 심리와 실제 상황을 재현한 듯한 묘사가 두드러져 재미뿐만 아니라 엮은이 원종찬의 구분처럼 소년소설의 참맛이 우러난다.

  2부 남생이는 연작 소설의 형태로 이어진다. ‘경칩’과 ‘남생이’는 당대 농촌 현실을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소작농의 애환과 서민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읽어내는 일은 마음이 심란스럽다. 21세기에도 부재지주의 형태로 남아 있는 토지 문제는 사회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토지 경작의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이웃 혹은 친구 사이의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다. 현덕 소설의 정수를 보여준다. 마지막 ‘두꺼비가 먹은 돈’은 평화로운 농촌 풍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어린 아이의 마음을 따라 가며 순수한 웃음을 만들어준다.

  현덕은 동화, 소년소설,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다. 어느 한 부분도 격이 떨어지거나 수준미달의 작품이 없어 보인다. 카프(KAPF) 해체 이후 등단해서 직접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리얼리즘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문학에 뜻을 둔 후 김유정과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서로의 소설에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작품 세계나 다양한 작품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일보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현덕의 작품을 읽고 그의 소설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들의 현실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이 신선하고 특별한 소설들은 아이들에게는 물론 어른들에게도 색다른 재미와 애틋함을 전해 준다.


09061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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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 시인선 352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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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력 있고 살아 숨 쉬는 문장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태어나는 것일까. 글을 쓰는 행위는 어느 정도 노력과 훈련에 의해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시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생각 또한 그러하다. 어지간한 시인은 부단한 노력과 다듬기로 만들어지겠지만 감탄을 자아내는 시 한 편을 쓰기 어렵다. 두보와 이백처럼 스타일이 전혀 다르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근원적 언어의 한계를 절감할 때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인식의 힘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 -니체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정현종의 시 ‘섬’과 최승호의 시 ‘인식의 힘’을 보는 순간 느꼈던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언어를 부려 쓰는 사람의 능력은 무한하지만 그것을 적절한 상상력과 창조적 표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상상력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힘을 갖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잠 못 이루던 밤이 있었다. 무엇이든 지나친 욕망은 사람을 지치고 병들게 한다.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언어의 힘에 압도 되었던 시절을 아름답다고 말하려는 치졸한 욕망 또한 부끄럽기도 하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말이 있다. 천사의 옷은 꿰맨 흔적이 없다는 뜻으로, 일부러 꾸민 데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서 완전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것이 문자에 사용된다면 최고의 찬사가 된다. 오래전 백발이 되어버린 황동규나 정현종의 시를 보며 떠 오른 말이다. 오규원의 마지막 시집 <두두>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단순히 나이 탓만은 아니겠지만 나이와 무관하지도 않은 듯하다.

꽃 시간 1

시간의 물결을 보아라.
아침이다.
내일 아침이다.
오늘 밤에
내일 아침을 마중 나가는
나의 물결은
푸르기도 하여, 오
그 파동으로
모든 날빛을 물들이니
마음이여
동토는 그곳이여.


  힘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써지는 득도의 경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자연스런 시간의 물결이 보이지 않으면 정현종의 <광휘의 속삭임>은 밋밋하다.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평론가의 눈이 아닌 독자의 판단에 맡겨져야 한다. 단순하지만 긴장이 있고 편안하지만 허술하지 않다.

  광휘(光輝)는 환하고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이다. 표제작 ‘광휘의 속삭임’은 이 시집의 특징을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는 말이다. 눈부시지만 화려하지 않고 어렵고 난해하지도 않다. 주장을 내세우지도 웅변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노인의 목소리처럼 정갈하고 부드럽다.

맑은 날

날빛이 밝고 맑아
이마가 구름에 닿는다

바람결은 온몸에
무한을 살랑댄다

기쁨은 공기 중에
희망은 날빛 속에


  구름이 두어 점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는 날이어도 좋고 그저 푸르게 푸르게 청정한 날이어도 좋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맑고 깨끗한 생각들로 가득 찰 수 있다면 말이다. 짧고 간명한 표현과 여운이 남는 어떤 상태를 지향하는 듯하다. 우리의 삶이 구차할지라도 결국 공기와 빛으로 스러질 운명이라면 맑은 날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쁜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순간들이 어느 한 점에 모아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정지하는 그 순간이 느껴진다. 찰나의 아름다움이 곧 영원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지금 이 모든 순간이 점묘법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이내 바쁜 듯이 그렇게 부대낀다.

바쁜 듯이

1

정말 바쁘지는 말고
바쁜 듯이.
그것도 스스로에게만
바쁜 듯이.

2

한가한 시간이 드디어
노다지가 될 때까지 느긋하게
느긋하게 바쁜 듯이.


  그리하여 매일 아침 ‘운명 같은 건 없다’고 외쳐본다. 저녁도 밤도 아닌 아침에 운명을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은 하루가 너무 길고 햇살이 눈부셔 오로지 우리에게 희망만을 이야기한다. 알 수 없는 미래지만 무엇이든 꿈꿀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아침 이미지를 ‘운명’에 맞춰 우리 삶의 탄생과 죽음으로 치환하고 있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저 그런 생각들과 특별하지 않은 시선들이 모여 한 편의 시를 이루었지만 ‘직관’과 만난다. 낯설고 신선하지 않은 정현종의 시가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패기와 도전이 아니라 통찰과 무위다. 억지스럽지 않으면서 밋밋하지 않은 것은 언어의 긴장과 도약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는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여자를 잘 안다고 말하는 시인의 의뭉스러움은 여자 그 자체에 있지 않다. 여성성은 자연과 닿아있고 부드러움과 따스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우리들 삶의 원형이며 죽음의 종착역이라는 깨달음! 그래서 우리는 여자를 잘 알아야 한다. 비약하자면 삶이란 여자를, 여성성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여자

나는 여자를 잘 안다.
즉 여성성이 뜻하는 걸 잘 안다.
여자는 자연이다.

