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심리학 - 가르치는 사람들을 위한 행복한 치유
토니 험프리스 지음, 안기순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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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선생님’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겸손해져야 한다. 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먼저 살았던 사람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닐까? 교사는 많지만 스승은 찾기 힘들다는 말들을 쉽게 한다. 여기서 교사는 단순하게 지식을 전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고 스승은 깨달음을 준 존경의 대상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교사와 학생은 많지만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아득하기만 하다.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가리켜 21세기의 완전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그말의 함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완전한 인간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단점과 약점을 가지고 있다. 기준과 해석을 달리하면 교사나 스승이나 그저 평범한 범부일 뿐이다. 다만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무엇을 배웠고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교사가 될 수도 스승이 될 수도 있다.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래포(rapport)가 형성된 후에야 관계가 형성되고 신뢰가 쌓이며 지식 너머의 전 인격적 합일과 동화가 이루어진다. 가르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스승이 될 수 없다.

  꽃으로도 아이들을 때려서는 안 되고 학생들의 인격과 인권 또한 교사의 그것과 똑같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스승과 제자 사이가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기란 좀체로 힘들다. 학생들은 발달 단계나 성장과정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관심을 가진다. 심리적 태도와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다. 하지만 교사들의 역할과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 다양한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사회적 관심이 부족하다. 그래서 토니 험프리스의 <선생님의 심리학>은 눈에 띠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가르치는 사람들을 위한 행복한 치유’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교사는 물론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읽어야 할 책이다. 예상 독자가 선생님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벌어지는 문제 상황과 심리상태를 교사에 맞추고 있다. 학생, 동료, 관리자와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와 그때 느끼는 심리상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관한 조언과 충고를 얻을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교사는 ‘철밥통’으로 불린다. 일반인들은 심리적 스트레스와 갈등과 긴장을 짐작하지 못한다. 일부 타성에 젖은 교사들로 인해 불신 받는 전체 교사들은 대한민국 전체 교사들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하지만 교사들은 행복할까? 이 책에서 말하는 ‘선생님은 왜 스트레스를 받는가, 자부심이 높은 선생님은 흔들리지 않는다, 교무실에서 즐거운 선생님 되기’ 등 각 장의 제목은 매력적이다. 그 원인을 진단하는 저자는 직접 중등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수많은 교사들의 심리치료를 통해 쌓은 해결방안까지 제시한다.

  결국 선생님과 학생을 위한 치유의 심리학은 관점과 관계의 문제로 요약된다. 저자는 부적응 행동이 언제나 옳다는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다. 한국의 교육환경은 나름의 독자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문화가 다른 서양의 관점이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근대 이후 탄생한 ‘학교’라는 공간과 교사, 학생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명의 교사가 40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수업과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업무는 학교 환경 자체의 한계를 말해준다. 그 속에서 교사 자부심을 갖고 거의 완전한 인격체가 되어 어떤 종류의 학생이든 맞춤식 교육과 상담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제나 학교가 불행한 곳만은 아니다.

  꿈꾸는 아이들과 그들이 믿는 선생님이 존재하는 한 희망을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행복한 교실은 교사와 학생이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교육의 최전선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때로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매우 힘겨운 삶이다. 업무 곤란도와 스트레스의 정도를 명시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겪는 어려움과 심리적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갖는 데서 교육 문제를 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바라는 원만한 학교는 가능한가? 저자는 효과적인 학교, 효과적인 지도자, 시스템에 대해 제안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공허한 울림으로 들린다. 하지만 철저하게 교사들의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책으로 읽혀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들을 치유하기 위한 심리학이 아니라 평소 생활에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행동지침으로 여겨할 내용들이 각 장마다 조목조목 항목화 되어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내용들이다.

