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 시인선 358
정일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1초가 길 때

사랑이 위대한 것은
번쩍,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나를 찌르기 때문이다
서정시가 위대한 건
시 한 편을 읽는 그 짧은 순간
사람의 영혼, 자연의 색깔로
달궈지기 때문이다
나를 찔러 쓰러뜨리지 못하는 사랑은
나를 달구지 못하는 서정시는
그건 실패한 암살범과 같다
사랑은 목표물 향해 이미 당겨진 방아쇠
서정시는 전부를 쓰러뜨리는 한순간의 감염
테러리스트여 번개처럼 나를 찔러라
당신의 칼끝 나를 치명상 입히는 데
1초도 긴 시간이니


  서정시를 읽는 여름밤, 창밖의 내린 어둠만큼이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산다는 일이 ‘그립다’는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여전히 따뜻한 가슴으로 움직여진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랑’을 이야기 한다. 서정시는 사랑이다. 1초도 긴 시간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것은 사랑의 역설이다. 폐부 깊숙이, 단번에 찌를 수 없다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속도가 승부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승부가 결정되고 난 뒤 속도의 문제가 남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히고 머리를 거쳐 발에 도달한다. 다른 글과 구별되는 시의 특징은 전달 방식이 아니라 속도와 여운에 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처럼 따뜻하게 전해지고 의미가 구성되고 전체가 다가오며 천천히 감동이 밀려오지 않는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는 엘리어트의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서정시가 내게 도달하는 시간은 1초도 길다.

  정일근의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를 1초 만에 읽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누구나 기다리는 일이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나는 무엇을 기다렸을까? 아니 무엇을 기다리며 사는 것일까? 기다릴 줄은 아는 것일까? 먼 바다에 나가 고래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하지만 고래는 기다리는 사랑이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삶의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정일근의 이번 시집은 온몸으로 신음소리를 낸다. 기다림은 이별 이후에 찾아오는 고통의 화인같은 것이다. 그의 시집 곳곳에 숨어 있는 삶의 고통과 허망함은 우리의 그것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울산 ‘은현리’라는 예쁜 이름의 동네에서 살고 있는 시인이 보인다. 기다림과 그리움 사이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이.

  시집을 다 읽고 난 후 홍정선의 해설을 본문만큼 재미있게 읽었다. 시집 곳곳에 묻어 있는 상처를 확인하고 그의 생을 들여다보는 일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인에 대해 말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을 홍정선을 용감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헤쳐 나간다. 시인을 통해 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통해 시인을 말하는 일이 위험천만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있게 그리고 차분하고 꼼꼼한 시읽기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우주를 이해하는 일이다. 생의 진솔한 기록이기도 한 시를 통해 시인을 읽어내는 일은 아프지만 감동적이다. 서정시는 시인의 영혼을 기록한 것이다. 그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알 수 있고 그의 말과 숨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더구나 그가 보여주는 세상과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공감한다면 두 말할 나위 없다.

자연론

풀 한 포기 밟기 두려울 때가 온다

살아 있는 것의 목숨 하나하나 소중해지고

어제 무심히 꺾었던 꽃의 아픔

오늘 몸이 먼저 안다

스스로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시간 온다

그 죄에 마음 저미며 불안해지는 시간 온다

불안해하는 순간부터 사람도 자연이다


  은현리에 사는 시인은 은현리의 일부가 되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생의 어떤 원리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닌지.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세계를 우리는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닌지. 꾸며진 말과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인 불안을 알고 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자꾸만 부끄워진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나와 먼 미래의 내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다.

  시를 읽으며 떠올린 상념과 끝간데 없이 달려가는 상상을 넘어 허상, 공상, 망상의 세계조차 즐겁다. 연결고리 없이 퍼져나간 생각의 자락들은 돌아올 줄 모른다. 한 편의 시는 생의 나침반이며 거울이고 연인이며 일기가 되기도 한다.

갈림길

길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너에게로 가는 길이 나에게 있었다
나에게로 가는 길이 너에게 있었다

지금 가장 멀고 험한 길 걸어
너는 너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나는 나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이승에서의 갈림길은 여기부터 시작이다

이제 이쯤에서 작별하자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것이 길이니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것이 길이니


  생의 모든 순간에 마주하는 이별에 대하여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갈림길에 서서 시인은 이쯤에서 작별하자고 말한다. 길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으니 갈림길에 도착하면 작별해야 한다. 갈림길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걷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닐까?

  그리하여 어느 날, 갈림길인 줄도 모르고 혹은 서로를 보지도 못하고 갈림길에 도착하게 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밤하늘에 달이 밝다. 부끄러운 듯 반쯤 얼굴을 가린 달빛은 언제나 그만큼의 밝기로 비춘다. 지구의 반대편에서도 같은 밝기와 크기와 모습인지 모르겠으나 서로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전혀 다른 하늘 아래서 함께 바라볼 수는 있을 것이다. 쓸쓸한 섬처럼 외롭게 놓여있는 달빛이 유난히 쓸쓸하다.

  시인의 신음소리만큼 아픈 소리를 내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가 가득한 정일근의 시집이 1초 만에 읽힌 이유는 달에게 물었다.

쓸쓸한 섬

우리는 서로를 보지 못했는지 모른다

서로 바라보고 있다 믿었던 옛날에도
나는 그대 뒤편의 물을
그대는 내 뒤편의 먼 바다를
아득히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섬이다
그대는 아직 내릴 곳을 찾지 못해 떠도는
저녁 바다 갈매기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내 밤은 오고 모두 아프게 사무칠 것이다

 

090731-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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