우리의 자연,
잃어버렸다는 낙원의 현현을
반짝이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이전
문명 이전
나 이전
너 이전

원초
또는
앙드레 브르통과 더불어
“모음들로 넘쳐흐르는 화관(花冠).”


  한국어의 모음들이 화음을 이룬 듯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정현종의 시집은 비오는 저녁이나 햇살이 눈부신 휴일 아침에나 펼쳐들 수 있을 것 같다. 고요를 듣고 내 삶의 자취를 잠깐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어울린다. 때때로 시를 통해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작은 축복이다.


090608-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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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 - 스스로 행복해지는 심리 치유 에세이
플로렌스 포크 지음, 최정인 옮김 / 푸른숲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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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유는 두려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모든 여성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자유에는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집단 무의식 속에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고, 두려움의 주술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파고들어와 있기 때문이고, 또 그러한 두려움은 우리 대부분이 구체적으로 느끼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 P. 289

  남성과 여성은 단순한 성별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성 역할의 차이는 내면화되고 길들여지는 문화적 관습을 통해 완성된다.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차별로 계급적 차이가 발생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처럼 여전히 여성은 사회적 약자에 해당된다. 결국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목적지향적인 화성에서 온 남자와 관계지향적인 금성에서 온 여자가 만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책 중의 절반은 아마도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이야기들일 것이다. 그것이 문학이든 철학이든 역사든 말이다. 유전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들을 다루었던 진화생물학의 역저,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털 없는 원숭이>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쩔 수 없이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여성과 남성의 본성은 사회적 관계와 둘 사이의 양상을 전혀 다른 형태로 이끌어간다. 지구상의 인구 수 만큼 다양한 형태로 관계가 만들어지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일반화시킬 수 있는 패턴이 존재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조금 더 의존적이라는 한 가지 사실은 엄청난 차이를 초래한다.

  플로렌스 포크의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는 심리 치유 에세이다. 20여 년간 심리치료를 통해 얻은 경험을 편안하고 침착하게 풀어 놓은 책이다. 저자 스스로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혼자’에 관한 이야기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알기 쉽고 현실감 있게 쓴 책이다. 이 책의 주제는 물론 철저하게 ‘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남성과 다른 여성의 가장 큰 차이점은 ‘혼자’라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들이 혼자 있는 것을 즐긴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여성에 비해 독립적이고 목표 지향적이며 심리적으로 과감하고 결단성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대체적인 차이지만 실제 남녀 간의 관계에서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 진화생물학적 차이일 수도 있고 사회적 성 역할이 내면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차이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은 경제력의 차이에서 온다. 얼마 전 발표된 2008년 3월, 남성 정규직과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 비율은 100대 39.1이다.

  여자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은 자조나 푸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남성 혼자 사는 경우도 있지만 그 비율이 극히 드물고 경제력이나 제반 조건을 고려할 때 여성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시대가 변했고 사람들의 의식도 달라졌다. 이제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는 여자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남성의 태생적 권력과 역할은 줄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술관에는 왜 혼자인 여자가 많을까?

  혼자라는 건 삶의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독신이든 이혼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혼자 산다는 건 일반적인 것에서 벗어나 있는 혹은 정상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스스로 선택한 삶의 형태를 사람들은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식을 한 번에 바꾸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사람들보다 먼저 생각을 바꾸어야하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선택이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든 다양한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일까?

  저자의 말대로 자유에는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여성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고 두려움을 극복할 자신감과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 혼자라는 사실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을 이겨내고 스스로 ‘혼자’라는 사실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고 ‘고독’을 즐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별이나 이혼이 주는 ‘상실’을 이겨내야 한다. 프로이드의 말처럼 죽음만큼 커다란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가족과 친구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아Mournig and Melancholia>라는 책에서 “대부분 상실에는 죽음뿐만 아니라 상처받고 무시당하고 실망하고 애정을 받지 못하거나 낙담하는 상황까지 모두 포함된다”고 했다. - P. 115

  연대와 소통은 여성들에게 매주 중요한 덕목이다. 그것이 남성보다 큰 여성의 장점이라고 믿는다. 함께 더불어 산다는 말은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만 가능한 가족이기주의와 거리가 멀다. 자신을 찾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모두에게 중요하다. 사랑과 섹스, 자유와 행복에 대한 심리 치료 사례들과 저자의 충고는 우리들에게도 귀담아 들을 내용이 많다. 문화적 토양이 다르고 ‘독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다를 것 같으면서도 어느 사회나 유사한 측면이 있어 놀랍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혼자인 인간이 결혼을 통해 둘이 될 수는 없다. 삶의 형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이 영원할 수도 없다. 남편과 아이들이라는 환상과 행복한 가정의 파수꾼으로 자처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한번쯤 찾아올지도 모를 위기에 대해 저자는 ‘위기의 주부들’처럼 살 것인가 ‘혼자’ 살 것인가 묻고 있다.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의 형태라 할지라도 스스로 행복할 권리가 있음을 깨닫고 혼자라는 사실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충고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혼자 있음은 선물이다. 혼자 있음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것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두렵더라도 가슴을 열어 맞아야 한다. 또한 혼자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두려움이 사라짐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 기회를 얻게 된다. 살면서 맺는 모든 관계는 가르침을 준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주고자 하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혼자 있는 시간은 나 자신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거울과도 같다. - P.200  

090607-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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