  교육은 가치 중립적인가?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 가치 지향적인 인간이 어떻게 가치 중립적 태도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 교육의 방법과 교사의 태도를 넘어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교사가 겪는 심리치료용 도서로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원인과 제도적 모순들에 대한 분석은 전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이 책에서 주장하는 저자의 몇 가지 이야기는 귀담아 듣고 새겨두어야 한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당신은 누군가의 선생님이고 당신 아이들의 영원한 선생님이므로.

교실에서 선생님의 부적절한 행동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의사소통

- 학생들에게 소리 지른다.
- 학생들에게 명령하고, 학생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 통제의 수단으로 야유하고 빈정거린다.
- 학생들을 비웃고, 꾸짖고, 비난한다.
- 학생들에게 ‘어리석다’, ‘둔하다’, ‘약하다’, ‘게으르다’ 등의 꼬리표를 붙인다.
- 신체적으로 학생들을 위협한다.
- 학생들을 떠민다.
- 학생에게 폭력적이다.
- 학생을 서로 비교한다.
- 일부 학생을 좋아하지 않는다.
- 눈에 띄게 총애하는 학생이 있다.
-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지 못한다.
- 학생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 지나치게 엄격하다.
- 수업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에게 짜증을 낸다.
- 학생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대한다.
- 학생들이 공부를 하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 학생들에게 어떤 애정도 느끼지 않는다.
- 실수와 실패를 처벌한다.
- 학생이 학업에 어려움을 느껴도 도와주지 않는다.
- 실수를 해도 결코 사과하지 않는다.
- 학생에게 공손하게 말하지도, 감사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 문제 행동에 대해 일관성 없고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인다.

수업에 대한 선생님의 태도

- 시간을 낭비한다.
- 수업을 흥미롭게 진행하지 않는다.
- 수업 준비를 하지 않는다.
- 수업 시간 중간에 교실을 나간다.
- 지난 시간 수업내용을 습득하지 못한 학생을 배려하지 않고 다음 수업을 진행한다.
- 학생 중심이 아닌 프로그램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선생님 자신의 정서적 상태

- 자주 화를 내고 우울하다.
- 가르치는 일을 싫어한다.
- 자신의 교수 능력을 의심한다.
- 학급 통제권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 동료가 자신을 어떻게 볼지 걱정한다.
- 학생이 자신을 좋아해주길 바란다.
- 자부심이 낮다.
- 학생을 무서워한다.


교실에서 선생님의 긍정적인 행동 점검목록

1. 각 학생과 조건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2. 자부심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한다.
3. 사람과 행동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4. 학습이 능력의 지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5. 성공과 실패가 상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한다.
6. 실수와 실패를 학습 기회로 사용한다.
7. 성과보다는 노력을 강조한다.
8. 학습은 긍정적인 관련성만을 갖는다고 확신한다.
9. 자신의 필요를 학생에게 투사하지 않는다.
10. 학생의 문제 행동을, 선생님에 대해서가 아닌 학생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11. 항상 차분하고 긴장을 푼 상태를 유지한다.
12. 모든 학생에 대한 반응이 공정하고,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하다.
13. 학생들을 자주 칭찬하고 격려한다.
14. 학생을 통해 드러나는 대처하기 힘든 문제에 긍정적이면서도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15. 모든 입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16. 수업 준비를 잘 한다.
17. 학생에게 명령하지 않고 요청한다.
18. 프로그램 중심이 아니라 학생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19. 부적응 행동을 보이는 학생과 갈등을 빚지 않는다.
20. 언제 도움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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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 한두 줄만 쓰다 지친 당신을 위한 필살기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 지음 / 그린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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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글을 쓰지만 목적은 다르다. 아무나 글을 쓰지만 관심의 정도는 다르다.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글이 있고 자발적으로 쓰는 글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글을 쓰지 않거나 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졌다. 독해력은 단순히 문자나 언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전통적인 글 읽기 능력과 구별되는 다양한 해석 능력도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과 읽고 쓰는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목적이 다르고 관심사가 제각각일 수는 있지만 읽고 쓰지 않으면서 세상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근들어 글쓰기에 관한 책이 다양하게 쏟아지고 있다. 대입에서 논술고사가 중요한 관문으로 부각되면서 ‘논술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초등학생용 동화책에도 ‘논술대비’라는 관용구가 따라 붙는다. 고전과 명작들을 짜깁기 하거나 요약본이 아닌 생략본 시리즈를 발간하며 청소년에게 독서의 즐거움과 고전의 참맛을 훼손하기도 한다. 물론 이 책들도 모두 ‘논술대비’다. 홈쇼핑에서도 책을 판다. 물론 ‘논술대비’용 도서라는 타이틀이 따라붙는다. 논술대비가 붙은 책이 모두 나쁜 책은 아니지만 글을 쓰기 위해 논술을 잘 하기 위해 따로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 무엇을 읽고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의 입시와 논술은 괴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문제를 알면서도 개선하지 않는 것은 청소년들에 대한 범죄다.

