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한번 하자.
  - 싫어.


  도입부가 황당한 소설이다. 독자들은 어리둥절한 채 ‘한번 하자’의 목적어를 찾기 시작한다. 작가는 모른 척하고 주인공의 일상을 서술하기 시작한다. 눈을 뜨자마자 담배를 찾다가 ‘명호씨’의 것을 슬쩍 하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고3 남학생이다. 수능이 끝나고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주인공 ‘준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섹스’밖에 없다. 여자 친구 ‘서영’이게 ‘한번 하자’고 조르는 고3 남학생의 모습은 너무나 적나라하여 오히려 코믹하게 읽힌다.

  청소년들에게 ‘성(性)’에 관한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내려놓을 수도 먹을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 사춘기를 겪으면서 성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최고조에 이른다.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야동’은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최고의 성교육 학습 자료다. 인간의 신체 발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 현실에서 답을 구할 수 없어 생기는 괴리현상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입시와 취직 전쟁을 피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소설조차 드물다. 현실은 고사하고 문학에서조차 금지되어 있는 청소년들의 성문제를 본격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는 박현욱의 <동정 없는 세상>이 빛나는 첫 번째 이유가 여기 있다.

  인 에릭 로샹의 영화 『동정(同情) 없는 세상』을 『동정(童貞) 없는 세상』으로 표현한 이 소설은 제6회 문학동네작가상 당선작이며 박현욱의 데뷔작이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소설이 영화화되어 주목받기도 했는데 현실적 인간, 사회적 제도 문제에 관심이 많은 작가인 듯싶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우(Abraham Maslow, 1908~1970)는 인간이 성장하고 발달하는 과정을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그는 먼저 인간 본성에 대해 세 가지 가정을 하고 있다.

1.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갖고 있다.
2. 인간의 행동은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3. 인간의 욕구는 기본욕구(생리적인 욕구, 안전욕구)에서부터 상위욕구(소속과 애정욕구, 자아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까지 5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욕구 충족에는 위계가 있어서, 마치 우리가 양동이에 물을 부으면 아래로부터 위로 물이 차오르듯이, 반드시 하위에 있는 욕구가 먼저 충족되고 나서야 상위 수준의 욕구를 추구할 수 있다고 한다.

  서론이 너무 장황했나? 생리적인 욕구가 해결되지 않고 이해도 설명도 해결도 되지 않는데 어른들은 대학 입시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청소년들의 성문제는 단순한 억압이나 교육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결혼하는 나이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는 점점 더 높은 학력과 교육과정이 요구된다. 대한민국에서는 군대까지 갔다 와서 최소 20대 후반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소설의 미덕은 첫째가 ‘재미’다. 이 소설은 재미도 분량도 서점에 서서 두어 시간이면 읽고 나올 수 있다. 우선 책읽기의 재미를 붙이고 공감할 수 있는 책을 찾는 다면 가볍게 <동정 없는 세상>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다.

  성장 소설이라고 불리는 소설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이 소설은 가장 직접적이고 솔직하다. 정공법을 선택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인 경우가 많다. 에둘러 설명으로 하품나는 성교육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을 지루하게 하는 것보다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상담과 문제 해결 방법을 고민할 때다.

  이 소설은 단순하고 재미있는 ‘준호’의 성장 소설만으로 볼 수는 없다. 준호는 아버지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게다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백수 삼촌을 ‘명호씨’라고 부르고 어머니를 ‘숙경씨’라고 부른다. 막나가는 학생이라는 뜻이 아니다.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어머니의 태도는 준호의 ‘대학’ 고민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만든다. 적어도 부모의 기대나 억압 때문에 좌절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준호의 고민은 오늘도 내일도 한 번 하는 것뿐이다. ‘엄친딸’인 여자 친구 서영이는 잘 생긴 나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하지만 그녀 역시 남자친구 문제로 고민했을 것이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대한민국의 학벌문제, 한 부모 가정, 청년실업까지 읽어낸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준호나 서영이의 상담역으로 등장하는 삼촌 ‘명호씨’는 십 년째 박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다. 준호의 성문제를 상담하는 내용이나 대학에 가야하는 이유에 대한 짤막한 충고가 이 소설을 가볍게만 볼 수 없게 하는 요소가 된다. ‘한번 하자’로 시작해서 ‘한번 하자’로 끝나는 재미있고 유쾌한 소설을 통해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현주소를 짚어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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