  입시나 각종 시험에 대비한 글쓰기는 관점과 방법이 사뭇 다르다. 정해진 규칙과 틀이 있고 ‘선발’을 위한 채점자를 위한 모범 답안이 존재한다. 즐거움과 무관한 글쓰기는 실용적 관점으로만 접근해야 한다.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는 이와 같은 글쓰기와는 지구 반대편에 있다. 소설가의 글쓰기 수업은 ‘연구 공간 수유+너머’의 강좌라는 사실만으로도 독특한 매력을 주었다. 물론 나의 개인적 취향이지만 직접 강좌에 참여하지 못하는 한을 풀기위해 출판되는 책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책은 글쓰기의 본질적인 측면에 대해 깊이있게 그리고 즐겁게 이야기한다. 작가 나름의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책이다.

  강자는, 진리를 단지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 좋아하고 즐기는 자여서, 자신보다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을 보면 참으로 측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감상적 · 도식적 · 윤리적 · 일상적 · 상투적 · 통념적 언어질서에 복종하는 글쓰기는 약자의 글쓰기다. 반면 스스로의 감각과 사유와 상상을 생성해 내고 즐기며 기성문법을 넘어서는 새롭고 낯선 소수언어를 만드는 자가 비로소 작가고 예술가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란 언제나 소수언어로서의 창작언어를 탄생시키는 일이다. 창작언어를 탄생시키는 일이란, 기성질서와 언어에 저항하고, 기성질서와 언어를 전복하고, 무엇보다 기성질서와 언어보다 더 강해지고 넉넉해진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창작언어는 자연스레 글쓴이의 개성이 묻어나는 언어니고 저항의 언어이고 전복의 언어이고 강자의 언어이고 난장(亂場)의 언어다. - P. 238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는 창조적 언어의 사용이다. 일상적 언어와의 만남이 아니라 명징하고 새로운 의미 부여가 글쓰기의 기본이라는 말이다. 하늘아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서 사용하는 일이 글쓰기의 시작이 아니라 사물을 낯설게 바라보고 감수성을 살린 표현과 언어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 글쓰기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글쓰기의 유일한 도구이자 무기인 언어 사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글쓰기의 즐거움은 맛볼 수 없다.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우선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과 방법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반성적 태도로 지금까지 습관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온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부분들에 대한 관심과 지적은 부차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근본적인 목적이나 방향 그리고 언어와 문장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글쓰기가 시작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 과정에 이르는 지난한 방법들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설명한다. 실제 지도하는 과정에서 마주쳤던 습작들을 난도질하며 함께 읽고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 스스로 공부하는 자세로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로 시작한 글쓰기 강좌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런지 꽤 두꺼운 분량이지만 책장은 쉽게 넘어가고 책을 읽는다기보다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편안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문제는 천천히 운전하는 것과 여유있게 운전하는 것, 신속하게 운전하는 것과 조급하게 운전하는 것, 열심히 읽는 것과 초조하게 읽는 것, 깐깐하게 공부하는 것과 소심하게 공부하는 것, 치열하게 쓰는 것과 욕심을 부려 쓰는 것,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과 고지식하게 고민하는 것, 자부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과 자만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 게으르게 시간을 지체하는 것과 여유롭게 때를 기다리는 것…… 등을 나누어 분별하기가 좀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가 갈린다고 했다. 숨 한 번 돌리자 사랑이 욕정으로 바뀌는가 하면 욕심이 노력으로 바뀌기도 한다. 숨 한 번 돌리는 사이에 무욕이 게으름으로 변하는가 하면 순정이 맹목으로 변하기도 한다. 딴엔 의식적으로 치열하게 열심히 읽고 썼지만, 그것이 다만 조급한 욕심에 불과한 것일 수가 있어서, 마치 <잠입자>의 ‘고슴도치’처럼, 스스로 속는 경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참으로 많은 학생들이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참으로 자주, ‘열심히’와 ‘조급히’를 혼동하고, ‘최선을 다해’와 ‘욕심을 다해’를 혼동한다. ‘자기만의 생각’과 ‘자기만의 고집’을 혼동하고 ‘독장적인 글쓰기’와 ‘독선적인 글쓰기’를 혼동한다. ‘고독한 창작생활’과 ‘고립된 창작생활’을 혼동한다. - P. 365

  사소한 생각의 차이가 전혀 다른 인생을 만든다. MBC를 손보기로 마음먹은 조선일보를 읽다보면 MBC는 대한민국에서 사라져야할 방송국이다. 대통령과 정부 정책을 오해하고 개인적 감정 때문에 온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방송이다. 하지만 <신문읽기의 혁명>을 읽어보고 집단지성에 소개된 ‘오마이 뉴스’를 살펴보면 또 다른 시각과 상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언론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과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신문은 쓰레기다. 언론을 왜 사회의 공기라고 했을까? 질식사 하지 않으려면 판단력을 갖춘 뇌와 말할 수 있는 입과 행동할 수 있는 발이 필요하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글을 쓰기 위한 손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그 사소해 보이는 차이들이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호흡을 가다듬어 보자.

  저자는 에필로그 ‘본질적 감수성’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생각과 행동의 거리. 너무 늦은 행동은 없다. 미래를 위해서 모든 행동은 빠른 것이다. 다만 후회만이 우리의 뒤를 따를 뿐이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우리들의 본능적인, 본질적인 감수성을 기를 필요가 있다. 보다 많은 이웃과 건강한 사회를 얻기 위한 글쓰기가 참된 글쓰기다. 굶주린 아이들의 급식비를 깎기 위해 놀리는 세 치 혀가 아니라 그들의 만행을 역사에 기록하기 위한 글쓰기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책읽기와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혁명이며 행동이고 우리들의 진정한 삶이어야 한다.

  우리의 글쓰기 역시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늦은 것일 수 없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는, 지금 읽고 쓰고 성찰하는 우리 각자의 행동이 언제나 가장 빠른 길이다. 나는 나를 이런저런 망상에 빠트리는 이 문구가 너무 좋다. “모든 행동은 그것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는 늦지 않습니다. 언제나 후회만이 늦을 뿐, 행동은 결코 늦지 않습니다.”(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2009, 194쪽)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첫 번째 행동은 아마 꿈을 꾸는 것이리라. 그리고 가장 빠른 첫걸음은 이제 읽고 쓰고 생각하는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리라. - P. 384

  혼자서 꾸는 꿈은 한갓 공상에 불과하지만, 모두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오늘도 믿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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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나보다 똑똑하다
찰스 리드비터 지음, 이순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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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혁신과 창의성은 개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간의 적절한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리더십은 함께 일하는 것을 재미있게 여기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 P. 165

  내가 틀릴 수도 있다. 물론 당신의 생각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순조롭게 협의가 되고 많은 아이디어가 나온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수록 더 좋은 방법이나 해결 방안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삶의 한 양식으로 채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항상 정답일 수는 없지만 과학적 논쟁이 아닌 한 소수가 정답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수결이 가진 문제점은 인권과 상식의 차원에서 배려하고 나눌 만큼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고 인류는 역사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정치 제도가 아닌 일상적 문제 해결 방식은 더욱 그러하다. 나보다는 우리가 옳다. 하나는 보잘 것 없지만 집단이 가진 힘은 쉽게 무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막강한 권력이나 독재자도 개인이 아닌 집단 앞에서는 끝까지 버텨내지 못하는 것이다. 배려하고 연대하고 함께 참여하는 일은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이끌어 교훈이다.

  웹 2.0 시대를 맞이한 우리들의 생활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전자 민주주의 시대와 정치 그리고 웹 2.0 시대를 맞이하여 대한민국 정치는 그 판형이 뒤바뀌고 있다. 그러자 이제 그 숨통을 조이기 위한 올가미가 우리를 덮친다. 표현의 자유는 억압되고 방송통신위와 미디어법은 민주주의의 싹을 자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정치와 사회는 제도보다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 상식과 시대를 거스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버텨낼 수 있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다시 한번 확인된 국민들의 뜻을 외면하는 정권의 말로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생활 속에서 ‘집단 지성’의 위력을 실감했고 그 이후에도 미국산 수입소에 대한 완강한 거부의 뜻을 촛불로 표현했다. 시대를 읽어내지 못하는 정부 때문에 분노하기 보다는 차분하게 대응책을 마련하고 현실 개선의 의지를 밝혀야 할 때다.

  찰스 리드비터의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we-think>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더 성능 좋은 자동차와 보다 안락한 집을 경험했는데 이명박 정부에서는 그것을 빼앗았다.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강물을 거꾸로 돌리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런데 현 정부는 그것을 시도하고 있다. ‘집단지성’에 귀 기울이지 않고 독단과 특정 집단의 이익에 복무하는 사람들이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웹을 넘어 경제와 실생활을 지배하는 집단 지성의 모든 것을 밝히고 있는 이 책은 ‘집단 지성’ 방식으로 집필되었다. 웹에서 벌어진 난상토론과 댓글들을 내용에 반영하고 아이디어를 얻어 책으로 묶어다니 책 내용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획기적이다. 인터넷의 미래에 대해 예견하는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하지만 공유하는 ‘공유하는 인간’의 미래는 어둡지 않다.

  ‘집단 지성’이라는 말은 즉시 위키디피아를 떠올린다. 네이버의 ‘지식in’도 집단 지성을 대표한다. 전 국민의 상식을 초등학교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했다는 혹평을 듣기도 하지만 여전이 ‘식인’(지식인)이 형과 ‘이버’(네이버)형에게 물어보는 사람들은 늘어간다. 가장 손쉽게 다른 사람들의 지식을 공유하고 나의 앎을 나눌 수 있다는 발상은 신선하다. 앞으로 또다른 형태로 진화, 발전할 것을 믿는다. 모든 국민이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마이 뉴스’ 또한 집단 지성의 대표적 사례로 이 책에 등장한다. 기사의 선택과 편집 자체가 사람들의 생각을 재단한다. 그것 자체가 언론 권력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오마이 뉴스’의 시도는 새로운 언론과 미래 언론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집단 지성의 물결은 끊임없이 동심원을 그리며 확산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아이디어가 공유된다면 미래는 어둡지 않다고 믿는다.

우리는 아이디어를 공유해야 한다. 그것만이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아이디어를 공유하면 아이디어는 점점 늘어나고 자라나서 아이디어를 더욱 강화하는 순환고리를 이룬다. 우리는 무엇을 갖고 있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공유하고 있느냐에 따라서도 규정된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백년 동안 신조로 삼아야 할 가치관이다. - P. 296

  미래 사회를 점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그 흐름을 거시적 안목에서 살펴본다면 변화의 큰 틀을 볼 수 있다. ‘공유’는 시대의 사명이 될 것이고 성공 조건이 될 것이며 새로운 사업 모델이 될 것이다. 그 실제 사례들과 전망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단순히 현상에 대한 나열이나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집단 지성이 지닌 힘과 미래를 살펴볼 수 있는 지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집단 지성’이 만병 통치약일 수는 없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공존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는 이 책이 제시하는 미래의 청사진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것인가는 물론 우리들의 몫이다. 집단 지성의 미래에 대해 공유, 인정, 참여 그리고 자율규제로 마무리하고 있는 저자의 목소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함께 생각하라’는 맺음말을 다시 한번 함께 생각해 보자.

  향후 수십 년 동안, 우리는 두 세계 사이의 투쟁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한 세계는 익숙하기는 하지만 기능장애가 심한 장애 세계, 즉 우리를 위해서 결정이 내려지고 우리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행동이 이루어지는 세계다. 또 다른 세계는 갓 출현하여 혼란을 일으키기 쉽고, 혁명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세계, 즉 함께 사고하고 함께 일하는 세계다.
  ‘함께’의 아이디어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웹이 창조하는 세계로 들어갈 방안을 아주 간단한 방법을 구상하고 싶다면 ‘함께’ 생각하라. - P.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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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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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망각이 없다는 인간은 살 수 없다. 시간 앞에 드러나지 않는 진실이 없는 것처럼. 오늘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평생을 혼자 살아야 했던 사람이 어디 한 둘 일까마는 남의 일 같지가 않다. 40일간 뇌사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던 동생이 깨어났을 때 담당 의사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사고 당일부터 며칠 동안 앉은 자리에서 물 한 모금 목에 넘기시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고 눕지도 못하는 어머니를 지켜야하는 일이 더 큰 고통이었다. 일생을 살면서 기적이라는 말을 실감한 것은 40일만에 동생의 부활이었다. 이제는 잊었다고 믿고 싶다.

  이제는 머나먼 미국 땅, 장영희 교수가 박사과정을 밟았던 대학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있는 동생을 잊고 산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책날개에 적힌 장영희의 양력을 읽다가 문득 동생이 떠올랐다. 희망은 때때로 인간에게 고문이 되기도 하지만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 사람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마지막 빛이다. 덤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생을 바라보는 마음의 갈피는 복잡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다녀온다는 인사를 잘 하지 않는다. 모든 순간이 안녕이다. 매순간 생의 마지막처럼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의도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가졌던 절망과 간절함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은 그렇게 늘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불행을 던져 놓는다. 운명에 순응하며 인생이 결정되어 있다는 믿음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난 늘 운명 앞에 겸손해졌다.

  유방암을 극복하고 척수암을 이겨내며 강인한 삶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장영희 선생님의 죽음은 평범하다. 다만 그녀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던 희망의 메시지를 기억할 뿐이다. 삶은 기적이며 찬란한 눈부심이고 평범한 일상의 지속이 가장 큰 행복임을 깨닫는 과정일 뿐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장영희 글들은 소박하고 담백한 숭늉같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자극적이고 강렬한 기억을 남길만한 소스도 메뉴도 없다. 밋밋하고 평범한 시골 밥상같지만 포만감을 느끼며 아주 잘 먹었다는 생각을 들게한다. 그런 음식은 다시 찾게 마련이다.

  그녀의 마지막 책이 되어버린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김종삼의 시에서 빌려온 제목이다.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김종삼의 시세계와 닮아있는 장영희의 산문들은 정갈하고 깔끔하다. 그녀 삶의 이력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같아 읽는 내내 마음이 신산스러웠다.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좋은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며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기에 충분했겠지만 나는 어쩐지 ‘짠한’ 마음이 들었다. 개인적인 감정이니 탓할 사람은 없겠지만 긴 한숨과 안타까움이 깊었다.

  영문학 박사 장왕록의 딸이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장애를 극복하며 미국 유학까지 마치고 대학교수로 살아갈 터전이 마련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부모를 만나 태어나느냐하는 것은 복권과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경쟁과 자본의 힘이 막강한 나라에서 출발선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다. 사회적 계급이 고착화되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강화되고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장영희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복잡해진다. 장애인의 삶과 문인으로서 삶을 함께 걸었던 그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나, 비가 되고 싶어’라는 프롤로그에서부터 ‘희망을 너무 크게 말했나’는 에필로그까지 정일 화백의 그림과 어우러져 책 전체가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내용도 그림도 가장 선하고 평화롭고 부드러운 것들로 가득하다. 일상에서 길어올린 깨달음과 겸손이 곳곳에 묻어있고 배려와 따스함은 덤으로 놓여있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 이야기도 아니고 어렵고 딱딱한 이론도 없다. 저자의 삶에서 배어나온 자잘한 일상들과 너무나 인간적인 약점들이 녹아있어 더 애틋하고 편안하게 읽힌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일상이나 단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게는가. 저자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숨기지 않는다. 신체의 장애가 있어 겪는 불편함이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로서 겪어야하는 아쉬움들이 일상의 에피소드로 그려진다. 과장하는 몸짓도 애써 치장하는 언사도 없다. 담담하게 느낀 그대로 편안하고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이야기같다.

두 개의 독에 쥐 한 마리씩을 넣고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밀봉한 후 한족 독에만 바늘구멍을 뚫는다. 똑같은 조건 하에서, 완전히 깜깜한 독 안의 쥐는 1주일 만에 죽지만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독의 쥐는 2주일을 더 산다. 그 한 줄기 빛이 독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되고, 희망의 힘이 생명까지 연장시킨 것이다. - P. 232 ‘에필로그’중에서

  이미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한 저자의 이야기가 가슴 뭉클하게 들리는 것은 삶과 죽음의 일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낸다.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말이다. 먼저 갈다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모아 놓는다면 그렇게 많은 말들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담담하고 평화로운 일상들,과 상식이고 합리적인 행동들, 타인을 배려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마음들이 모여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과 내일의 희망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한다. 세계를 비극적으로 인식해도 늘 나는 행복하다고 자위하며 내일 죽을 것처럼 살 수 있는 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살아온 것도 살아갈 것도 어쩌면 모두 기적인지 모른다.


09062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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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
마비쉬 룩사나 칸 지음, 이원 옮김 / 바오밥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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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의 문제는 결국 철학적 사유로 귀결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동물은 물론 같은 인간끼리 서로 학대하고 살인한다.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인간 본성의 문제는 사회와 국가의 문제로 확대되며 평화와 화해인가 무력과 전쟁의 논리인가는 결국 선택의 문제가 된다. 사람들의 생각은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고 쉽게 타협하지 않으며 상대를 인정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인간의 행동 패턴과 사유 방법은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인지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두 가지 모두 영향을 준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인간은 왜 그런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가?

  수많은 심리학자들의 심리실험을 통해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연구해왔지만 악을 제거하기 위한 해결책은 없어 보인다. 상상할 수도 없는 악의 평범성은 우리 안에 내재한 시한폭탄처럼 여겨진다. 언제든 상황만 만들어지면 누구든 타인의 인권을 유린하고 학대하며 심지어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전쟁은 그 모든 것들을 정당화 한다. 군인의 존재 이유가 그것이다. 군복을 입는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생물체가 되는 것일까?

  전 세계의 큰 형님이 되어버린 미국은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나 시비를 걸 수 있다. 맘에 들지 않는 이유는 만들면 된다. 시비는 괜히 거는 게 아니라 자국의 이익과 직결된다. 경찰국가로 나서 지구의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원하지 않는 개입과 간섭은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진다. 하긴 광우병를 취재한 <PD 수첩>의 기자에게 반미 종북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대한민국의 검사의 뇌구조도 궁금하다.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아랍계 미국인 마비쉬 룩사나 칸이 쓴 <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는 미국의 이면을 폭로한다.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사실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책이 갖는 의미가 새로움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그들의 추악한 본질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북한의 인권을 말한다. 어느 사회나 모순이 있기 마련이고 문제가 있고 개선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는 일반론에는 동의하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아랍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행태는 9.11 테러에 대한 복수에 다름 아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쏟아지는 횡포는 견디기 어렵다. 힘 있는 소수와 힘없는 다수의 싸움만큼 처절한 것도 없다. 미국과 아랍인 전부와의 싸움으로 비쳐지기도 하는 관타나모 이야기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끔찍한 야만의 기록으로 남겨질 것이다. 신성한 미국 영토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그들은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지 모르겠다. 테러리스트 처벌을 위한 명분으로 죄 없는 사람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해도 되는 것인가.

  이 책은 마이애미대학 로스쿨에 재학 중인 여성이 쓴 일기다. 보고 듣고 숨 쉬고 느낀 모든 것들을 열심히 기록한 이야기들은 바로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불행으로부터 비껴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책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 줄지도 모른다. 상황은 다르지만 억울한 탄압이나 폭력에 시달리는 대한민국의 비정규직, 노조, 철거민, 외국인 노동자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그렇지 않다. 그녀의 이야기는 바로 이 시대의 증언이며 현실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치는 비명이다.

  단순한 일기가 아니라 시대의 기록이며 미국의 본질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돋보기가 될 수 있는 책이다. 관타나모에서 만난 사람들은 평범한 아랍인이 많다. 실제 테러를 저지르고 많은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한 사람도 있겠지만 상금에 눈이 멀고 물건처럼 팔려온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재판 한 번 받아 보는 것이다. 이유도 모른 채 몇 년씩 갇혀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상황은 끔찍하다.

  독재정권 시절 인권이라는 단어조차 잊고 살았던 우리에게 이 책은 아픈 상처를 기억나게 할지도 모른다. 권력 유지 수단으로 국민들에게 가했던 폭력과 고문과 공포가 되살아나는  듯한 현실에 분노하며 이 책이 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아들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관타나모에는 그나마 무료 변론을 위해 찾아오는 변호사들이 있다. 더 끔찍한 상황들과 비교하면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집으로 돌아갔지만 소아과의사 무소비, 알자지라 방송국 기자 알 하즈, 염소치기 청년 하즈 등 많은 사람들에 관타나모에 왜 끌려 온지도 모른다. 그들은 분노하고 억울하고 좌절하면서 세월을 견뎌냈다. 하지만 보상은 없다. 다만 집으로 돌아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할 따름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아프가니스탄계 이민 2세로 파쉬툰어를 구사할 줄 안다. 통역으로 그들을 만난 저자의 생각과 느낌은 문화적 이질감을 넘어 무한한 신뢰와 공감대를 이끌어 낸다. 제한적인 변호업무도 맡게 되고 증거 수집을 위해 위험한 아프가니스탄으로 단신 출장까지 다녀오는 그녀의 흔적들이 이 책의 곳곳에 배어 있다.

  ‘태러와의 전쟁’을 통해 체포된 사람들을 기소도 하지 않은 채 무기한 잡아둘 수 있는 관타나모. 법학도로서 그리고 이민자의 딸로서 과감하게 뛰어든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다. 그녀가 몸소 겪은 관타나모의 실체는 어느 누가 쓴 관타나모 이야기보다 현실감 있게 읽혔다. 객관적 사실과 그녀의 특수한 문화적 토대가 결합되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신선하다. 잘 아는 사람이 그들을 바라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감정에 치우쳐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도 않았고 객관적 사실들의 나열에만 그치지도 않았다. 아주 특별한 논픽션을 읽어나가면서 중요한 글쓰기의 방법과 태도를 배울 수도 있다.

  이 책의 첫 페이지에 적힌 예언자 모하메드의 글이 새삼스럽다.

“배고픈 이를 먹이고 아픈 이를 돌보아라.
억울하게 갇힌 이를 풀어주고 억압받는 이를 도와주어라.”



090619-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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